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39) 이성지 어르신 이야기 ②

역사의 산 증인으로 해병대에 복무 하셨던 이성지 어르신은 26살에 전역을 하시고 제주로 돌아왔다. 

어르신이 해병대를 지원하시게 된 동기는 당시 처절했던 제주의 상황(제주 4.3) 때문이었다. 어르신은 이렇게 살다 죽으나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으나 어차피 죽는다면, 나라를 위해 용맹히 싸우다 죽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어르신에게 그 시절 그 시대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우울함, 슬픔은 오히려 고된 훈련을 이겨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르신은 훈련기간을 거치며 나를 있게 해 준 나라를 위한 애국심, 훗날 우리 자손들의 터전인 대한민국을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용맹함으로 무장한 해병대가 되었다. 그렇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조국과 우리 부모, 가족을 지켜내셨다. 군복무 중 같은 고향에 사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이성지 어르신의 조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후손들에게 물려 줄 대한민국, 제주도는 그 시절 젊은 이성지와 청년들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전역 후 고향이었던 무릉으로 돌아온 어르신은 모슬포에 있는 대정읍사무소에서 근무하셨다고 한다. 조국을 위해 싸우고 돌아온 직후여서 그랬을까? 3년 정도 근무를 하면서 제주에 대한 애향심은 점점 더 깊어졌다고 한다. 옷은 군복에서 와이셔츠 바뀌었고 손에는 총 대신 종이가 들려 있지만 내가 사는 곳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워낙 대한민국 곳곳을 누비며 뜨거웠던 20대를 보내서였을까? 금방 작은 마을이었던 제주도가 좁게 느껴졌다. 근무하는 시간 외에는 수레를 끌며 밭도 갈고 농사도 지었어야 했다. 지금에야 농업기술이 발달해서 기계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어르신이 젊었을 당시에는 농사를 지을때 지금과 달리 몇 곱절의 힘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제주도의 자연 특성상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여서 더욱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망망대해 바다를 누비던 이성지 어르신은 좀 더 넓은 세상에 가서 다양한 일을 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객지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객지에 나가서 다양한 경험을 해 보았다. 사업도 해보고 고된 일도 해 보았다. 타지생활은 외롭고 힘들었지만 세상경험을 해 본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전국을 누볐다. 게다가 제주도에는 아내와 2남2녀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어르신의 30대와 40대는 객지에서 가족들을 위해 살아가는 이야기로 채워졌다.

외롭고 힘든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1984년, 어르신은 다시 무릉2리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소(도정공장 방앗간) 공장을 차린다. 주로 보리나 쌀 같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도정(搗精) 방앗간이었다. 이성지 어르신이 방앗간을 차린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르신이 젊었던 시절 가장 많이 농사지었던 작물이 보리였기 때문이다. 보리는 손으로 훑어 내 알곡을 얻는다. 맨 손에 보리를 한 두시간 만 훑어도 상처가 나고 배이기 일쑤였다. 그 당시 제주사람들은 다 그렇게 기계의 도움없이 농사를 지어 보리쌀을 얻었다. 물론 쌀을 얻는 기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모슬포에는 두 개의 큰 방앗간이 있었다. 이성지 어르신의 친구도 모슬포에서 방앗간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들어보니 생각보다 방앗간을 차리는 것에 돈도 많이 들어간다고 했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작업을 기계가 편리하게 해 주기 때문에 무릉리 시람들은 수확한 보리를 이고 지고 모슬포읍내까지 가서 쌀을 얻었다. 이동하는 데만 몇 시간씩 걸리지만 그 시간을 내어 주더라도 기계가 빻는 쌀은 훨씬 빨랐고 편리했다. 마을사람들이 무거운 보리를 들고 다니는 것을 지켜본 어르신은 내가 마을에서 방앗간을 하면 나도 물론 좋겠지만 마을사람들에게도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되어 편리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무릉리에서 가장 오래 된 방앗간, 아니 어쩌면 제주의 방앗간 중에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곳인 “산남도정공장(山南搗精工場)”이 지금의 자리에 생겨났다. 그리고 같은 이름으로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박물관 같은 곳이 되었다.

제주의 정미소 중에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정미소인 “산남도정공장(山南搗精工場)”의 간판. ⓒ김진경
제주의 방앗간(정미소) 중에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곳인 “산남도정공장(山南搗精工場)”의 간판. ⓒ김진경

내가 찾아간 그 날의 방앗간에서는 구수한 메밀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현재 주로 도정하는 곡물은 메밀과 보리라고 하셨다. 운이 좋게도 갓 보릿가루를 내리고 남은 보릿겨 가루들을 볼 수 있었다.

“어르신 이 내려진 가루는 먹을 수 있어요?”

“아이고 지금은 못 먹지. 그건 두불 째 한 거라 먹는 사람 없어”

지금은 참새들이나 좀 쪼아먹고 마는 그 보릿가루를 어르신은 ‘먹을 수 없는 가루’라하셨지만 제주의 옛 어르신들은 이 마지막 겨를 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 가루를 가져다가 간식으로 많이 먹고 돌레떡도 많이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현재는 종종 마사지를 하기 위해서 얻어가는 어르신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먹을 것이 풍부해지면서 이 가루는 오랫동안 방앗간을 찾고 있는 방앗간 참새들의 몫이 되었다.

어르신의 방앗간에는 여러 번 내린 순메밀가루는 물론, 거친 속껍질까지 섞여있는 메밀가루(우리가 아마도 느쟁이, 혹은 는쟁이라고 부르는 가루인 것 같았다), 그리고 메밀껍질까지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약 40년간 달려온 오래된 기계는 여전히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성지 어르신은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현역’인 이 기계의 전원을 켜서 보여주셨다.

약 40년간 달려온 오래된 기계로 보릿가루를 내리는 모습. ⓒ김진경
약 40년간 달려온 오래된 기계로 보릿가루를 내리는 모습. ⓒ김진경

팔월멩질이 지나면 마을 어른들은 보리를 이고 방앗간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곧 여름이 오면 줄기차게 만들어 먹을 쉰다리를 만들기 위해서, 바람이 차고 쌀쌀해지면 빚을 오메기술이나 고소리술을 빚기 위해서 필요한 누룩은 이성지 어르신의 방앗간에서 시작되었다. 어르신이 보리를 거칠게 갈아주면 어르신들은 그 보릿가루를 집으로 가져가 누룩을 빚는다. 미지근한 물을 부어 반죽한 후 두 손으로 꼭꼭 쥐거나 누룩틀에 넣고 꾹꾹 눌러주면 제주사람들의 누룩이 만들어진다. 

“요즘은 된장하려고 이 누룩을 많이 사러 와”

이성지 어르신 옆에 계시던 아내 분께서 이야기를 보태셨다.

“된장을 누룩으로 만들어요?”
“그럼 나도 누룩으로 장을 만드는데 한번 먹어볼텨?”

ⓒ제주의소리
이성지 어르신께서 메주가 아닌 누룩을 이요해 만드셨다는 된장. ⓒ김진경

어르신의 냉장고에서 메주가 아닌 누룩을 이용해 만드셨다는 된장을 꺼내 맛보았다. 생각보다 텁텁하지 않고 구수한 장냄새가 입안에 가득 퍼졌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콩 삶아서 누룩 넣고 잘 으깨고 3개월 정도 잘 두면 메주 튼내가 안나는 된장이 만들어 져. 콩 한말, 누룩 1되, 간수를 잘 뺀 소금 2되, 콩 삶은 물로 만든 우리집 된장 어때. 맛있어?”

“네 정말 맛있어요.”

나는 이성지 어르신 아내 분께서 만드는 된장이 궁금해졌다. 물론, 누룩 된장은 어르신 댁에서만 만드는 장이 아니다. 제주의 마을을 다니다보면 제주의 몇몇 집에서 누룩으로 된장을 담근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어르신 댁에서 메주 특유의 군내가 나지 않는 어르신 댁의 누룩된장을 함께 만들어 보기로 정다운 약속을 나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어르신의 방앗간에서는 나룩(논벼)도 작업했었다고 한다. 
그때는 주로 메밀, 조, 보리가 주곡이었고 논벼가 잠깐 생산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산남지역 사람들에게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는데 “일강정, 이수원, 삼도원”이라는 말이 있다. 제주에서 나룩은 강정이 으뜸이었고 그 다음은 수원리, 다음은 도원, 즉 무릉리가 속해 있는 이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어르신의 방앗간에서 주곡을 먹을 쌀을 갈기도, 술과 된장을 하기 위한 누룩을 만들 보릿가루를 내기도했다. 방앗간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점점 신식으로 변화하지만 이성지 어르신은 아직도 방앗간을 찾는 단골들 때문에 문을 닫지 못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여는 방앗간은 아니다. 방앗간을 매일 드나드는 건 무릉2리에 사는 참새들 뿐. 
하지만 동네어르신들은 물론 멀리사는 오랜 단골들이 쌀을 갈러 온다고 하면 꼭 문을 열어 두신다. 아직도 집에서 누룩을 만드는 어르신들과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방앗간에서 메밀가루를 사 먹었던 단골들은 여전히 제주에 우리와 같이 숨을 쉬며 살아가고 계시다. 

어르신께 90세가 넘으신 지금까지 왜 여전히 방앗간을 운영하시는 지 여쭈어보았다.

“젊었을 때 타지에 살면서 보고 경험한 것들로 사업을 많이 해 봤어. 한창 아이들 클 때 사기도 크게 당하고 좌절했었을 때가 있었지. 하지만 그 때 옆에 있는 집사람이 우리 아직 젊으니까 망해도 이겨낼 수 있다. 용기내고 재기할 수 있으니 같이 노력하자고 했어.”

이제 힘들어서 그만하신다던 방앗간(정미소)에는 여전히 머리 하얀 단골들이 찾아옵니다. 어쩐지 무릉리 참새들도 단골일 것 같았던 그곳 /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어르신의 인생에서 65년 가까이 동반자로 살아온 아내와 함께한 이 방앗간은 벌써 올해 39살을 맞이하고 있다. 어르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20대부터 타지에서 힘들게 고생했던 30대와 40대를 지나 50대부터 지금까지는 운영하는 산남도정공장은 사랑하는 아내분과 함께 만들어 간 이야기이자 두 분의 역사의 산증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했다. 여기에다 40년 가까이 된 단골들이 늘 찾아 오기 때문에 문을 닫을 수 없다고 했다. 점점 오는 사람도 줄고 더더욱 뜸해지겠지만 다시 제주에 와서 일궈놓은 이 방앗간은 이성지 할아버지의 청춘과 고향에 대한 애정, 부인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녹아든 곳임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 산남도정공장은 내게 그 어떤 아름다운 장소보다 더더욱 감동스러운 공간으로 다가왔다.

40여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 듯 오래된 기계들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 줄 것 같은 정겨운 방앗간. 그 방앗간을 제 집 드나들며 다니는 참새단골들은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 같다.

이성지 어르신 부부가 이 방앗간을 운영하는 이유를.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