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사이] (4) 고충석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前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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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1동 주민센터 앞에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의 선거벽보가 붙어있는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3월9일 실시되는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문제를 이념적 시각에서 한번 따져 보고 싶다. 나는 보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보도 아니다. 굳이 이념적으로 따진다면 중도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中)은 기계적으로 구분한 ‘가운데’가 아니라 목표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의미인 적중(的中)의 ‘中’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중용에서 말하는 시중(時中)의 개념이다. 중도는 중간에 있지만, 그 입장이 때에 따라 늘 유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경쟁이 필요할 땐 경쟁을 시키고 분배가 필요할 땐 분배정책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좌파는 성장을 고민해야 하고 우파는 복지를 연구해야 한다. 대개 선진 유럽 국가들도 당이 좌파나 우파로 나뉘어 있지만, 좌파 정당도 필요하면 우파의 정책을 수용하고 우파정당도 시대정신에 따라 좌파 정당의 정책을 부분적으로 차용한다. 독일의 경우를 보자. 2002년 좌파 정당인 사민당이 집권하자 슈뢰더(Schroder)가 수상에 취임했다. 그는 몇 년 전 한국 여성과 결혼해서 화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슈뢰더 총리는 취임하자 하르츠((Harz)법을 만들어서 실업자 수 500만 명 시대에 직면한 세칭 ‘독일 병’을 고치기 위해서 노동 사회제도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때 썼던 방식이 파견 노동 확대 등을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와 실업 부조 축소이다. 이것은 우파정당들이 그간 주장했던 개혁방식이었다. 이러한 개혁 드라이브를 통해서 병든 독일을 구했고 소위 숨은 챔피언이라고 하는 세계 일류의 중소기업들을 만들어 냈다. 

  극우나 극좌는 동전이 앞뒷면

지금 정권을 잡은 선진 유럽 정당들이 지향하는 실제적인 정책 측면에서 보면 그 스펙트럼이 매우 크기 때문에 대체로 중도정당이라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재산권을 포함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도에 따라서 우파나 좌파냐로 구분해왔다.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자는 쪽으로 갈수록 극우이고 그 반대쪽으로 갈수록 극좌이다. 극우의 상부 구조적인 표현이 파시즘이고 극좌는 스탈린 체제이다. 극우나 극좌는 동전의 앞·뒷면으로 개인의 자유, 창발성이 전혀 용인되지 않은 체제이다. 이런 체제하에서 손정의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의 성공은 있을 수 없다.

그 중간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중도 우파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있고 중도 좌파에는 사회민주주의가 있다. 전자는 사회악(social evil)이라고 생각되는 부문만 국가가 규제한다. 마약, 밀수, 독과점, 사재기 등에 있어서만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규제한다. 사회민주주의도 자유와 시장경제를 존중하지만, 사회 계층적 시각에서 보면, 경쟁에서 뒤진 자와 장애인 등 사회 취약계층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메커니즘을 설계, 운영한다. 그러다 보니 체제 유지를 위해서 잘 사는 계층은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 북유럽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소득의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정부가 가져가는 나라도 있다. 예컨대 스웨덴의 경우 기업이나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득의 30%~60%까지 세금으로 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보면 소득세가 매우 과도하다고 볼 수 있지만, 사회민주주의 시각에서 보면 못사는 사람과의 사회적 연대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서 그 정도의 비용 지급은 당연한 것으로 본다.

현재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나라가 세계화의 가속화, 지식기반경제 시대의 심화라는 문명사적 큰 흐름 속에 편입되고 있다. 그 결과 교육 격차, 정보 격차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다. 이에 따른 소득분배 악화와 부의 격차 확대로 양극화(일본식 용어로는 격차사회)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이 되고 있다. 양극화는 최근 코로나와 같은 팬데믹(pandemic) 사태를 맞으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잘사는 나라도 국가가 양극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사방 곳곳에서 이제야말로 ‘it's time to call Marx’(이제야말로 마르크스를 부를 때다)라고 외치는 정치 세력들이 힘을 얻어갈 것이다. 세계화에 따른 치열한 경쟁 일변도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느 사회나 낙오자를 20~30%가량 양산하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껴안고 갈 것이냐를 놓고 이념적 논쟁이 치열하다. 대체로 많은 사람을 껴안고 가자는 쪽은 중도 좌파이고 부분적으로 일부만 껴안고 가자는 쪽이 중도 우파이다.

좀 오래된 통계지만 인용해보자면 미국의 경우, 1980년 미국 상위 계층 1%가 미국 전체소득의 9%를 점했는데 2012년에 미국은 17.7%, 한국은 16.6%로서 OECD 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한국에서 부의 집중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통계가 나온 이후 지속해서 한국이나 미국의 경우 부의 집중 현상은 더욱 뚜렷해지고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몇 년 전 통계이지만 국민 45%가 자신을 하층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하위권에 속하며 실제적인 실업 체감률은 10%를 훨씬 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최근에는 더욱 악화하였을 것이다. 소위 자유민주주의자들이 금과옥조처럼 말하는 기회균등의 신화도 처절하게 깨어지고 있다. 예컨대 빈부격차가 학력 차이를 가져오고 있다. 서울대 신입생 중 아버지 직업이 농·수·축산업인 비율이 98년 4.7%였는데 2011년엔 1.7%였다. 농어촌특별전형제를 도입해도 그렇다. 

빈부격차가 교육격차를 가져오는 유의미한 통계도 있다. 고소득층 자녀는 만 6세까지 교육기관, 박물관 등 집 밖에서 유익하게 보내는 시간이 못사는 아이들보다 1,300시간이나 더 많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두 그룹 자녀가 독서, 일기 쓰기에 쓴 시간은 400시간이나 차이가 난다. 이 차이를 메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거주환경이나 가정 배경 등에 따라 초등학생들의 어휘력 격차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21세기 교육연구소).

  양극화 해결할 국가 지도자 누구?

미국도 1960~2007년 사이에 흑인과 백인 사이의 교육격차는 감소했지만, 고소득과 저소득의 계층 간 격차는 40%나 늘었다. 미국의 경우 고소득층 자녀 중 6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3분의 1, 80년 전후에 태어난 이들은 절반 이상이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저소득층 출신은 60년대 출생이 5%, 80년 전후 출생은 9%만이 대학을 졸업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치 기반이라고 볼 수 있는 로스터 벨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저학력,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이다. 그간 고학력에다가 전문직에 종사하는 흑인들의 비율은 꾸준히 상승했지만, 저소득층에 속해있어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흑백 간의 소득 격차보다 백인 간의 소득 격차가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고전적 명제인 계층 간 이동 수단인 ‘교육 사다리’가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나라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 10명 중 6명이 자녀 세대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서 중산층이 될 가능성이 없다(중앙일보 2019년 1월 30일 자 1, 4, 5면)고 답한 것을 보면 빈곤 대물림은 갈수록 심화할 전망이다. 

어떻든 불평등 문제는 현실적으로 중대한 문제이고 도덕적으로도 절박한 과제다. 양극화가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신뢰나 연대의 사회질서가 창출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부유한 계층인 소수집단이 가난한 다수의 사람에게 에워싸이면 부자들의 경제와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그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양극화 해결 없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우선 진보적인 세제를 강화하고 훌륭한 공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서 교육의 사다리를 복원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몇 년 전에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령 당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라이지(Reich) 하버드 대학교수가 방한했다. 가장 이상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어디냐는 질문에, 그는 1946년부터 1976년까지의 미국이라고 대답했다. 아마 이 기간은 누구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현실화할 수 있었던 시기였던 같다. 한국 사람의 미국이민이 붐을 이뤘던 시기이기도 하다.

현재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 양극화에 대하여 더이상 주저하지 말고 ‘국가정책의 최우선 문제’로 최우선 순위에 뇌야 한다. 우리나라 최대의 화두인 사회통합이나 저출산 문제 등도 양극화 해결 없이는 무망한 일이다.

이러한 과제를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재원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원 확충은 다름 아닌 세원을 확장하는 일이 핵심이다. 세원의 기반을 꾸준히 넓히는 일은 주로 경제의 혁신성장을 통해서 이뤄진다. 혁신성장의 주체는 기업이다. 기업이 영업활동을 잘할 수 있도록 촉매 친화적인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환경이나 보건 등 사회적 규제는 엄격하게 하되 기업활동에 대해서는 규제보다 촉진을, 간섭보다는 지원해야 한다. 기업에 어떤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주느냐는 정부의 몫이다. 특히 현재 전개되고 있는 4차 산업 혁명에 대응하여 기업의 창발성을 어떻게 고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따라서 노동 분야는 물론이고 공공부문에 대해서도 창발성을 저해하는 법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여야 한다. ‘독일병’이나 ‘영국병’ 치유를 위해서 이들 나라가 취했던 과정들을 세밀히 연구해야 한다. 

아울러 소득이 있는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반드시 세금을 부과하는 국민개세(國民皆稅)주의도 채택해야 한다. 물론 재산과 소득이 많은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증세가 마땅하지만, 소득이 있는 저소득층들에게도 조금이라도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우리나라 전체 근로소득자의 40% 정도가 소득세 한 푼도 내지 않은 사람들이다. 저소득층도 소득이 있으면 단돈 1천 원이라도 세금을 내야 국가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납세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자긍심과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다. 돈이 가는 곳에 마음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임승차 의식은 공동체를 좀먹는 노예근성의 다른 표현이다. 

성공회의 사제시인 존 던(John Donne)의 기도문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케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했던 세계적인 명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원작자인 헤밍웨이가 존 던의 시에서 그 제목을 따 왔다고 한다.

인간이 저 혼자 온전한 섬이 아니다.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폭풍이 불어와 해변을 쓸어 가면
그대 친구와 그대 자식의 농토가 줄어드는 것
사람이 죽으면 내가 상처를 입는 것이니
나 또한 인류의 한 부분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지 말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냐고
그것은 나의 벗이여
그대를 위해서도 울리는 것이니까

고충석은?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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