[BOOK世通, 제주 읽기] (226)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사진=알라딘.

이 책은 한국전쟁기 미국 공군의 공중폭격의 배경, 목적, 전개과정, 결과를 다루고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후 당대의 시대정신이 된 ‘반전평화주의’가 미국의 한국전쟁 수행과정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한국전쟁기 반전평화주의의 영향 아래 계획되었던 미 공군의 정밀폭격정책이 중국군의 참전과 유엔군 지상군의 패퇴라는 군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와해되는 과정도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이 강조하는 또 다른 주제는 미 공군의 무차별적 폭격 아래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고, 이에 따라 북한 주민들의 일상 또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라는 내용으로 이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당시, 전쟁수행방식에 대한 군인과 대중의 인식이 지금과는 다른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전쟁 초기부터 남한지역 전술항공작전을 전담한 전투부대는 미 극동공군 제5공군과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였다. 전쟁 승리를 위해서는 적의 인구밀집지역 전체를 핵무기나 소이탄으로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했던 인사는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 폭격기사령관 오도넬 같은 미 공군측 인사들이었다. 반면에 애치슨을 중심으로 한 국무부는 전시 민간인 보호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점을 수용하여, 폭격시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 대통령과 합동참모본부는 국무부의 입장에 동의했다. 

미 공군수뇌부와 국무부의 입장 차이는 1950년 11월 중국군이 참전하기 전까지 공중폭격 방식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신경전을 반복했지만, 워싱턴은 한국전쟁 초기 인도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도 실제 전투현장에서의 폭격은 무차별공격이 가해지곤 했다.

전쟁 초기 북한지역 폭격을 전담한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는 B-29중폭격기로 구성된 전투부대였고, 주무기로 파괴폭탄만을 사용했다. 하지만 폭력양상에서 중요한 사실은 조종사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에서 진행된 맹목폭격이 매우 빈번히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조종사들은 맹목폭격을 레이더폭격이라고 불렀다. 원산과 평양 등의 목표물을 향한 대량폭격에서 이 방식을 빈번히 활용했다. 미 공군의 소위 ‘정밀폭격’은 매우 낮은 목표물 적중률 속에서 진행되었고, 결국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 현지에 있었던 영국 『데일리워커』 기자는 북한 사람들의 충격과 공포와 관련하여, 미공군의 공중폭격을 ‘테러공격(terror bombing)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원산 시내의 폭격 희생자 대부분이 어린이, 여성, 노인으로 구성된 현실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눈에 비친 미 공군의 정밀폭격은 순수 민간인들을 향한 무차별폭격에 다름없었다.

 -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151쪽에서

저자에 따르면 중국군의 참전 이후 1950년 11월 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를 비롯해 육군참모총장 도일 히키, 작전부 에드윈 라이트,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 등이 모였고, 맥아더는 유엔군의 한국전쟁 수행방식의 급격한 변화를 뜻하는 중대한 명령을 하달했다. 

맥아더의 명령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모든 설비와 시설, 마을은 군사적이고 전술적인 목표물이 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만주 국경에 있는 거대한 수력발전소와 한반도 내 또 다른 수력발전소들뿐이다.” 그 외에 북한지역에 있는 모든 시설은 언제라도 완전히 파괴 가능한 군사목표로 간주되었다. 

맥아더의 명령 이후 전선과 압록강 사이의 북한 주요 도시들을 완전히 파괴해버리겠다는 유엔군사령부의 군사정책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극동공군은 11월 소이탄 폭격으로 한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도 북한 북부지역의 주요도시와 마을을 초토화했다. 소이탄 투하 직후 전폭기 기총소사가 이어졌고, 그 목표물 자체가 도시 주민들이라는 점에서 매우 비인도적인 작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농촌지역의 소규모 마을들과 산간지역의 고립된 가옥들까지 소이탄 폭격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정전협정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1952년 7월 10일 극동공군의 새로운 작전지침이 제5공군과 폭격기사령부에 하달되었다. 이때부터 북한지역의 촌락과 도시는 적군이 값비싼 댓가를 지러야 할 핵심공격대상으로 재설정되었다. 공격대상은 북한지역 78개의 도시와 촌락으로 설정되었고, 7월 11일에는 극동지역의 모든 항공부대가 평양의 목표공격에 투입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미공군 폭격은 도시와 농촌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 초기의 소위 ‘정밀폭격’ 에서도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고, 전쟁이 가속화되는 와중에는 북한지역의 거의 모든 도시와 촌락이 공격대상으로 설정되면서 평범한 북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저자는 역사적 실체에 가깝게 헤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민간지역 자체를 타깃으로 한 수많은 폭격작전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미군 폭격으로 인한 무고한 죽음은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켰고 북한주민들의 ‘반미주의’의 핵심배경을 이루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또한 단순히 미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에 필적하는 적대국인 ‘중국’ 또한 ‘그들을 위한 전쟁’을 수행했다고 비판한다. 현재의 국제적 정세에서도 ‘그들을 위한 전쟁’이 재개될 경우 또다시 남과 북의 평범한 민간인들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할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20세기 야만의 전쟁은 평범한 군인과 민간인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들의 꿈과 일상을 앗아갔다. 그러나 평화를 소망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조차 꺾지는 못했다. 평범한 우리 이웃들은 저자의 소망처럼 “극단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를 이미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