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와 국보법 위반 트리오가 뉴욕에서 만나다

"나 송두율이오, 지금 뉴욕에 와 있어요..."

"어디 계신다고요? 뉴욕이요?" 꿈인가? 생시인가?

나의 핸드폰을 통해서 들리는 음성은 너무나도 반가운 '형님'의 목소리였다. 이렇게도 쉽게 재회할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그려보지 못했다. 그의 막내 아들 린이 뉴욕에서 소아과 의사로 레지던시생활을 시작할 것이란 소식은 몇 달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니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거물간첩' 송두율이 자유의 몸이 되어 독일로 간다는 희소식을 접한지 한달만인가 보다.

작년 이맘때 뉴저지 한 카톨릭 수도원에서 북미주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주최한 한반도 통일문제를 강연하러 와서 4박 5일을 함께하면서 인연이 맺어졌었는데, 다시 재회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도 속히...

뉴욕 메트로폴리탄 일대 '진보운동'의 대가인 몇 분께 급히 연락을 하고 21일(토요일) 점심시간에 '거송'이라는 중국요리집에서 회동을 가졌다.

국보법 직접 피해자들인 문동환 목사와 송학삼 선생이 함께 하면서 '국보법의 해악과 철폐'는 만남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핵심화제가 되었다.

석방 환영사에서 문동환 목사는 "송교수 부부가 서울가서 고생한 것으로 인해서 '악법'이 곧 철폐될 것이다. 간디는 감옥 들락날락하는 것이 신방들락거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즉, 고생을 의미있게 받아들이라는 뜻인 줄로 안다. 국보법을 철폐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대안을 창출해 내는 것이 커다란 과제다. 인류사적 문제다. 국가차원을 넘어서 인류전체로 확산해 나가야 한다. 인류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배제되어야 할 것은 '국익'이다."

이에 송 교수는 답사로 "국보법으로 상상치 못한 고통을 당했지만, 나로써 국가보안법 마지막 피해자가 되길 바란다. 국가보안법은 이제 '역사의 장'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서울에서 추방당할 뻔했다. 독일에서도 그걸 원했고...그러나 나는 추방되고 안되고가 문제가 아니고 '악법'이 사라지는 것을 원했다. 가장 감내하기 힘든 것은 바로 '여론재판'이라는 것이었다. 이 역사적 도전을 감내하겠다고 각오하고 싸움을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길어졌다....

나는 1심 모두발언에서 다섯마리 원숭이 비유를 했다. 그게 아마도 재판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결과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천정에 바나나를 달아메고 원숭이가 그것을 따 먹으려면 전기충격을 받았다.

첫번째 원숭이도 두번째 원숭이도...네번째 원숭이도...그러나 다섯번째 원숭이가 따 먹으려는 순간 전기충격은 중단되어 있었다. 다섯번째 원숭이가 그것을 따 먹으려고 하니까 첫번째부터 네번째 원숭이들이 걱정을 하면서 말렸다. 그러나 다섯번째 원숭이는 그것을 따먹었는데 전기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 첫번째 원숭이는 검찰이요, 두번째 원숭이는 국정원, 세번째는 조중동 언론, 네번째는 사이비지식인들이다. 결국 2심 재판장이 다섯번째 원숭이가 되는 셈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노 대통령 탄핵문제가 불거져 나와 걱정스러웠다. 노 대통령이 탄핵당했다면 나의 재판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역사는 지그재그를 가면서도 제 길을 간다. 총선을 통해서 국회가 바뀌고 탄핵문제도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 국가보안법 철폐로 모인 우리들.
2심 전날밤 꿈을 꾸었는데, 내 감방 창문밖에 비둘기들이 새끼를 쳤는데, 비상연습을 시작하더니만, 얼마후 힘차게 비상해서 창공을 날랐다. 그러나 멀리가지 못하고 건너편 사옥에 가서 앉았다. 그래서 나는 2심 결과가 이렇게 나겠구나 예감했다.

2심 재판장은 고심을 많이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만약 그가 KS 마크 출신이었다면 나는 풀려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선고가 내려지자 방청객들도 변호사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다.

2심 최후진술에서 나는 공자의 수리편에 나오는 '계발' 즉, 4각 모서리 문제해결을 예로 들어 말했다. 우리는 남남갈등, 남북갈등, 그리고 동북아 갈등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한 모서리의 문제를 풀면 자연적으로 다른 문제도 잘 풀려 나갈 것이다.

이제 나는 독일에서도 활동하면서 서울에도 가서 강의하고 또 사람들도 만나고 싶다.

나는 37년동안 서울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의 문제를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감옥에 들어가보니 거기가 바로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원래 예정했던 3주동안만 강연하고 돌아왔었다면 아무것도 모를뻔 했다.

감옥에 들어가 보니 눈에 핏발이 선 사형수도 만나서 얘기를 듣고 또 국회의원들, 대기업 사장들...모두 한꺼번에 만날 수가 있었고 대한민국의 문제를 아주 짧은 시간에 총체적으로 접할 수가 있었다.

내가 잡혀들어감으로 인해서 ('투쟁과정에서') 변호인이 검찰조사시 입회가 가능해졌고, 조사시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워서 하는 '고문'이 없어졌다. 즉, 싸워서 조그만 '승리'를 얻어낸 것들이다. 개인적으로나 가족적으로 고생은 됐지만, 완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결과가 나와서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이 이뤄져 나간다고 믿는다.

21세기에는 '야만'이 지배하던 시대는 끝내야 한다. 한달 전 얘기가 옛날 얘기처럼 들린다."

문동환 목사는 이에 대해 짤막한 멘트를 했다: "난세에 의인이 갈 곳은 감옥밖에 없다. 송 교수가 감옥들어가서 부각되는 이유는 캄캄한 감옥에 의인이 들어가니 잘 못된 것들이 밝혀지는 것이다, 악법은 말할 것도 없고...."

송교수: "우리가 사는 것이 마치 '미로'같다. 목적지가 먼것 같으면서도 가까이 있고, 산 것과 죽은 것이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다."

환영회에 참석한 한 젊은이(안광희)가 물었다: "감옥에서 대한민국의 집약된 모습을 봤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가?"

송교수: "감옥에 들어가서 보니, 마약사범, 경제사범, 조폭사범 등이 아주 많다는 것을 보고 놀랬다. 우리나라 문제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문제다. 가치의 핵심이 돈이라고 일반화되어 있다. 돈 아닌 어떤 것을 가치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도 있더라. 피켓을 들고 외치는 젊은이들도 봤다. 닭장차에 실려가면서 그 틈새로...

내가 전혀 모르는 이들이 책도 보내주고 또 아주 멀리서 면회를 온 분들도 있었다. 구석구석에 돈 아닌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집약되어서 폭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탄핵과 같은 사안에서 '역풍'이 몰아쳤다. 즉 그것은 '보이지 않는 그런 것(힘)'이었다.

정치인들은 이것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감옥에서 만난 정치인들을 볼 때 저들의 욕구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문제였다. 전환기에는 속도를 줄여야 하는 것이다. 속도를 줄이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소득이 1만불에서 2만불로 넘어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고 한다. 2만불에서 3만불은 더욱더 힘들다.

지금까지의 속도를 줄이고 이 시대에 맞는 속도를 찾아야 하는데, 그걸 못 찾고 있다고 느꼈다.

문목사: "우리의 문제는 깊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새 내일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바로 지성인들의 공동체가 되어 나가야 한다. 산업문화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새로운 생명문화가 탄생해야 한다. 그런 일들은 위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썩었으니까). 윗물은 항상 맑지가 못하다. 아래에서 새 물이 흘러나와서 윗물을 맑게 해야 한다. 밑에서 새 것이 일어나야 한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닌 돈주주의이다."

송학삼: "나는 변화의 핵심은 인터넷 공간이라고 봐서 몇 년동안 열심히 들여다 봤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맑은 물이 많아졌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 맑은 물들을 흐리려는(죽이려는) 조직적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문 목사: "로마와 손잡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보면 안다. 예수운동 죽이는 일을 했다. 문예부흥, 동학운동 등은 아래에서 일어났다. .... 아랫물이란 젊다는 것 그것만은 아니고 고생한 사람들이다. "

지(?)교수: "감옥은 '인생대학'이라고 한다. 송 교수는 많이 배웠을 것이다. 사모님은 '대학생'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많이 했다. 혼자 (배운것) 간직하지 말고 사회에 환원해 주길 바란다."

송사모: "한국 사람들은 '야만'이란 소릴 아주 듣기 싫어했다. 사랑과 미움은 백지장 한장 차이였다....국가인권위에도 호소를 했다. 웃기는 것은 본인이 진정서를 내야 조사하며, 재판에 계류중인 사건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을 들었다.

국가보안법에서 북한은 반국가단체인가? 어떤 위치에서 활동한 사람까지 처벌을 받는가? 등의 문제로 헌법소원을 냈다. 검찰은 한쪽 눈만 가리고 한쪽 보이는 쪽만 조사를 한다."

송교수: "태풍의 눈을 보면 중앙은 고요하다. 그런데 주변은 요란하다. (자신이 감옥에 들어앉아 있고 사모님은 밖에서 투쟁해 하는 것을 비유) 참 애를 많이 먹었다. 난 생처음 이런 투쟁을 해 봤다."

이런 저런 얘기들이 아라비안 나이트 소설처럼 끝없이 펼쳐저 나갔다. 음식점 밖에는 먹구름이 몰려와 소낙비를 퍼부었다. 이렇게 해서 뜨거웠던 더위는 한풀 꺽이고 새바람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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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아들 린은 우리들의 대화를 애써 이해하려고 엄마에게 독일말로 통역을 부탁하는 모양...

감옥에 있는 동안 혼자 뉴욕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시작한 아들이 걱정되어 여장도 채 풀기전에 독일을 거쳐 지구 한바퀴를 돌아 뉴욕에 왔다.

어제(22일) 저녁 항공편으로 송교수 부부는 독일로 돌아갔다. 내년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제주에서의 많은 분들의 환대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고 조만간 찾아가서 다시 인사드린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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