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 이재수의 난과 4·3의 상처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

 
▲ 황사평 마을 입구에 하천이 있다.
ⓒ 장태욱
 
제주시 화북1동 거로마을에서 중산간 방향으로 올라가면 화북2동에 속하는 '황사평 마을'이 나온다. 과거 민간에서는 '황새왓'이나 '황수왓'으로 부르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공식 명칭으로는 황사평이라 부르고 있다.

화북2동에 영평동과 나란히 있는 황사평 마을이 언제 설촌(設村)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황사평 마을의 설촌에 대한 문헌상의 조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마을의 마을회장인 고두배(62·개인택시기사)씨를 만나 물어보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마을관련 문헌은 찾을 수 없었다.

고 회장은 4·3사건 당시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이 마을의 모든 기록물들이 공회당에서 군경에 의해 소각되었다고 했다. 당시 공회당은 마을회관이면서 야학당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마을의 정신적 구심이었는데, 공회당이 소각됨으로 인해 마을에 관한 대부분의 문서가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 이 마을의 설촌에 관해 아는 이가 없다.
ⓒ 장태욱
 
고 회장은 이전의 기록이 거의 없지만 근처에 본인 조상들의 무덤 등을 미루어보면 마을 역사가 200년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제주시에서 발간한 자료에서도 황사평 마을은 19세기 말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지금의 황사평은 여느 농촌마을과 비슷하게 사람이 많이 살고 있지 않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마을 안쪽에 둘러보면 과수원이 주로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주민들은 귤 농사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농촌 마을이다.
ⓒ 장태욱
 
고 회장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은 인근의 영평 마을과는 달리 토질이 진흙으로 되어있어, 빗물이 지하로 침수되지 않아 비가 오면 하천에 물이 풍부하게 고여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중산간 마을이어도 이 마을 아이들이 모두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고 했다.

이 마을 안에는 꽤 넓은 부지의 '천주교 성지'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안에는 이재수의 난에 처형된 자들을 기리기 위한 순교자 묘역이 있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천주교도들과 이 섬의 백성들이 무력으로 충돌한 사건을 말한다.

 
▲ 이재수의난 때 처형당한 천주교도들의 묘역. 천주교단에서는 이곳을 성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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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조약(敎民條約) 이후 한국에서는 천주교선교사들이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조정에서는 외국인 신부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대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외국 신부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천주교인이면 죄를 범해서 옥에 들어간 자라 하여도 신부가 자신의 특권을 이용하여 관청에 압력을 넣고 석방시키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주한미군 병사들이 국내에서 죄를 짓고도 수사 한 번 제대로 받지 않는 것보다 더 분통터지는 일을 당시 제주 백성들도 목격하며 지냈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종교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천주교 신부의 특권을 이용할 목적으로 교인이 되는 불량배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당시 세금을 거두던 봉세관 강봉헌이라는 자가 천주교 불량배들을 시켜서 법에도 없는 각종 세금들을 징수하면서 봉세관과 천주교인에 대한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져만 갔다.

봉세관과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들의 작폐를 시정해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제주성에 모이려 하였으나, 천주교도들은 이들을 욕보이거나 폭행했고 심지어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쏘기까지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흥분하여 들고 일어나 민병대를 결성하고 제주성을 향해 집결하게 되었는데, 제주의 동부 진영은 강우백이 서부 진영은 이재수가 지휘하였다.

황사평 마을은 조선말엽에 군병을 교련하던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01년 5월 21일에 민병대들은 굳게 잠긴 제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황사평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공격하였다. 민병대의 공격이 일주일간 이어졌으나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성문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열렸다. 땔감과 곡식이 떨어진 성안의 비천주교도들이 성 위의 대포를 뽑아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민병대는 성안으로 들어와서 성안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민란에 의해 처형된 자들이 사망자 317명에 이르는데 그중 천주교인이 309명이다. 하지만 5월 31일에 프랑스 함대 두 척에 이어 6월 2일과 10일에 강화도의 병력과 수원의 병력이 제주에 들어오면서 이재수의 난은 진압되었다.

이재수의 난을 주도했던 이재수, 오대헌, 강우백 등은 사형이 확정되어 교수형에 처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이재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 천주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글을 배웠다고 하나, 본시 우리나라의 신하이고 백성입니다. 그러나 한 번 천주교 속에 들어가면 관청에서는 그 백성을 다스릴 수 없고, 감히 두려움도 없이 남의 재물을 빼앗거나 남의 소송을 간섭하여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으며, 심지어 사람을 죽였다 해도 감옥에 가두어 놓지 못합니다.

이번 제주의 백성들이 세금을 거두는 폐단에 견디지 못하여 일제히 모여서 하소연하려고 한 것이므로, 어찌 천주교인에 관계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천주교인들이 관청의 무기를 탈취하여 제주성을 함락시키고, 백성의 집들을 제멋대로 하니 이는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죽인 것은 곧 역적이니 양민이 아닙니다. 비록 나는 죽더라도 원한이 없습니다."

한편 민란 와중에 파괴된 교당과 두 신부의 집물보상으로 총 5160원의 배상금이 부과되어 삼읍의 백성들이 돈을 모아 배상하였고, 프랑스 함장과 이재호 제주 목사 간에 피살된 천주교인들에게 매장지를 제공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1903년 11월에 황사평이 피살된 천주교도들을 매장할 장소로 결정되었다.

고두배 마을회장은 이재수의 난을 '생규난리'라 칭하면서 자신의 조부인 고 고영봉(1865년 생으로 추정)님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생규난리' 이후 처음에는 황사평 거의 전 마을이 천주교 공동묘지로 사용할 수 있게 결정되었었다고 했다.

 
▲ 마을회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천주교 공동묘지가 나온다.
ⓒ 장태욱
 
고영봉님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정부와의 민사소송 끝에 승소하여 천주교 묘지를 황사평 마을의 일부에 해당하는 현재의 넓이로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고두배 회장은 "조부는 기개가 대단한 분이셨다"고 전했다.

그런데 그 기개는 뜻하지 않은 화를 불렀다고 했다. 4·3사건이 발발하면서 마을이 위험해지자 고영봉님의 아들들이 읍내로 피신 갈 것을 권했는데, 끄떡도 하지 않다가 며칠 후 아들들이 돌아와 보니 총에 맞은 시신만 남아계셨다고 했다.

소개령이 내려져 이 마을이 전부 불에 타 폐허가 된 이후에 피신했던 주민들 중 극소수가 돌아와서 마을을 재건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정부 시절에 전쟁 피난민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해 약 40호가량의 복구주택이 주어지면서 마을이 다시 형성되었다.

지금 마을은 농촌 마을임에도 이곳이 고향임에도 한 때 고향을 떠나야했던 서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주민들과, 전쟁 통에 고향을 떠나 멀리 섬까지 피난 온 사람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 천주교도들의 묘지로 정한 곳을 이젠 일반 천주교인들의 묘지로 쓰고 있다.
ⓒ 장태욱
 
그리고 애초에 민병대가 천주교도들을 추격하여 제주성을 함락시킬 목적으로 집결했던 장소는 민란에 처형된 천주교인들을 안치할 '성지'로 변했다가 이젠 일반 천주교도들의 공동묘지로 이용되고 있다. 역사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한 채 이 마을 주민들만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황사평 마을 가는길 : 제주시 공항에서 남조로를 따라오면 대기고등학교 가기 약 1km전에 거로마을이 나옵니다. 거기어 우회전하여 3Km쯤 올라오면 화북2동 황사평마을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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