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 이시돌목장으로 유명한 금악마을

 
▲ 금악봉에서 바라본 금악마을
ⓒ 장태욱
 
제주시에서 서부관광도로를 따라 25km정도 가면 제2산록도로 진입로에 당도한다. 그곳에서 우회전해서 바다방향으로 가다보면 넓고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인근에 오름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길을 따라 7km쯤 더 가면 금악(今岳)마을을 찾을 수 있다.

 
▲ 벵디못에서 바라본 금악봉
ⓒ 장태욱
 
이 마을은 1550년 쯤 상명리에 진주강씨 일가와 남양홍씨 일가가 이주하여 설촌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약 100년 후에 탐라양씨와 밀양박씨가 입주하였고 또 그 후 약 50여년 후에 경주김씨도 입주하게 되었다.

설촌 당시에는 이곳을 '수류촌(水流村)'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거문고를 타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름(지금의 금악봉)의 형상을 따서 1623년께는 마을이름을 금물악(琴勿岳)이라 했다. 그 후 금악(琴岳)으로 표기해 오다가 약 150여 년 전쯤에 금악(今岳)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금악리는 한림읍에서는 최고 산간지대로 해발 230m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4·3사건 이전에는 본동, 동동, 중동, 상동(웃동네), 일동이못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 있었고, 한림읍에서 가장 넓은 마을이다.

 
▲ 금악은 목장이 넓고 오름이 많다.
ⓒ 장태욱
 
해방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광활한 토지위에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서 제주의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마을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는 명월, 두모, 안덕면 사계리 등 다른 마을 일대에 밭을 소유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일제말기에 강제 공출이 심해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41년 12월 8일에 2차 대전이 일어났다. 대전이 일어난 후 일본 관리들은 전쟁 물자와 양곡, 잡곡 공출에 열을 올리면서 금악리에도 각 가정에 있는 제기, 놋그릇, 숟가락 등 포탄이나 탄알이 될 수 있는 모든 물건은 반장을 통하여 모조리 걷어갔다. 보리, 조, 콩 농사도 수확량의 50%는 공출로 내놓도록 독촉하게 되면서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서 식량대용으로 고구마와 들나물 등 초근목피로 연명하게 되었다.'

'1945년 4월 12일에 … 협재리 백사장에 상륙한 군인은 만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제주도에는 3만 명의 군인이 들어왔다고 한다. 삼일 동안을 만여 명이 우리 마을을 지나가는데 군인들이 몇 만 명이 되는지 너무 많아 알 수가 없다. 금악오름 주변 소나무 밭은 온통 군인 주둔지가 되었다.'(자료 : 양일화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고, 1948년 4·3사건이 발생하면서 마을이 혼란 속에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5·10 단독선거를 거부하여 정물오름 아래 있는 개역빌래왓괘(동굴)에 집결하여 선거당일을 숨어서 보냈는데, 선거가 끝날 시간에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노인들이 경찰에 잡혀가고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마을 주민들은 경찰을 피해 다녀야했고, 서북청년단원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죽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48년 11월 17일에 제주도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군경에 의해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1948년 11월 18, 20일 사이에 금악과 그 주변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져 마을 주민들은 정든 집과 가구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마을을 떠나야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8월 본동이 재건되었지만 웃동네와 일동이못 주변은 재건되지 못했다.

 
▲ 금악은 이시돌목장으로 유명하다. 이시돌목장 내에는 성당, 병원, 수녀원, 양로운 등 여러 종교시설과 복지시설이 들어서 있다.
ⓒ 장태욱
 
그러다가 천주교 한림교회에서는 1960년대 초에 누운오름 일대에 이시돌 목장을 개발하였다. 이시돌 목장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작업장 일거리가 생겨났다.

'하루를 노동하면 밀가루 한 되(2리터)를 주니 서로가 다투면서 작업장에 나갔다. 작업은 목장 경계 성담을 쌓는 것인데 돌 운반 작업이다. 지게를 지고 4인이 지게 위에 돌을 얹어주면 50m이상을 지고 가야한다. 대부분 여인들은 지게를 지고 돌을 운반하였다. 처녀들이 지게 짐을 지게 된 것도 힘이 없어도 먹고 살려니 그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서로 다투면서 돌 운반 작업을 하였다.'(자료 : 양일화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고픈 시절 이 마을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얼마나 어려운 고초를 겪었는지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1968년까지는 대여곡에 의존하여 생활을 하다가 1969년부터 그 당시 소득 작목인 유채농사로 주민들의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료와 농기계가 보급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배고픔의 고통을 겪지 않게 되었다.

안필진(42) 금악리장을 만나 마을의 사정을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금악은 목장이 대부분 면적을 차지합니다. 이시돌 목장의 면적이 대략 360만평정도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중 금악마을 내에 포함되어 있는 면적이 200만평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이시돌목장 내에 포함되지 않고 금악 마을 축산조합이 공동 관리하는 목장이 50만평에 이릅니다. 원래 100만평 정도 되었는데 조합원들의 합의하에 50만평을 블랙스톤 골프장에게 팔았습니다. 갈수록 사정이 어려워져 목축을 포기하는 농가가 많아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안필진 금악리장
ⓒ 장태욱
금악에는 이시돌목장과 축산조합이 관리하는 목장이외에 양돈단지가 있다. 양돈단지는 이시돌목장이 형성된 이후에, 이시돌목장 측에서 목장의 일부를 천주교인 12세대에게 불하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양돈단지 초기 입주민은 천주교에서 자금을 지원받고, 이곳에 드럼통 같은 집을 짓고 축사를 지어 양돈을 시작했다고 한다.

금악에는 현재 460가구에 12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금악은 다른 마을과 달리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가 이시돌목장과 인근의 블랙스톤골프장에서 일하기 위해 입주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농촌마을은 인구가 감소하는데 반해 금악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어서 행복하시겠다고 전하자, 안 리장은 자신의 애로사항을 토로했다.

"금악은 단일공동체를 이루기 어려운 조건에 있습니다. 이시돌목장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독립된 사회이고, 골프장은 본동 주민들과는 전혀 교류가 없습니다. 게다가 양동단지에 입주해있는 농가들도 이 마을 출신들이 아니기 때문에 본동주민들과 일체감이 부족하고 오히려 갈등이 많습니다. 제 재임기간 동안 떨어져 있는 공동체들을 화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블랙스톤 골프장 입구
ⓒ 장태욱
 
블랙스톤 골프장이나 이시돌목장이 마을 주민들에게 주는 이로움이 있는지 묻자,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시돌목장은 외관상 천주교 자선단체로 보이지만 하나의 기업입니다. 일반 기업들도 이윤을 얻으면 기업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수익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지 않습니까? 이시돌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사업도 대부분 천주교인들을 향한 것이지 이 지역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블랙스톤 골프장도 이 마을 주민을 고용하거나 마을을 위해 지원을 하는 것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만약 이 마을 주민들 중 골프장에 취직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골프장과 계약한 용역회사를 통해서만 입사가 가능합니다. 제가 최근에 골프장 측에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골프학교라도 열어달라고 제안했는데 긍정적인 검토가 이루어지는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금악은 초지가 푸르고 넓은데다 인근에 누운오름, 이달봉, 금악봉, 정물오름, 당오름, 선소오름 등 멋있는 오름들이 많이 있어서 천혜의 자연 환경을 자랑할 만하다. 이를 잘 활용하기 위한 계획이나, 주민들이 염원하는 사업이 있는지 물었다.

"금악은 중산간 마을임에도 물이 많은 곳입니다. 자연적으로 물이 솟아나는 곳이 공유지에만 여섯 곳이 되는데, 이 여섯 곳을 연결하는 산책로를 만들고 싶습니다. 주민들의 건강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고, 관광자원으로 활용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 일동이못. 금악은 물이 많은 곳이다.
ⓒ 장태욱
 
금악이 쾌적하고 광활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외부의 자본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행정기관에서는 '투자유치'에 지역의 사활을 걸고 있지만 외부 자본이 유입되어도 정작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각 농가가 안고 있는 부채는 너무 많고, 농업이나 축산업의 수익성도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이리저리 이곳 주민들이 설수 있는 영역만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제주4·3에서도 좌절을 딛고 지켜낸 마을인데, 정작 금악 마을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은 물리적 침탈이 아니라 정부의 그릇된 농정과 그에 따른 농·축산업의 위기라고 판단하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안필진 리장이 지도력을 잘 발휘하고 주민들이 결집해서 스스로의 비전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만, 지방자치단체도 주민들의 삶에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제대로 된 투자유치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에 협조해주신 안필진 금악리장님과 지역의 곳곳을 상세히 안내하고 설명해주신 제주시 여성농민회 한경례 회장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금악의 오름과 4.3'을 소재로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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