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7) 귀양풀이, 사십구재 끝나고, 아버지께 편지 올립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글

아버지 보십시오.

작년(2021년) 12월22일 수요일 동짓날이었습니다. 오후 2시가 넘어 여느 때처럼 수업을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날따라 한 아이가 늦게 와서 막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계신 요양병원 간호사선생님의 전화였습니다. 2시7분이었습니다. 

“아드님 어디 계세요? 빨리 병원으로 오세요. 어르신 위독하세요.”

5일전, 폐렴 증상이 다시 도졌다는 얘기를 듣고, 그 후 아침, 저녁으로 전화로 당신 증세를 체크했었고, 22일 날 아침에는 상태가 나아졌다고 담당 과장님께 전해 들어 안도하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수업 못 한다 하고, 다음 학원에 미리 가라고 일러주고, 후다닥 나섰습니다. 그 와중에도 운전하면서 학부님들에게는 사정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슴은 계속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월요일 새벽에 꾸었던 꿈의 예감이 맞지 않기를 바랐는데, 요양병원 전화번호를 보는 순간 이미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한라초 인근 신시가지에서, 애조로에 접어든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요양병원에서는 위독하다는 한 마디 말만 들었을 뿐인데, 이미 당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한 것처럼 운전하는 차 안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아버지! 지금 생각하면 당신 가던 그 날 그 애조로의 길을 어떻게 운전하고 갔는지 기억이 가물합니다. 전화 받은 것도, 학원을 나와서 차를 타고 시동을 건 것도 다 아득합니다. 애조로 4차선 도로를 다른 운전자 하나 없이 오롯이 나 혼자만 운전하고 달린 것 같습니다. 아버지 당신을 부르며 소리 내어 울었던 것만 또렷합니다. 

월요일 새벽, 꿈을 꾸고 당신 한복을 서둘렀습니다.

예감이었을까요? 12월20일 월요일, 새벽에 잠을 깨고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설핏 꿈결인지, 환영인지 효돈 신효마을, 우리 집이 보였습니다. 예전 우리 집 올레에 들어서는데 장막이 펼쳐졌고 사람들이 와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눈이 떠졌습니다. 방금 전 꿈의 광경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이 예감이 아무런 징후 없이 지나가길 바랐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각시에게 동문시장 포목점에 맡겨둔 당신의 한복을 서두르자고 얘기해 놓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요양병원으로 가시고 난 뒤, 아주 아주 멋 훗날이기를 바라며, 당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궤짝 속에 있던 명주로 된 수의를 꺼내서 다림질을 하고, 부족한 것 채워놓고, 포목점 사장님이 이승에서 마지막 한복을 입혀 드리는 게 좋다 해서, 당신 수의 치수에 맞춰 준비해 달라 했습니다. 화려한 색을 좋아하는 평소 당신 취향대로 복사꽃을 연상하는 불그스레한 저고리에, 보목리 앞바다를 닮은 연푸른 바지를 아들과 며느리가 직접 골랐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기력이 짱짱하셔서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정성껏 잘 만들어주세요.” 

그렇게 일러놓고 포목점을 나왔습니다. 당신 가시기 불과 2주전에요. 그러고 보면 다 거짓말입니다. 수의, 한복 미리 만들어 놓으면 부모님 오래 산다는 말... 다 거짓말입니다.

그날 그렇게 오후 2시7분에 전화받고, 2시24분에 병실에 도착했습니다. 아들이 당신 손을 잡은 지 바로 2분 만에 2시26분에, 당신은 가셨습니다. 수의 입기 전 아들, 이승에서의 마지막 옷, 아들, 며느리가 장만한 그 한복은 참 고왔습니다. 

귀양풀이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돈내코 선영에 당신을 묻고, 신효집에 돌아왔습니다. 당신을 묻고 귀양풀이를 신효집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병원에 들어가시고 난 후 이따금씩 들르기도 했지만 마당 한 켠에는 잡풀이 무성했습니다. 당신 재미로, 제가 만들어준 닭장은 이미 텅 비어 있고, 쓸쓸함만 가득했습니다. 

ⓒ강충민
제가 만들어드렸던 닭장이, 아버지가 병원에 가시고 잡풀만 무성해졌습니다. 이것도 이제 다 깨끗하게 치워야겠습니다. ⓒ강충민

아버지 기억나시죠? 제가 아버지 먹이도 주고, 계란도 하나씩 꺼내서 드시라고 닭장 만들어, 암탉 다섯 마리. 수탉 한 마리 넣어둔 것 말이지요. 그때 닭 우는 소리 들으면 좋겠다고 해서 닭장 만드는 걸 옆에서 지켜보시며 환하게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닭이 새벽에 울었다고 전화하고, 처음으로 알 낳았다고 큰 일 난 것처럼. 전화하고, 먹이 주는 것도 재미있다 했습니다. 차츰 그것마저도 버겁다고 하셨을 때 또 어떤 것이 아버지를 재미나게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쓰러지고 마셨던 거죠.

ⓒ강충민
귀양풀이, 신을 부르는 초감제부터 시작하고 아버지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강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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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풀이, 신을 부르는 초감제부터 시작하고 아버지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강충민
ⓒ강충민
귀양풀이, 신을 부르는 초감제부터 시작하고 아버지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강충민

아버지는 귀양풀이에서 미처 못 다한 당신의 얘기를 했습니다. 심방의 몸을 빌려, 심방의 음성으로 당신의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충민이, 나 저승 갈 때, 막 달려왕 이 아방 손잡아주난 막 모심 놓앙 감져, 너 오는 거 보잰, 마지막 마지막 힘을 내엉 너 기다렸져. 우리 충민이 고생했져, 고맙다. 고맙다. 막 고맙다.” 

지금도 그때 아버지가 심방을 통해 한 얘기를 다시 생각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때도 생전에 며느리에게 한 말 그대로 “고맙다, 고맙다” 하셨습니다. 저도 며느리도 또 생전처럼 “아니우다, 아니우다” 했습니다.  

49재 마치고 아버지 보내드렸습니다.

제 기억에 아버지는 생전에 절에 거의 안 갔습니다. 그래도 아들, 며느리가 부처님오신날 당신 촛불을 켰다 하면 좋아하셨지요. 그래서 아버지를 며느리 다니는 관음사에 49재 모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49재는 7일에 한 번 재를 올려, 총 7번인데, 아버지는 관음사에 3번 오셨지요. 사실은 7번을 재를 지내는 게 시간이 나질 않아 3번만 하기로 했습니다. 초재, 5재, 막재... 그런데 인천 사는 선이가 나머지 네 번은 자기가 다니는 인천 절에서 지내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아버지를 정신없이 인천 갔다가. 다시 제주도 돌아오느라 정신없게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그 덕분에 시원한 바닷바람 쐬이고. 인천 계양산 자락도 구경하고 좋았겠지요. 

ⓒ강충민
49재 아침에는 한라산 관음사에 많은 눈이 쌓였습니다. ⓒ강충민

아버지, 49재 회향하는 날 아버지도 보셨지요. 새벽에는 눈이 많이 쌓여, 온통 하얗게 뒤덮였었는데 아버지 가시는 시간에, 봄날처럼 햇빛이 따사롭게 비치던 모습을요. 

아버지가 귀양풀이 때 심방을 통해 얘기하신 지갑도 새로 사서 보내드린 것 잘 받으셨지요. 가시는 길에 새로 산 지갑을 제가 잘 태워드려 보냈습니다. 

ⓒ강충민
한라산 관음사에서 아버지 49재 막재를 드리고 탈상을 했습니다. ⓒ강충민

아! 그날 참 날이 좋았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눈물 훌쩍이다가 눈이 부시게 빛나는 햇살에 환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 우리 아버지 잘 가시는구나.’

유품 태워 보내면서, 아버지 주민등록증은 제가 차마 태우지 못했습니다. 휴대폰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거 두 개는 제가 아버지 생각날 때, 가끔 꺼내 보려고 합니다. 매일매일 아버지를 부르면 그때마다 아들에게 오는 것도 귀찮아 할 것 같아 제가 그거 두 개만 꺼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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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유품을 태워 보내드렸습니다. 49재를 마치고, 밖에는 참 날이 좋았습니다. ⓒ강충민

아버지! 이제 49재로 탈상하고 아버지를 보내드립니다. 49재가 2월8일이었으니 아버지는 지금쯤 편안한 곳 어디쯤에서 한참을 쉬고 계시겠지요. 아버지를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자주 제 꿈에서 아버지를 보는 것도 좋습니다. 살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와주시니 제가 좋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와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서 서로의 무의식의 공간에서 같이 만나고 있는 것 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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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진을 거실에 같이 놓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오며가며 말을 전합니다. ⓒ강충민

아버지! 30년 전, 제가 군대 자대 배치 받은 다음,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라고 해서 잘 있다고 편지를 보냈었지요. 그 편지에 아버지는 또 특급등기우편으로 제게 답장을 보냈지요. 저는 아버지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첫 휴가 때 아버지는 제게 답장 안 했다고 책망했습니다. 그 후로 가끔씩 그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제 30년 만에 오롯이 아버지께 답장 보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 아버지가 듣고 싶은 말 전합니다.

아들은 잘 있습니다. 

2022년 2월 23일

아들 올림

※ 덧붙이며

아버지에 대한 편지는 제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까지 썼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같이 공감해주신 많은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 편지는 중문에 있는 제주롯데호텔에 근무하는 제 친구 서창범군이 받습니다.

# 강충민 시민기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글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사회 보는 걸 좋아합니다.
제주의소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좋아하는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은 한라초등학교 인근에서 독서논술교실을 하며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강충민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강충민시민기자 블로그 가기 ⇒ http://blog.naver.com/som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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