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채명신 “폭도까지 희생자로 결정한 것은 잘못됐다”

극우보수 성향의 개신교인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 1947년 한경직 목사의 설교 ‘기독교와 공산주의’ 중에서 

“이제 세계(世界)는 조직된 공산주의(共産主義) 악도(惡徒)의 도량(跳梁)을 막기 위하야 일어나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이오, 미 영 불 중의 동심협력(同心協力)이요, 로마 왕법(法王)의 명령(命令)이다. 이제 파괴되려는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하야 반공세력(防共勢力)이 나날이 결속(結束)되고 있다.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

- 1948년 조병옥 경무부장 시절 경찰 공보실이 발행한 책자 ‘총선거와 좌익의 몰락’ 중에서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극우개신교의 구호와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반공’과 ‘멸공’은 해방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중심 논리였다. 그것은 루소가 말한 ‘시민종교’에 가깝다. ‘시민종교’(Civil Religion)는 한 사회를 통합하고 도덕적으로 결속시킨다. 한경직과 조병옥, 두 사람은 개신교이었다. 채명신 역시 극우성향의 개신교인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은 개신교 세력이 이승만과 함께 세운 기독교국가라고 말한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울 때 저항했던 남로당 찌꺼기들하고, 북에서 날라 온 주사파 찌꺼기들이 청와대를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해체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예수교의 나라’로 세우고자 했으며 제헌의회는 목사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살인마 전두환의 만수무강을 비는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우연일까? 

채명신은 섬기는 교회를 위해서도 충성스러웠다.  5·16군사쿠데타에 주도적으로 가담해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떠올랐으며, 초기 5인 위원회 위원 중 1인이다. 철원 전방을 지키던 5사단장으로 제36보병연대와 35보병연대 일부, 그리고 직할대 병력을 빼내 서울에 입성한다. 
그는 쿠데타 성공으로 소장으로 진급했고, 곧이어 고위 장성들의 진급 코스로 꼽히던 미 육군 지휘참모대로 유학길에 오른다. 대장 진급은 못하고 1972년 5월 30일 초대 주월사령관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으며 중장으로 예편한다. 하지만 이후 외교관으로 재임용되어 국외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채명신.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채명신의 생전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의 전술은 어디에도 있고, 아무 데에도 없는 베트콩을 찾아서 헤매는 것이 아니다. 베트콩을 찾아 격파한다(seek and destroy)는 미군의 전술과 완전히 다른 전술이었다. 그를 맹호 사단장으로 선정한 것은 통수권자로서 박정희의 선택이었다. 

해방공간에서 개신교인들은 남한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했다.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4.3과 여순사건 진압 등에 나섰다. 당시 영락교회를 ‘서부사람 신앙공동체’라고 불렀으며, 한경직과 채명신은 가까운 사이였다.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한 오제도 공안검사와 제주 토벌대 출신인 채명신 장군, 이세호 장군이 영락교회에서 장로를 지낸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1926년 11월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다. 1947년 1월 38선을 넘었다. 육사 5기로 입학하여 1948년 4월 소위로 임관해 4.3사건에 투입됐고 6.25전쟁 때는 국군 최초의 유격부대인 백골병단을 이끌고 북한 깊숙이 침투하는 등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는 ‘제주4.3사건의 진상’(이선교, 현대사포럼)의 추천사에 “정부에서는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을 통과해 사건 진상 조사를 하도록 하였는데, 이 보고서가 황당하게 서술됐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찾아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였는데 폭도까지 희생자로 결정한 것은 크게 잘못됐다”고 했다. 

또 그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매일경제신문사)에서는 “남로당의 인민해방군은 주민들의 배타성을 이용,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고 썼다. 4.3의 원인을 삼일절 기념대회 당시 벌어진 경찰 발포 사건으로부터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김익렬을 “색깔이 불분명하고 미온적인 인물”, 문상길을 “좌익 사상에 물들어 김달삼 지령에 따라 연대장을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진경은 뛰어난 토벌 작전을 펼친 우수한 군인으로 치켜세우고, 무장대 진압에 앞장선 서북청년단원들도 용맹스럽다며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도 믿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그는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습니다. 4.3초기에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서 많은 주민들이 입산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민간인 보호 작전은 인도적이면서 전략적 차원의 행동입니다.” 

박진경 연대장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그의 2001년 4월 17일 증언이다.

친일 문제에 대해서도 채명신 본인도 좋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채명신의 아내 문정인의 조부는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의 거물 친일파인 문명기였다. 문명기의 손자 문태준이 채명신의 손위처남이다.

4.3진압부대 소대장 채명신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주민 3만여 명을 학살한 그 중심에 박진경 연대장이 있었다. 그 휘하부대 소대장이 바로 채명신이다. 그는 훈련 중 제주도로 보낸다는 이야길 귀가 아프게 들었다. 군번이 10826번이었는데, 400명중에 임관 성적이 26등을 했기에 제주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4.3사건 1주일 뒤 9연대 2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채명신의 6.25증언록, ‘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2007. 6. 25 참전유공자회)에 기록된  4.3사건 관련 증언은 그가 목격하고 확인한 4.3사건의 진상의 핵심이 잘 나타나 있다. 1948년 4월 육사 5기생으로 졸업, 소위로 임관되어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9연대 2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여 4.3사태를 가까이서 겪었다.

“나는 오늘부로 너희의 소대장으로 부임한 육군 소위 채명신이다.” 소대원은 모두 42명. 84개 눈동자가 살기등등했다. 그가 부임하자 어느새 “이북에서 김일성 장군을 배신하고 남하한 반동분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소위 빨갱이 한 명을 잡기 위해 백여 명의 양민을 희생시키는 것이 토벌군의 기본 전략이었을까? 수만 명의 무고한 양민을 희생시킨, 그 가해자는 누구인가? 채명신은 조선경비사관학교 졸업 후 4월 10일 9연대로 배치 받았는데, 모슬포 자대까지 가는 동안 경찰관의 사체를 보며 놀랐다. 그는 ‘separate&destroy’라는 개념으로, 일단 적을 철저히 분리한 후에 섬멸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제주4.3폭동을 진압하면서 전사한 9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비롯한 186명의 장병과 153명의 경찰관, 1673명의 우익, 그리고 14연대 반란을 진압하면서 순직한 12연대 백인기 연대장 이하 전사한 많은 장병들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지 않고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되어 이 분들께 감사와 명복을 빌며, 이 작은 책이 유가족 여러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 ‘제주4.3사건의 진상’에서 채명신의 머리말 중에서  

4.3 발발 사흘 뒤 박진경 중령으로 9연대장이 교체되었다. 그의 작전으로 불과 44일 동안 "약 3000여명이 체포되고 심사를 받았다"고 했을 정도로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체포하였다. 그는 1948년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연에 참석했다가 자정 무렵 침실에서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부하 문상길 중위가 심복 특무상사와 위생병을 시켜 연대장을 저격한 사건이었다. 심장과 두개골이 박살난 처참한 모습으로 사망했다. 문상길, 특무상사, 위생병 등 3인의 유죄가 확인되어 총살형으로 집행됐다.

“그 골육지정의 통솔법 덕분에 나는 제주에서 살아남았다. 당시에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암살을 지시한 이는 나의 직속상관 문상길 중위였고, 하수인은 양회천 일등병이었다. 영내가 온통 공산주의자들로 득실거렸던 것이다. 나 역시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었다. 첫 번째는 부대 인근의 웅덩이에서 목욕을 할 때였다. ‘탕’하는 총소리가 들리더니 총알이 겨드랑이 옆을  스쳤다. 그 즉시 반대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응사한 것이다. 소대원들이었다. 나도 몰래 뒤를 미행하며 나를 보호해 준 부하를, 전쟁터에서 부하를 살리기 위한 골육지정의 통솔법이 오히려 나를 살렸다.”

- ‘참군인 채명신 장군’ 회고록에서(경향신문 1996.6.25.)

채명신은 ‘6.25 증언록’(사단법인 6.25참전전우회 발행)에서 4.3사건을 남로당의 조직 확대와 5.10 총선거 방해를 위한 폭동으로 기술했다. 당시 군내에도 좌익이 많이 섞여 남로당은 폭력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면서 1948년 5·10 총선거를 방해했다. 그는 1948년 8월 제주9연대의 해체로 수원 11연대로 전속됐다가 개성 송악산 전투를 겪고 6.25로 참전했다.

제주9연대 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3중대 2소대장 채명신 소위. 이 둘은 기독교인이었다. 같은 부대 직속상관과 부하로 만났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4.3사건이 종결하자, 한 사람은 사형수가 되어 잊혔고 다른 이는 전쟁 영웅으로 기억됐다. 문상길은 양민 탄압을 막기 위해 암살에 나선 반면, 채명신은 진압 작전에 뛰어들었다. 

한국군은 실패하지 않았다?

“여하간 미국은 실패했더라도 한국과 한국군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많은 역사학자나 군사평론가의 공통된 견해이다. 나 또한 그 평가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베트남전을 통해 대한민국과 국군은 더 융성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을 통한 경제적 효과는 참으로 엄청났다. 아마 오늘날의 경제 대국의 모태 역할이 되었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또한, 우리 국군은 세계만방에 그 우수성을 떨쳐 세계가 인정하는 일류 군대로 도약했다.”

- 채명신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 85쪽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는 알베르 까뮈의 말이다. 오늘날 베트남에서는 채명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베트남어 위키피디아는 그를 ‘살인자(kẻ giết người)’라고 부르고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을 비롯한 대민 범죄의 주동자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65년 9월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부를 창설하면서 육군 수도사단장 채명신을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그는 3년 8개월 간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베트남에서 전투를 했다. 

미국은 왜 베트남전쟁에 개입했을까? 그리고 자신의 안보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한국은 왜 베트남으로 전투부대를 보냈을까? 미국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시작된 베트남전쟁에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거부했음에도, 왜 한국 정부는 파병을 결정했을까? 우리에게 기억되는 베트남전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1964년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처음으로 파병한 이래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32만이 넘는 한국군이 베트남으로 갔다. 그들 가운데 5000여 명은 전사했으며, 1만 명 이상은 전후에 고엽제로 고통 받았다. 그리고 죄 없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죽었다. 1964년 9월 130명의 의료봉사단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단을 시작으로, 1965년 3월 16일 비둘기부대가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다음 청룡부대가 1965년 10월 9일 깜란에, 11월 1일에는 맹호부대가 뀌년에 상륙을 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 명에 달했다. 

이중에서 육군이 30만4760명이다. 전쟁 기간 동안 약 5만 명(육군이 4만 명가량) 정도의 군대 규모를 유지했다. 한국군 전사자 및 사망자는 공식전사에 따르면 5099명이다. 이중 전사자가 4663명이며 사망자 외에 1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주월한국군의 전사율은 참전한 총병력의 1.4%에 해당되며 미군의 경우에는 전사율은 2.3%에 달했다. 16만여 명이 고엽제 피해를 입었다. 1973년 3월 완전 철군 때까지의 7년여에 걸친 베트남전쟁 참전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트남전쟁 파병은 최초이자 최대의 해외 파병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한국의 경제 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쟁 특수에 가려 파병 전사들과 민간인 학살 문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또 베트남 참전 병사들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참전 병사들은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가해자였지만, 한편으로 전후에 고엽제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시달려야 했던 전쟁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참전 군인들은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자로 보상받지도 못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베트남 곳곳에 세워진 한국인 증오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한국군 증오비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 제국주의와 남한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베트남 꽝응아이성의 ‘한국군 증오비’의 끝 부분이다. 

베트남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다. 50~60개가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966년 12월 베트남 중부 빈 호아 마을에서는 430명이 죽었다. 이 중 268명이 여성이고, 182명이 어린이다. 여성 중 7명은 임산부였다. 누군가는 강간당한 후 목이 잘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강간당한 후 배가 갈라져 죽었다. 가족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 몰살의 기록은 모두 ‘증오비’에 쓰여 있다. 

“아가야 아가야, 너는 기억하거라. 한국군이 우리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마을 초입에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쓴 낡은 ‘증오비’가 서있다. 

꽝응아이성에는 한국군의 만행을 기록한 비문이 여러 개 있다. 퐁니·퐁넛 학살 사건(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1968년 2월 12일 그곳 주민들이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명이 죽은 전쟁범죄이다. 

해병대 청룡부대는 1968년 1월 하미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학살이 일어난 날 아침, 한국군은 난데없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죽었고, 불태워졌고, 배가 갈렸다. 한국군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탱크나 불도저를 끌고 와서 현장을 깔아뭉개서 시체의 형체를 알 수 없도록 했다. 학살 지역에 세워진 증오 비에는 유독 이런 문구가 많다. “하늘을 찌를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  

베트남에 '따이한(大韓, 한국)제사'라는 것이 있다. 이름도 생소한 이 제사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을 위한 제사다. 베트남 인민들의 따이한 제사는 그래서 마을별로, 지역별로 한날한시에 열린다. 죽은 날이 같으니 온 동네가 집집마다 동시다발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집은 제사를 지낼 수도 없다.   

한국사회는 이를 은폐하는 쪽에 가까웠다.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전쟁특수’를 누린 사건 수준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등에 공식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나서서 비용과 노력을 들여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가해 주체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베트남 아이들은 지금도 이렇게 외친다. “싫어요, 한국 사람이잖아요.” 그 베트남 전쟁 중심에 바로 채명신이 있다. 미제국의 패권전쟁에 꼭두각시가 되었던 월남파병, 빈딩성에는 15개의 위령비가 있다. 그 중 380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고자이 마을은 학살의 한 지점일 뿐이다. / 김관후 시인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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