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

※본 리뷰는 추리소설 맨 앞 페이지에 ‘XX가 범인’이라고 써놓은 것과 동일한 정도의 엄청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게 있어 굉장히 묵직하고, 또 힘겨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책이라서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책을 펼쳐들었던 건, 속편으로 나온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이틀 밤을 꼬박 새워가며 해치워버린 탓이다.

1년 전의 책, 2주일 전의 책. 적당히 흐른 시간동안 자잘한 감동과 자잘한 충격은 망각이란 필터를 통해 걸러지고, 굵직한 감동, 굵직한 충격과 굵직한 혐오만이 남아있는 지금.

눈먼 자들의 도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책을 읽기도 전부터 리뷰를 남겨두기로 작정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마지막 장을 덮은 지 일주일이 흐르고 나서야 리뷰 비슷한 무언가를 적어둘 수 있었고, 이번의? 눈뜬 자들의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주일.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정말 싫어'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이주일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무언가를 적어놓을 수 있을 만큼 추슬러졌다.

이 책들은, 내게 있어 그만큼 쉽지 않은 책이었다. 이전 누군가에게 눈먼 자들의 도시를 소개시켜주며 했던 말처럼, 내가 부흐링(발터 뫼르스의 작품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 나오는 생명체.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 아닌 몸의 양식이 되는 특이점을 가지고 있다.)이었다면 소화불량으로 입원하고도 남았으리라. 이건 정말 진심이다.

내 블로그의 '지름' 관련 포스팅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제목만을 보고, 그대로 '질러' 버렸노라고. 너무나 기대가 된다고. 그때 이 책을 나보다 먼저 읽은 한 이웃분이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책이에요.'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렇게까지 말하나 싶어서 의아했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그분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것도 절실하게.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라는 책 두 권은,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책인 동시에 다시는 잊고 싶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이 책 두 권을 읽는 내내, 나는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책의 흡입력-그 탓에 눈을 떼기 힘들었다-에 관한 문제는 별개로 두고, 그저 책들의 무게만을 생각하자면 이 책을 두 권 모두 해치운 내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기분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안과의사와 그 의사의 아내, 첫 번째로 눈이 먼 사내와, 검은 안경을 낀 여인, 백내장이 있어 검은 안대를 한 노인과 한 소년, '백색 어둠'이라 불리는 실명상태에서 아귀처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이름'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 이름.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하던, 아니 중요하다고 믿어왔다는 점에서는 시력과도 공통점을 갖고 있는 그것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생존에의 위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시력이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과 당장 입으로 넣을 음식 몇 가지가 전부였으니까.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을 처음 펼쳐 든 그 날부터, 주제 사라마구는 계속해서 내게 묻고 있다. 내게서 나의 이름을 지워낸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안에 있는 나에게는 어떤 수식어가 붙었을까. 이름이라는 방패, 시각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을 걷어내고 나서는 무엇이 남을까. 나의 이 두툼한 안경렌즈로도 없애지 못할 그 짙은 백색의 어둠 아래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인식하게 될까. 내가 믿었던, 옳다고 생각했던 '그 도시'가 나의 눈앞에 그대로 있기나 한 걸까. 그것이 나의 편협한 시각이 불러일으킨 허상은 아닌 걸까. 그리고 내가 지금 또 다른 백색 어둠의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무겁고 답하기 두려운 질문들이 채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었던 건, 그 질문들에 대한 어떠한 힌트라도 얻을 수 없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 잔혹한 작가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다니! 나도 참 어리석지. 눈뜬 자들의 도시는 오히려 더 큰 실명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던진 질문과 관련된 그 어떠한 힌트도, 대답도 제시해주지 않았다. 제시해 준 것은 오히려 더 심화된 질문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정말 말 그대로 눈먼 사람들의 도시였다. 그것은 그 어떤 종류의 비유적 표현도 아니었으며 '만약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어 단 한사람만이 볼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어떠한 재앙이었다. 재앙. 말 그대로 '눈이 먼다.' 라는 사실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원인 없이 사람들을 덮친 재앙과 같은 질병이었다. 착한아이와 나쁜 아이, 도둑과 경찰, 신생아와 노인을 가릴 것 없이 단 한명, 의사의 아내를 제외한 모두에게 공평하게 던져진 재앙.

   
 
 
눈뜬 자들의 도시는 그 엄청난 시기를 지나 '눈을 뜨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4년 후 이야기이다. 눈을 뜬 사람들의 도시 이야기. 그렇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그 시기보다 더 끔찍한 실명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작에 이어 독자로 하여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자문하도록 만드는 책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는 동안은 배경에 물러나있던 우익정당이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전면에 나선다. 그들의 시각을 빌려 바라보는 세상은 한편의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지기조차 한다. 젊은 시절 공산당 활동에 심취해 있었다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발언인 "정치가들은 백지 표보다는 기권 표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기권 표야 뭐라고 둘러대도 상관없으니까. 백지 표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것이라는 점을 난 믿는다."처럼, '눈 먼' 상태를 경험하고 나서 '진실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권력의 힘으로 정당화되는 수많은 폭거에? 대항해 '백지투표'를 던짐으로써 권력자의 기만을 공격하고, 권력자들은 다수의 '눈 먼' 사람들이 그들로 인해 '눈 뜨게' 되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그들을 온갖 가지 방식으로 억누른다.

계엄선포, '모든 일의 원흉'으로 내세울 희생양 물색. 언론통제. 끝끝내는 권력자들이 꾸미는 '도시'라는 무대에서 '희생양' 역할을 맡아야 할 '의사의 아내'를 보호하려 들었단 이유로 경감을 살해하고, 그 의사의 아내는 물론, 전편에서 등장했던 '눈물을 핥아주는 개' 콘스탄테까지 살해하며 국가의 '권력에 의해 정당화 되는 암살'까지 자행하고 만다. 물론 중간 중간 자기들끼리 밥그릇싸움을 하는 일도 잊지 않고.

사실 나는, 의사의 아내가 죽은 것 보다, 눈물을 핥는 개 콘스탄테가 죽은 것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의사의 아내가 '도시를 내려다보았을' 때, '도시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으로 긍정적인 결말이 제시되었지만, 눈뜬 자들의 도시는 책의 첫머리에 '짖자. 개가 말했다.' 라는 문장을 싣고서 결말은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정말 싫어.' 라는 문장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죽은 개 '콘스탄테'는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상징적인 존재이기까지 하니 어찌 불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눈을 뜬 의사의 아내가 죽었다. 눈을 뜬 경감이 죽었으며, 눈을 뜬 개 콘스탄테까지 죽었다. 그들이 '백색 어둠'을 지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음'에 안심했던 '그들의 도시'는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일까. '그들'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 보자. 내가 지금 보는 세상의 모습은 진실한 것일까? 내가 사는 세계의 '우익정당'과 같은 이들에 의해 포장되고 꾸며진 모습을 보며 이것이 나의 세상이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을 뜬 자들이 죽어가며 내지르는 비명을 '나는 비명소리가 정말 싫어.' 라며 넘겨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내게는 그 질문들이 많이 힘들다. 대답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생각들을 정리 할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나는 보아 뱀보다는 생쥐에 가까운 인간형이라 이렇게 커다란 덩어리를 한꺼번에 소화해 낼 능력이 없다. 그러니 지금은, 지금은 그냥 이 책을 덮어 두자. 세상을 살아가고, 부딪히고, 깨지고, 그렇게 자라나다 보면 주제 사라마구가 진정 내게 하려 했던 말이 무엇인지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알아갈 수 있겠지. 생쥐가 커다란 치즈덩어리를 갉아먹듯이,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대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의 도시는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불행히도 무엇 하나를 진득하게 알아가기엔 너무도 빨리 흘러가고 있지만, 지금 내가 보고 서 있는 나의 도시는 분명 진실임에 틀림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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