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33)] 제10대 김선옥 도지사 ②

여론은 김 지사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김 지사는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지역에서 올린 내용대로 발령되지 않았고 3.15 부정선거 당시 고위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전력(前歷)이 문제되면서 덕망이 있는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야 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야당인 신민당(新民黨)에서는 고담용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민선지사 후보에 양남전 前 산업국장, 민선제주시장 후보에 김차봉 前 제주시장을 공천한다는 얘기들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결국 김 지사는 자신을 지사로 추천해준 홍문중 의원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민주당의 공천을 따낼 수 있었다. 신민당에서는 예상대로 양남전을 공천했다.

그 해 12월3일자로 사표를 제출한 김선옥 지사는 12월29일에 실시되는 도지사 선거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또한 현직에 있는 시∙읍∙면장들도 민선 시∙읍∙면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대부분이 그만두는 바람에 행정마비라는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야말로 도지사를 비롯한 주요 행정기관장들이 거의 그만두는 바람에 전도에 행정공백현상이 일시에 일어난 것이었다.

도지사 선거 김선옥 양남전 김영진 강성익 양제박 등 5명 등록

도지사 선거에는 김선옥, 양남전, 김영진, 강성익, 양제박 등 5명이 후보로 등록했다. 제주도는 그해 12월12일에 처음 치러지는 도의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시∙읍∙면의원 선거(12월19일), 시∙읍∙면장 선거(12월26일), 도지사 선거(12월29일) 등 17일동안 모두 네 차례의 선거가 치러지면서 온통 선거 열풍에 휩싸였다.
 
자유당 양남전 “당선되면 야당 탈당해 백의종군 하겠다”

도지사 선거는 12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양남전은 야당 후보임을 강조하면서 ‘정실정당정치일소’의 구호를 내세우며 도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양남전은 자유당 시절에 도지사가 某 인사의 압력을 받고 말 150마리를 반출 허가해주도록 지시한 것(당시는 말 5마리 이상 도외반출이 금지되고 있었다)을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번 선거를 통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주장했다.

양남전은 야당출신인 자신이 지사로 당선되면 정부 지원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일부 우려에 대해 “당선되는 바로 다음날 탈당해 백의종군하겠다”는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민주당 김선옥 “좋은 정치는 정부와 국민의 손발이 맞아야”

집권당인 민주당 공천자인 김선옥 후보는 현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의 절대적인 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좋은 정치는 정부와 국민의 손발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비록 지사 경험이 부족하지만 그동안의 오랜 공직경험을 살려 긴축재정으로 도정을 쇄신하고 도민의 의사가 적극 반영되는 행정을 펴나가겠다”고 역설했다.
 
양제박 후보는 장면(張勉) 정부가 자신을 민주당의 구파(舊派)로 몰아 5개월간만에 지사직에서 강제 퇴임시킨 사실을 지적하고 자신의 명예회복은 물론이며 못다한 제주도개발사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이 선거사무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아들이 맡아 화제가 됐다. 신문들은 양제박을 가리켜 ‘노지사(老志士)의 마지막 싸움’이라고 보도했다.
 
강성익 “재물 탐내지 않겠다. 오로지 정의를 위해 싸울 뿐이다”

강성익(康性益)은 ‘大濟州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강성익은 일찍이 남제주군 지역에서 버스회사, 전분공장, 통조림공장 등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력을 쌓은 기업가로서 일제때에는 전라남도 도의원, 해방 후에는 남제주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세 차례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강성익은 “나는 나이도 나이인 만큼 누구에게 아부할 일도 없고 재물도 탐내지 않겠으며, 나는 오로지 정의를 위해 싸울 뿐이다”고 역설했다.

김영진은 적십자사 지사장의 직책이 말해주듯 “제주도는 제주도의 정세만으로 도정을 펴나갈 수 없다. 국내외의 정세와 제주도의 관계를 냉철히 판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주도지사직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특정정당에 속하지 않는 무소속 출신의 지사야말로 가장 공명정대하게 도정을 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진은 적십자사 제주지사장을 다섯 차례나 역임한 지역유지였다.

정당 대결은 뒷전으로 밀린 채 지연∙혈연간 세 싸움으로 ‘확산’

선거는 정당보다 지연과 문중(門中)간의 싸움으로 치달았다. 제주시를 기반으로 하는 김영진을 비롯해서 구좌면의 양남전, 서귀포와 남제주군의 강성익, 애월면의 김선옥, 한림읍의 양제박으로 각각 나뉘어졌는가 하면 서귀포에서는 바로 5개월전에 실시된 7.29 총선에서 강씨 문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康性益이 성산의 玄梧鳳에게 참패한 것을 설욕하기 위해 강씨 문중이 똘똘 뭉쳐 지지기반을 확산하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또한 강성익은 그 동안 쌓아온 사업기반을 바탕으로 다른 후보의 지역에 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김선옥 후보는 집권당인 민주당의 조직을 총동원, 도전역을 공략하면서 자신의 출신지인 애월면을 중심으로 서부지역의 표를 모으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김영진은 그동안 정치일선에 나서지 않았던 참신한 이미지와 유일한 제주시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대세를 몰아갔고 다섯 후보 가운데 가장 자금과 조직력이 열세인 양제박은 양씨 문중과 노인층 표를 파고 들어갔다.

김영진 “도지사 당선되면 사돈, 팔촌, 씨족인사 없애겠다”

도지사 선거 합동유세는 투표를 엿새 앞둔 12월23일 서귀국민학교에서 시작됐다.
서귀포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등단한 강성익 후보는 “나는 전혀 물욕이 없다. 현재 하루 반 걸리는 제주~서울간 교통시간을 13시간 이내로 단축시키기 위해 제주~완도간에 쾌속선을 투입하겠다”는 등 기염을 토했다.

 양남전 후보는 강성익 후보를 겨냥하고 “나는 백두산을 관덕정 마다에 갖다놓겠다는 식의 불가능한 일은 아예 공약하지도 않겠지만 그같은 일은 표를 얻기 위한 사기행위나 다름없다. 나는 제주산 축우를 멸종시키는 반출허가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이유로 자유당에서 쫓겨난 사람이다”면서 제주지역의 사수자임을 강조했다.

김영진 후보는 “12년간의 야인생활에서 느낀 것은 행정부의 시정방침이 모두 한심스럽다는 것이며 도지사로 당선되면 사돈이니, 8촌이니 하는 씨족인사를 모두 없애겠다”고 말했다.
 
선거벽보 등 일체의 선거비용을 선거위원회에서 공동운영한다는 선거공영제가 처음으로 도입된 도지사 선거였으나 종반전으로 접어들면서 돈봉투가 공공연히 나도는 등 혼탁현상은 여전했다. 이에 앞서 12월26일에 실시된 제주시장 선거에서는 김차봉 前제주시장이 고인도(高仁道) 前 어업조합장을 누르고 당선됐다.

강성익 후보, 서귀포 남제주군 유권자 ‘몰표’로 11대 도지사에 당선

투표 당일인 1960년 12월29일 도전역에는 전날 밤부터 갑자기 몰아닥친 폭설과 폭풍으로 전기와 전화가 끊기고 교통이 마비돼 투표를 어렵게 했다. 각 선거진영에서는 투표율이 떨어지면 덩달아 자신들의 득표수가 낮아질 것으로 판단, 안절부절했다.

이같은 날씨로 유권자 14만2980명 가운데 63.2%인 9만435명만이 투표에 참가하는, 그때까지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개표는 불가피하게 다음날로 미뤄졌다. 12월30일 오전8시부터 가까스로 시작된 개표는 오후가 되면서 康性益 후보로 좁혀졌다.

개표는 해가 바뀐 1961년 1월2일 새벽 0시45분께야 겨우 끝날 수 있었다. 개표결과 강성익 후보가 2만3673표로서, 차점장인 김선옥 후보를 1246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양남전은 1만9949표, 김영진은 1만9731표, 양제박은 3166표를 얻었다.

사표를 내고 민선지사 선거에 뛰어든 김선옥 지사는 서귀포와 남제주군 지역에서 강성익에 대한 주민들의 몰표로 아깝게 낙선, 고배를 마셨다. 결국 재임 2개월의 최단명 지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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