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일손' 학살사건 54주기를 맞이하면서

1950년 9월에 작성된 모슬포경찰서(서장 강문식) 비밀문서에 의하면 절간창고(고구
▲ 어머님 돌아가신 날에 피었던 일곱개의 꽃송이들.이 이제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한 송이가 떨어져 나갈 때 마다 나의 지난 잘 못들을 10개씩 회개했습니다.
마를 말려서 보관하던 창고)에 '예비검속'되어 있던 253명이 군에 인계되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모두 "D"와 "C"급인데 유독 "B"급 1명이 섞여 있었다. 왜 B급 1명이 섞여져 있는 것일까? 그이도 총살되었다는 말인가? 아니었다. 나머지 비밀문서들을 통하여 추적한 결과 그이는 김영두(한림, 제주지방법원 김영길판사 동생)씨였다. '해병대를 지원입대한다'는 명목하에 김판사를 비롯한 마을유지들이 신원보증을 해서 풀어주었다.

2000년 5월 경 나는 수소문 끝에 대전에 거주하고 있는 그를 전화상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1979년 3월 경 김영길 변호사(대구거주, 지금은 작고)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어려웠던 시국에 대해서는 한숨만 내쉴뿐 입을 열지 않았다. 유신정권이 서슬퍼럴 때였기 때문이었으리라.

"해병대 입대조건으로 선생님을 풀어준 것 같은데요, 군에 입대하셨습니까?" 그이의 생존 조건이 궁금했다. "아니다, 석방되자 마자 나는 부산으로 나와버렸다. 군에 가지 않았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이에게 나는 당시 예비검속 상황을 문의했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섯알오름'에서 발굴된 유해 숫자(190 여명)와 경찰기록에 의한 숫자(253 명)상에 현저한 차이(60 여명)가 난다.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동네를 수소문하면서 다녔다. 상모리(모슬포는 하모리와 상모리로 나눠져 있었음)에 거주하는 김순후(2000년 당시 67세)를 만났다. 그 이는 1948년 12월(음) 이교동 '대살사건'때 아버지(김봉옥, 50)를 잃었다. 동년 12월 8일(음)에는 동생 김순화(당시 16세)를 잃었다.

그이는 '모슬포 절간창고에 갇혔던 동내사람들 중 정태훈,김승병, 허재훈 등이 7월 26일(음 6월 12일) 군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증언했다.

신평리 출신 김태홍(대정고 12회졸, 나의 동기, 모슬포거주)씨를 만났는데, 나의 하는 '활동'을 듣고 "나의 아버지도 모슬포 절간창고에 갇혀 있다가 6월 12일 군트럭에 실려 나갔다. 신평리 여러사람들이 동시에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었다.

절간창고 근처에 살았던 분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낮에 군트럭에 하나가득 예비검속되었던 사람들을 싣고 나갔다.

신평리 출신들로는 강경도, 박계식, 김창욱, 김태은, 송대길, 김창번 등 6명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2001년 2월 나는 MBC(서울) 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취재팀(팀장, 이채훈)과 함께 자초지종을 밝히기 위해서 제주는 물론이고 남한일대를 뒤지고 다녔다.

'해병 1,2기 출신들을 추적하라'

수소문 끝에 김숙원(해병 1기, 서울거주)를 찾아냈다.

"군철모 같이 생긴 산 밑에서 50 여명(군트럭 1대분)을 총알 3개씩 받고 명령에 의해서 쏴 죽였다"고 증언했다.

당시 해병대 모슬포 부대(3대대)장 김윤근(경기 안산 거주, 서울 영락교회 원로 장로)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단지 '백조일손' 학살사건은 기억하고 또한 시인했다. "한차례 상부명령에 의해서 했다'라고...

그 50~60 명의 유해는 산방산 자락 어디엔가 묻혀져 있다는 결론이다.

나는 2002년 백조일손 학살터를 재발굴했다, 혹시 다른 구덩이에 잔해가 있지 않을까 해서. 잔뼈 밖에 온전한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증인들을 통해서 192위 외에도 그후 철근뽑는 작업을 하면서 2구를 더 발굴해서 섯알오름 동편 기슭에 작업인부들이 묻어주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작업인부로 동원되었던 이번웅(대정고 12회, 나의 동기)씨는 "쪼그리고 앉아서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 유해는 아주 건장한 남자로 보였다"고 하였다.

잡목사이를 굴착기로 헤집고 며칠동안 찾아 봤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그 두 유해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그 2구는 당시 대정면사무소에 서기로 근무하던 좌용운씨와 나의 아버지(이현필)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좌씨와 나의 아버지는 예비검속도 되어 있지 않았다. 190 여명이 총살되는 밤중에 불려나가서 저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8월 20일 새벽녘이었다.

대정면사무소 당시 '사령원부'에는 8월 19일까지 두분 모두 근무했던 것으로 적혀져 있었다.

서림에 거주하고 있는 문형옥(당시 면서기, 후에 대정읍장 지냄)씨를 찾아가서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듣고 재연할 수 있었다. 당시 면직원들은 예비검속된 사람들 후생문제를 관리했었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와 동료의 죽음은 서북청년단 출신 면서기(첩자)의 고자질이었을 것이라면서 내가 복사해서 가지고 갔던 '사령원부'에서 그 첩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다.

이런 일들은 대정국민(초등)학교에서도 있었다. 박아무개 교사가 서청출신으로 아주 악랄했다고 생존한 선생님들이 증언해 주었다.

소위 '손가락 총질' 하나로 숱한 '양민'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고, 아직도 행방을 몰라 찾아 헤매고 있다.

이제 불행했던 '과거'는 청산되어야 한다.

나는 가해자들을 찾아가서 '회개'를 촉구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진정한 복수란 저들의 만행(죄)을 깨닫고 회개시키는 일"이라고.

내가 찾아가서 '회개'를 촉구한 그 원로장로는 "제주에 꼭 가야하겠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용기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찾아와서 '회개'했다는 말은 전해 듣지 못했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저들의 행방과 유해를 찾아내어 '백조일손' 공동묘역에 모시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구천을 맴도는 영령들이시여, 조금만 촘앙 이십서양!


2004년 8월 20일 새벽, 이역만리에서 불효자 이도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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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돌아가신 날에 피었던 꽃들이 이제 하나 둘 떨어져 나갔습니다. 회개하는 맘으로 아버님 전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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