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 개교 70주년]② 국립 제주대 용담캠퍼스서 꽃 피워...11대 총장 김일환 임용후보자 ‘구 본관 복원’ 핵심공약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과 6.25 한국전쟁의 참혹한 환경에서도 인재양성에 진심을 다한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국립제주대학교가 2022년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고희(古稀)의 나이를 맞은 제주대의 역사는 교육사이든 지역사이든 사회적으로 조명하고 평가해야 할 유의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제주의소리]는 진리와 정의, 창조라는 창학이념 아래 숱한 지식인과 인재들을 배출하며 제주 현대사의 한 축을 맡아 지역과 호흡해온 국립 제주대학교 70년 영욕의 역사를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제주도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녹아든 끝에 도립 제주대학은 1962년 3월 드디어 국립으로 승격 이관, 새로운 용담캠퍼스 시대를 열게 됐다. 당시 국립 승격 이관과 더불어 제주대는 한국 건축계의 거장 故 김중업 선생이 혼을 담아 제주대 본관 건물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사진은 故 김중업 선생의 대표 역작으로 꼽히는 제주대학교 용담캠퍼스의 구본관으로 제주사대부고 개교 이후 한동안 사용돼오다 1995년 철거가 결정돼 이듬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대학은 오래 전부터 학문의 상아탑(象牙塔)이라고 불렸다. 진리를 탐구하고 학문에 정진한다는 관념적 의미에서 붙여진 말이다. 학문에 매진하는 환경적 이유였을까? 세계적 대학들은 학문적 성과만큼이나 캠퍼스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축물을 자랑하는 대학들이 많다. 

세계적 건축물로 대학 건물이 꼽히는 경우는 차고 넘친다. 지적인 고풍스러움을 대표하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는 대학과 연계돼 세월을 품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도시 곳곳에서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일대학교의 바이네케 고문서도서관' '하버드의 메모리얼 홀' '베이징대의 보야탑(博雅塔)' 등도 모두 유명한 대학 건축물들이다. '서울대의 정문'도 그런 곳 중 하나다.

대학은 각 도시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기에 이러한 대학 건물에는 역사와 전통, 철학적 상징성이 깃들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학교를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교 70주년을 맞은 국립 제주대학교의 상징적 건축물은 무엇이 있을까?

  현대 건축 거장 故 김중업 선생이 제주에 남긴 역작 

건축에 한국적 곡선을 표현하는데 일생을 바친 故 김중업(1922~1988) 선생.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이자 현대 건축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김중업 선생은 국내에 현대 건축을 알렸고 현대건축을 통해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찾아 길을 나섰던 사람이다. 프랑스대사관, 심일빌딩, 평화의문 등은 모두 그가 남긴 역작이다. 그가 건축가들에게 한국 현대 건축의 미명을 밝힌 등불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역작 중 역작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용담캠퍼스 시대의 국립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이다.  

그는 도민 염원이 담긴 ‘국립’ 제주대학의 탄생(1962년 3월) 시기에 '제주대학교 본관'이라는 대한민국 건축사의 한 획을 긋는 크나큰 역작을 제주에 남겼다. 21세기형 건축으로 꼽히며 일찍부터 해외에 더 알려졌던 이 건물은 아쉽게도 노후화되었다는 이유로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1995년 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철거가 진행된 것이다. 

한국 현대건축사의 큰 축을 이루었던 김중업이 설계한 구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은 '르 꼬르뷔제'의 근대건축 5원칙을 적절하게 혼합시킨 건축 교과서와도 같은 건축물로 평가된다.지금의 구조 실력으로는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건축물이었지만, 국립 제주대학교의 상징이었던 이 건물은 1964년 착공해 1969년에야 준공됐다. 연건평 1900㎡, 4층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불과 30년도 지나지않은 1995년 10월에 허망하게도 철거됐다. 

1984년 제주대학교 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가 구 제주대 용담캠퍼스에서 개교하면서 이 건물은 도서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불과 30년도 사용하지 않은 이 건물은 '노후화'라는 이유로 철거 논란이 일었고, 제주대는 철거냐 보존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대한건축학회에 용역을 의뢰한다.

1995년 1월에 나온 용역보고서를 보면 “바닥과 1, 2층을 보강하면 현상유지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보고서는 “(유지하더라도) 기술적으로 어렵고, 공사비가 많이 든다”고 의견을 제시하자, 당시 제주대학은 비용 문제 등에 난색을 표명하면서 철거를 결정했고 이듬해인 1996년 완전히 해체됐다. 

아쉽지만 사라진 걸 어찌하겠는가. 다만 수백년씩 대학 건물을 보전해오고 있는 세계적 대학들과 비교할때 구 제주대 본관 건물의 철거 결정과정이 너무 가벼웠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고, 당시 결재권자들의 건물 보전 의지와 단순히 콘크리트 덩어리로만 본 것은 아닌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김중업 선생의 혼이 실린 구 제주대 본관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경기도 안양시에 (주)유유산업 공장을 리모델링한 김중업건축박물관이 있고 여기에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故 김중업 선생을 기리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인 구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의 설계도와 관련 자료도 남아있다.    

철거도 대학이 결정한 만큼, 복원도 대학이 결정할 수 있다. 다양한 이유로 소실된 건물이 역사적 사회적 가치가 충분하다면 복원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개교 70년을 맞아 제주대학교의 상징이었던 고 김중업 건축물 복원 논의의 시작을 기대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1962년 국립대학 승격으로 용담캠퍼스 시대 막 올려 

1955년 4월 도립 제주대학 승격 이후 제주대학교는 1960년대에 들어와 간절한 도민 염원과 각계각층의 노력이 반영돼 1962년 3월 드디어 국립대학 승격이라는 결실을 거둔다. 국립대학 승격과 함께 제주대학교 용담캠퍼스 시대의 막을 올리기도 했다. 

대학의 국립 이관은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이후 故 김영관 전 제주도지사가 부임하면서 본격 추진됐다. 국립 이관을 염원하는 도민 의견을 접한 김영관 전 지사는 문종철 제주대 학장과 함께 발 벗고 나섰다. 

군사정부 역시 지방대학의 합리적 육성을 방침으로 내걸었던 시기였고, 김영관 전 지사는 도민 교육열이 높지만 육지부 대학 유학이 불가능한 점, 재정이 빈약해 국가재정 운영이 필요한 점, 축산-수산-특용작물 연구 실업대학 개편 필요성 등 내용을 골자로 한 건의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제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조사 끝에 만장일치로 제주대 국립 이관을 통과시켰다.

당시 제주대는 국립 이관을 위해 시설 확충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부지확보 문제가 따르자 이농학부를 서귀포시로 이전하기도 했다. 대학과 제주도가 부지확보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도민들이 토지를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산남으로의 이전이 가능했다.

  서귀포 주민들 염원으로 1964년 제주대 이농학부 산남 이전

제주대에 따르면 서귀읍 동홍리 일대 7만여 평을 이농학부 이전후보지로 선정한 뒤 서귀읍 주민들은 약 2만450평, 당시 가격으로 998만 1050환에 이르는 토지를 기꺼이 내어놓았다.

여기에 정부예산에 시설비가 반영되면서 1963년 6월 공사가 시작됐고 김중업 선생이 설계하고 동방공영사가 시공을 맡아 이듬해 1월 준공됐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64년 서귀포캠퍼스 이농학부 본관 전경.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67~1968년 서귀포캠퍼스 이농학부 캠퍼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서귀포캠퍼스는 2층 규모 본관을 빼고는 단층으로 지어졌으나 전원적인 특색을 갖췄고 본관의 경우 제주석을 사용해 건축물 전체가 중후한 느낌을 갖는다는 평이 따랐다. 현재 서귀포캠퍼스 수산학부 본관은 서귀중앙여중이 활용하고 있다. 

이농학부 시설공사가 끝나자 1964년 2월 제주대는 이농학부를 본격 이전, 농가정과를 제외한 이농학부 강의를 모두 서귀포에서 실시했다. 건물 747평과 대지 2만여 평, 체육장 5000평, 농장 5만여 평 등 규모 있게 지어졌다.

이처럼 서귀포캠퍼스 건축 설계를 맡은 김중업 선생은 제주대를 상징하는 본관을 짓기도 했다. 제주대 용담캠퍼스 본관으로 사용됐던 건축물은 당시나 지금이나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창의적인 건축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농학부가 이전한 제주대는 강의실과 연구실이 열악한 법문학부와 가정학과만이 남은 상태에서 용담캠퍼스 신관 건축을 계획, 당시 학장인 문종철 선생은 친분이 있던 김중업 선생을 불러들여 본관 설계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건축가 김중업. (인용=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열화당,1984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건축가 김중업. (인용=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열화당,1984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김중업 선생의 자서전 격인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열화당, 1984)’에는 문종철 학장과의 만남을 회고하는 글도 담겼다. 짧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를 아껴 주셨던 독법학자인 문종철 선생이 제주도에 제주대 본관 설계를 위해 불러 주셨다. 한라산 줄기를 타고 제주 앞 바다에 이르는 용두암, 그 옆에 이상에 불타는 젊은 학도들을 위해 전당을 꾸며 보자는 이야기였다. 건축이란 클라이언트와 건축가가 동심일체될 때 비로소 쾌심의 작품이 탄생된다.”

단순한 건축주와 건축가의 만남이 아닌 존중과 이해를 통해 제주도의 미래, 도민 염원을 그대로 담아낸 두 사람의 노력 끝에 한국 건축사에 남는 역사적인 건축 작품은 탄생할 수 있었다.

김중업 선생은 구 제주대 본관을 설계하며 프랑스 르 꼬르뷔제의 규칙과 방법을 적용, 지역적인 조건을 배려한 공간성과 장소성을 버무려냈다. 

ⓒ제주의소리
바다에 떠있는 대형 선박의 외형이나 미래도시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디자인의 건축물인 제주대학교 구 본관(용담캠퍼스) 건물.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거장 故 김중업 선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이 건물은 연건평 1900㎡, 4층 건물로 지어졌는데 제주대가 국립대학으로 승격된 첫 해에 이뤄진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이었다. 구 본관 정면(윗 사진)과 후면(가운데 사진) 모습이다. 정면 후면 측면의 경사로는 기하학적인 곡선으로 표현되면서 바다가 가지는 생명력과 제주도의 역동적 이미지와 부합돼 현대 건축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제주의소리

 

김태일 제주대 교수(건축학과)는 [제주의소리]에 기고한 ‘제주 근대건축 산책’에서 “김중업의 건축물 제주대학 구본관은 철저하게 르 꼬르뷔제의 규칙과 방법이 적용되면서도 바다에 인접한 지역적인 조건이 배려된 공간성과 장소성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교수 연구실로 사용된 3층 부분의 매스는 날아갈 듯한 항공기의 이미지거나 두둥실 떠있는 듯한 선박의 형상을 나타냈다. 당시 구본관 부지는 바다에 가까운 들판이었고, 이에 바다와 잘 어우러진 크루즈를 보는 듯했다는 평가도 존재했다.

기능적인 측면과 구조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곡선의 형태가 많은 건축물의 완공 그 자체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후 제주대 사대부고가 들어선 뒤 수년간 사용해오다 건축물 균열이 심화되면서 건물 출입을 통제하는 등 구조적 문제도 제기됐다. 김중업 건축연구소 현장답사와 대한건축가협회 세미나를 거쳐 역사성과 상징성을 들어 보존하자는 운동도 전개됐으나 제주대학교 측이 보수비용 등의 문제를 고심하다 난색을 표하며 끝내 철거됐다.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커다란 선박과 같았던 제주대 구본관은 비용과 용도 문제로 되살아나지 못하고 1995년 철거 결정이 내려져 같은 해 10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난해 총장 선거 과정서 '김중업 건축물' 복원 약속도

일각에서는 앞으로 짓게 될 제주대 신축 건축물에 김중업 선생의 역작을 녹여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치러진 제11대 제주대 총장선거 과정에서 최종 1순위 후보자로 선출된 김일환 총장 후보자는 '구 제주대 본관 건축물 복원'을 대학 구성원에 대표공약으로 주요하게 제시하기도 했다. 

김중업건축박물관에서는 그가 남긴 역작이 전시, 그중 제주대학 본관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남겨져 있다. 온라인박물관 전시(embed.360vrmuseum.com/showcase/9PtuJudKALG)를 통해 살펴볼 수도 있다. 

박물관에는 제주대학 본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제주대학은 프랑스대사관과 함께 김중업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건축이다. 특히 세계성과 국제성을 꿈꾸는 이상적 희망을 상징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바닷가에 위치한 지형조건은 건물의 철골부식과 이에 따른 구조적 문제를 발생시켜 1996년 철거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김중업 선생은 “비행기 같기도 하고 호화 유람선을 닮았다는 평을 받는 제주대학 본관 건축은 젊은이들에게 꿈과 이상을 심어 주려고 애써 빚은 작품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21세기 건축이라는 평도 듣는다. 소중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쇠락해 가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중업건축박물관에 전시 중인 제주대학 본관 모형. 사진=김중업건축박물관 온라인전시 갈무리.
김중업건축박물관에 전시 중인 제주대학 본관 모형. 사진=김중업건축박물관 온라인전시 갈무리.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제주대 구본관 평면도.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제주대학생들 4.19혁명, 4.3진상규명 등 민주화운동 적극 참여 

이밖에도 제주대 국립 이관에 따른 대변혁 시기 학생들은 한국사회 민주화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며 한반도 최남단의 자존을 지켜나가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학생들은 시위대를 편성, 그해 4월 26일 시내를 행진하며 “부정선거 원흉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대학 당국에서 교수들을 동원해 집회를 하지 말라고 회유했으나 법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뭉친 학생들은 제주도지사와 총무국장, 경찰국장, 제주시장 등 자유당계 인사들에게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시위 과정에서 ‘4월혁명 과업완수 제주대학 투쟁위원회’를 결성키도 한 학생들은 5월 1일 관덕정 광장에서 4.19혁명으로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합동위령제를 개최했다. 이 같은 바람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 요구로도 이어져 학장이 사퇴하기도 했다.

4.19혁명의 여파가 지나간 이후 제주대 학생들은 4.3의 진실에 접근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1960년 5월 7명의 학생은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 진상조사 작업에 나섰다. 

이들의 활동은 당시 ‘특공대 참살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한 모슬포 유가족 집회, 국회 차원의 4.3진상조사 작업, 제주신보의 ‘4.3사건 및 6.25 당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 접수 등과 궤를 같이했다. 

4.3의 진실을 찾고자 한 학생들의 노력은 얼마 가지 못해 좌절됐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독재 정권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탄압하고 나선 것. 주도자로 찍힌 법학과 일부 학생은 정변 이튿날 구속됐고, 6개월 가까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3년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 정권을 비판하며 대일본 저자세 외교를 규탄하기도 했다. 1965년 정식으로 한일협정이 조인된 이후에도 학생들은 대강당에서 3일간 단식농성에 들어가는 등 적극적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라산 자락의 제주대학교에서도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67년 6.8부정선거 제주대생 규탄투쟁.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 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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