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나의 열여덟일기] 많이 배려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서...

   
 

 
 
새벽 여섯 시. 내가 가방을 싸는 것인지 가방이 나를 싸는 것인지. 앉은자리에서 기어이 해 뜨는걸 보고야 만 뇌는 코끼리 열 다섯 마리가 말 타기를 하는 듯 쿵쿵쿵쿵 울린다. 뜨끈뜨끈해진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꾸물꾸물 기어가서 방석을 쌓아놓은 위로 픽 쓰러지면 정말 이제야말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라는 느낌이 되어 쿨쿨.

분명 거실에서 이불도 베개도 없이 멋대로 늘어져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면 안방의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날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이불까지 곱게 덮혀 있다. 필름도 끊기고 건전지도 완전 방전 된 사이, 부모님이 날 흔들어 깨워 침대로 옮겨 이불을 덮어주신 것이리라.

일어나기 싫어 한참을 꾸물대 봐도 휴대폰의 알람 소리는 멈추지 않고, 피로에 절은 내가 간신히 나마 침대 밖으로 나설 수 있는 건 아침 열 시가 다 되어서다. 화장실에서 찬물에 고개를 담그고 열부터 하나까지 천천히 세고 나면, 그래도 조금쯤은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 든다.

아침식사로 아빠가 갈아두신 토마토 주스를 들이켜고 독서실로 달음박질치노라면, 가끔 내가 이러려고 학교를 그만뒀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학교를 그만두면 좀 한가하고 편안하게, 시간에 쫓겨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헷갈리지는 않게, 좀 덜 바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사실, 난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의 단 하루도 학교를 다닐 때보다 한가하게 지내보지 못했다.

3년 과정을 한 해에 소화해내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부담인데, 학원도 다니기 싫고, 인터넷강의도 정말 극한순간이 아니면 보기 싫은 못된 성격이라, 혼자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다 거쳐 가야 하니 걸리는 시간도 결국은 두 배. '바쁜데 갈 길은 먼' 전형적인 공부 못하는 학생의 변명을 잔뜩 늘어놓으며 내쉰 한숨에 무게가 있다면, 그 무게에 내 독서실 책상은 꺼져도 100m 아래까지는 꺼졌을 거다.

공부 배분은 9 : 1. 수리가 9, 나머지 모든 과목을 합쳐서 1. 아무리 그래도 비가 내리는 수학 문제집을 보면 가끔씩 울음까지 터져 나온다. 독서실 화장실에 숨어들어 실컷 눈물을 빼고, 다시 공부. 잡생각. 공부. 잡생각.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 보면 눈이 이만저만 뻑뻑한 게 아니다. 독서실 스탠드 아래서 오르는 건 성적만이 아니다. 인공누액을 소비하는 양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안구건조증이 심해질 대로 심해져서 이젠 인공누액을 넣지 않으면 심하게 따갑기까지 하다.

그렇게 인공누액을 여덟 번쯤 넣고, 한숨을 열 네 번쯤 쉬면, 아빠에게서 문자메세지가 온다. 열공 불열공? 피곤 불피곤? 내가 독서실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통화가 곤란해지자 아빠께선 문자메세지를 배우셨다. '김사장님' 하고 장난스레 저장된 아빠의 번호를 보면- 그래. 여기서 포기해서 쓰겠나 하는 맘에 다시 불끈! 일어서게 되곤 한다.

힘들지만. 행복하다. 정말 피를 토할 정도로 힘들고, 돌아버릴 정도로 지쳐서 자다가 깨 헛구역질을 해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프렛셔에 녹아버릴 것 같고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심장은 쿵쾅대고 귀에서 이명까지 들린다. 그렇게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아빠의 열공 불열공? 피곤 불피곤? 과 같은, 너무나 장난스럽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힘이 나는 메세지를 보고, 친구들의 ‘사랑해’ 라는 말, ‘힘내’ 라는 말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또 편지를 읽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08학년도 입시는 최악의 제도란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잘 될 사람은 다 잘 되는 법이고, 내 경쟁상대는 06학번도 07학번도 아닌 같은 08년도 수험생 이니 불공평할 것도 없다. 다들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지친데, 나 혼자 힘들어요 지쳐요 하고 투정부리는 건 너무 꼴사납다.

힘들지만, 정말 너무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힘든 지금을 넘겨낸 기억이, 언젠가 내게 다시 어려움이 찾아 왔을 때엔, 무척이나 소중한 경험이, 또 힘을 낼 수 있는 원천이 되리라 믿는다.

게다가, 난 무척이나 배려 받고 있으니까. 여름만 되면 몸 상태가 까라지는 내가 너무도 신경 쓰인다는 친구의 걱정과, 좀처럼 오르지 않는 성적에 우울해하는 내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시는 엄마, 서툰 솜씨로나마 뭔가 먹을만한 것을 챙겨주려 떡국에 바나나를 썰어 넣는 엽기적인 행동까지 하신 우리 아빠. 방학 내내 날 돌봐주러 서울에서부터 내려온 언니. 이미 학교를 그만뒀음에도 모의고사 시기만 되면 꼬박꼬박 시험지도 챙겨주시고, 응원도 해주시는 담임선생님과, 언제나 기도를 잊지 말라 하셨던 수녀님도, ‘공부는 못해도 좋다. 착한 사람이 되어라. 행복하게 살아라.’ 늘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할머니까지.

모두가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내 이상으로 맘을 졸이고, 속상해하고, 신경 써 주시는데 어떻게 불행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불행해한다면, 난 너무나도 이기적인 아이인 것이겠지.

행복하다. 정보도 모자라고, 시간도 모자라고, 해야 할 일만 태산 같은 좌충우돌 08학년도 수험생은 오늘도 행복해서 입가가 실실 풀려있다. 너무나 까칠한 수학아가씨가 괴롭혀도, 마냥 좋단다. 암만 괴롭혀도 편지를 읽고, 메시지를 읽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니, 까칠하기로 유명한 수학아가씨도 조만간 괴롭히기를 포기하고, 순순히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까 싶다.

   
 
 
언니가 수험생일 때의 기억과, 또 지금 내 마음을 비교해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정작 수험을 치는 수험생보다는, 주변사람이 훨씬 더 불안하고, 답답한 느낌이다. 수능에서 몇 점을 맞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그에 어울리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봐, 그래서 너무너무 소중한 사람이 속상해 할까봐. 그게 그렇게도 걱정되는 일이다.

그러니 내일, 아니 이미 오늘이 되어버린 아침엔 부모님께, 그리고 언니에게 말해야지. 걱정하지 마시라고. 수험생인 나보다 더 조바심 내는 건 자유방임주의인 우리 집 스타일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느냐고. 난 정말로 행복하니까, 가족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있으니까, 그냥 언제나처럼 지켜봐만 주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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