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63) 느린 소 울타리 넘는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뜬 쇠 : 느린 소
* 울 : 울타리

소는 우직한 데다 굼뜨고 미련해 보이는 가축이다. 꾸물럭꾸물럭 어기적거린다. 저를 매어 놓은 외양간에 불이 났으면 모를까, 사람이 욕을 하거나 말거나 답답할 정도로 시종 느리다. 회초리로 몇 번 때려도 그때뿐, 천하에 이런 느림보는 없다.

하지만 소라고 다 느린 것도 아니다. 동작이 느린 놈이 대부분이지만 빠른 놈도 있다. 빠른 놈은 길을 가다 앞을 가로막는 담장을 펄쩍 뛰어넘기도 한다. 농촌에서 자라 이런 의외성을 눈으로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주지역 초지. 대부분 중산간 지역의 목장 지대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가 오히려 곤혹을 치를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농촌에서 평생 밭 갈고 짐 실어 가며 소를 가꿔 온 농부라면 소가 갑자기 담을 뛰어넘을 때 소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짐승에게도 감정이 왜 없겠는가. 소가 곁눈질하는 것을 보면 알 것이다. 아마 소가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옆집 어른에게 삯 내어 밭을 갈고 있었다. 어른이 담배를 피우는 사이에, 한 번 해본다고 쟁기를 잡았다가 혼겁이 났지 않은가. 어린 내가 쟁기를 잡는 순간, 소가 잽싸게 쟁기를 끌면서 이리저리 밭을 휘저으며 내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른이 달려들어 큰소리로 “어허이 어허” 몇 번 소리를 지르더니 소가 누그러 제자리로 고분고분 끌려왔다. 그리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소가 사람을 얕본 것이다. 그때 소가 항상 얌전히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었다. 말만 담장을 뛰어넘는 게 아니다. 소도 거슬리며 달라진다.

‘뜬 쇠 울 넘나’.

그냥 짐승의 얘기에 그치는 말이 아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품행이며 성질이 천차만별이다. 한데 겉으로 드러난 행동거지만 가지고 섣불리 대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마음의 눈, 곧 심안(心眼)이 있어야 한다. 온순해 보이는 사람도 감정이 상하면 걷잡을 수 없이 성급해지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의외의 행동에 놀라는 수가 종종 있다.

“그 사름, 말수 엇고 잇인지 몰라도 ᄒᆞᆫ번 부애 나민 잡지 못ᄒᆞᆫ다. 성질 무서운 사람이여.(그 사람, 말수 없고 있는지 몰라도 한번 부아 나면 잡지 못한다. 성질 무서운 사람이다.)”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가 오히려 곤혹을 치를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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