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 푸른 벌판과 예쁜 오름에 주름진 세월의 아픔을 묻고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패전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일본은 제주도를 최후의 격전지로 결정하고, 이곳에서 미군과 마지막 결전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한 강제노역과 강제공출은 더욱 극심해져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날로 고통스럽기만 했다.

 
▲ 역사의 현장이었던 금악의 오름들. 가장 멀리 있는 금악봉부터 정물오름 당오름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 장태욱
 
그 와중에 일본은 한림항 매립지에 군대가 이용할 군량미를 쌓아두었는데, 미군은 이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1994년 여름 한림항 매립지를 폭격하였고, 민가를 향해서는 기관총을 난사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몸을 숨겼다가 미군 폭격기가 돌아가고 나자, 다시 폭파된 한림항 매립지를 복구하는데 강제 동원되었다.

1945년 4월에는 일본관동군을 태우고 있던 구축함과 그 호위선이 협재와 비양도 사이에 있는 바다에 들어왔는데 미군이 이를 알고 어뢰를 발사하여 구축함을 침몰시켰다. 시커먼 연기가 온 하늘을 뒤덮었고, 협재리 주변은 시체와 부상당한 군인들로 일대 혼란을 겪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또 한 번 공포에 떨어야했다.

이 구축함에서 모래사장에 상륙한 일본군이 3만이라 했고, 이들이 육지로 피신해서 진을 친 곳이 지금의 금악봉이었다. 이 일본군들은 금악봉 인근 소나무 밭에 천막을 치고 주둔하면서, 삽과 곡괭이를 이용해서 금악봉 능선에 진지동굴을 팠다. 이 와중에 많은 일본군들이 죽어갔는데 금악봉 인근에는 아직도 '일본 병정 묻은 밭'이라고 부르는 밭이 있다.(양일화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 일본군이 파 놓은 진지동굴이 풀로 덮혀 있는 모습. 금악봉의 남쪽 정상부분에 있는데 이 곳에서는 멀리 바다가 훤히 내다보인다.
ⓒ 장태욱
 
 
▲ 금악봉의 분화구 근처에 있는 진지동굴. 기록에 의하면 4.3 당시에 무장대는 일본군이 파 놓은 진지동굴에서 숨어지냈다고 한다.
ⓒ 장태욱
 
전쟁 말기에 일제는 각 가정에 제기그릇, 놋그릇 등 쇠붙이는 모두 수탈해갔으니, 가정마다 숟가락이 없어서 나무젓가락을 이용해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석유가 부족해져서 송진 기름을 빼 오라고 할당하니, 집집마다 소나무 밭을 다니면서 송진을 빼서 공출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은 되었지만 그 기쁨은 잠시였고, 금악마을도 4·3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갔다.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제주도민은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의 결성에 착수하였다. 45년 9월 10일 도민은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9월 15일에는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그리고 9월 22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미군은 45년 9월 28일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일본군과 민간인의 본국 귀환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미군은 친일분자를 축으로 권력기구를 구축하고, 그를 바탕으로 제주도를 통치하려 하였지만 미군정이 구축한 기구들이 당시의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46년이 되자 미군정은 대한독립촉성회, 한국독립당, 비상국민회, 광복청년회 (후에 대동청년단으로 개편) 등의 우익단체 결성을 적극 지원 혹은 독려하였고, 본토에서 군과 경찰 병력을 보강하며 제주도의 좌익계를 압박하였다.

그러던 와중 1948년 3월 1일 2000명의 학생과 군중은 오현중학교 교정에 모여 3·1절 기념식을 진행한 후 관덕정으로 시가행진을 했고, 그 와중에 미군정 경찰이 시위대에 총을 발사해 민간인 4명이 죽는 3·1절 시위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3·1절 시위사건 배후자 검거과정에서 약 2500명의 청년들을 구금하고 이중 3명을 고문 치사케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주도의 좌익은 '제주도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연인원 4만852명이 참가한 관공서 총파업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전도의 행정기능이 마비되자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좌익이라 의심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하는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검거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좌익 지도자들과 수많은 도민이 산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금악봉에서면 한림항과 비양도가 훤히 내다보인다. 주민들과 유격대는 이곳에서 군인이나 경찰이 해안에서 마을을 향해 올라오는 지 망을 봤다.
ⓒ 장태욱
 
1948년 4월 3일 자정, 마침내 무장 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00여 명과 그 동조자 1000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2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 및 우익단체의 요인과 집을 공격하였다.

중산간에 위치한 금악마을도 4월 3일 아침에 일부 주민들이 벵디못 거리에 모여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외치며, 총과 죽창을 들고 거리거리에 호소문을 붙이고 인민군 군가를 불렀다고 한다. 4월 3일 이후에 금악 주민들은 무장대와 경찰 및 우익 단체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기 위해 산으로 들로 숨어 지내야 했다.

 
▲ 유격대들은 금악봉에서 망을 보다 군경이 올라오면 봉화를 피워 인근의 다른 오름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 장태욱
 
1948년 4월부터 11월 까지 7개월간 하룻밤도 편히 잠을 잔 날이 없이 산으로 도망가고 또 집에 와서 밥을 해먹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산 사람들은 마을 아이에게 보초를 서다가 경찰이 올라오면 알려 달라 하였고 자기들 먹을 양식으로 쌀도 달라고 하여 가져가기도 하였다. 만약 그들의 마을 안 들으면 반동분자라 하여 숙청을 당하니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 되었고 꼼짝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늦은 가을이 되면서 경찰관 외에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폭도를 토벌하면서 주민을 괴롭혔고 또 혼자 있는 부녀자들에게 '남편이 어디 갔느냐', '데려오라'고 하는 와중에서 폭행을 당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었다.(양일화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러던 와중인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기 전날 산에서 총을 메고 산사람(유격대원)이 내려와 피난을 가야한다고 알렸다. 마을 단위로 5·10 단독선거에 반대하기 위한 행동 지침이 내려졌던 것이다.

5월 10일 선거가 있는 날 아침에 마을 주민들은 정물오름 앞 속칭 개역빌래왓괘(동굴)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 온 마을 주민들이 하루를 지내고 투표가 끝날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후부터 경찰과 우익단체의 테러는 더 극심해졌다.

 
▲ 정물오름. 1948년 5월10일 이 마을 주민들이 5.10 단독선거에 불참하기 위해 이 오름 아래에 있는 동굴에 모여 하루를 같이 보냈다.
ⓒ 장태욱
 
무장대는 우익단체의 테러에 반발해서 5월 14일 대동청년단 부단장 김태화와 부인 이유생을 살해하고, 우익익사의 가옥 7채를 불태웠다. 이에 반발하여 6월 7일에 저지지서 응원경찰이 금악마을을 기습하여 임산부, 노인 등 5명을 붙잡아 저지지서로 데려오던 중 오자교 인근에서 학살했다.

그리고 10월 26일에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 군인들이 새벽에 마을을 덮쳐 주민 9명을 모슬봉 자락으로 끌고 가 총살하는 일이 있었다. 1948년 11월에 접어들자 응원경찰이 마을에 며칠씩 주둔하면서 토벌에 나섰으며, 그 와중에 마을 주민들은 집에 머무를 수 없어서 숨어 지내다 경찰에 발각되어 총살되곤 했다.

 
▲ 오자교. 5.10 단선 거부 이후 경찰의 탄압이 극심하던 48년 6월에, 마을 주민 7명이 이곳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 장태욱
 
그러던 11월 20일 경 금악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져서 마을 주민들은 해안가 마을로 피난을 가야했고, 그들의 집과 살림 일체가 불에 타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 피난생활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해안마을에서도 수시로 토벌대에 불려가 군인들에게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학살되어야 했다. 그 예로, 1948년 12월 9일, 11일, 14일 3일 동안 양지하씨 등 금악 주민 18명이 수원초등학교 인근 '봉근굴'에서 학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49년에 이르러 무장대에 대한 대토벌이 종료되어 인근 마을이 복구되는 와중에도 당국에서는 금악마을을 계속 위험지구로 여겨 복구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3년 7월에 이르러서야 금악주민들은 마을 복구를 허락받았다.

하지만 48년 이전에 38가호가 모여 살던 금악 웃동네(금악 상동)는 복구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버렸다. 주민들이 본동을 재건해서 그 곳에 모여 살다보니 웃동네는 자연 폐촌이 되어버린 것이다. 금악 웃동네는 아직도 대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당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2003년에 제주 4·3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에서는 이곳에 표석을 세워 표석을 세워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표시하였다.(자료 : 4·3연구소의 <제주4·3유적지>)

 
▲ 잃어버린 마을인 웃동네. 48년 11월에 마을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 마을이 불타 없어졌는데, 마을이 복구되지 않아 사라진 마을이 되었다.
ⓒ 장태욱
 
갯거리오름 남쪽에는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에 집단 학살된 63명의 민간인들을 매장한 '만벵듸 공동장지'가 있다. 당시 희생되어 이곳에 묻힌 자들은 여러 사유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검속되기 시작해서 당시 한림면 어업창고에 구금되었던 자들인데, 50년 8월 20일 섣알오름 탄약고터 작은 구덩이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대정읍에 매장된 백조일손 희생자들과 같은 날 인근의 서로 다른 구덩이에서 희생된 자들의 유골이 이곳에 매장된 것이다.

만벵듸 묘지의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조시가 써 있었다.

그대 기억하는가 섣알오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
모진 광풍에 스러지던 칠석날 새벽
보모형제 임종 지키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뼈마디 하나 겨우 추스른 주름진 세월

몇 번이나 새로 돋았을까 저 풀들
시퍼렇게 날 세우고 진초록 물결로
그 새벽 이슬길 몇 번이나 밟아 왔을까
옷은 얻어서 옷이고 밥은 빌어서 밥인데
얻지도 빌지도 못한 혼백 견우별, 직녀별로 피어올라
인연의 질긴 끈 놓지 못하는 사이

기다림에 지쳐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체온은 햇빛에게 보태어
야만의 땅엔 날줄과 씨줄로 곱게 엮은
저토록 고운 벌판인데

가진 것 비록 적어도 더불어 사는 넉넉함으로
평화의 불씨 당겨 점화하오니
해원의 향으로 타오르십서
상생의 촛농으로 흘러 내리십서 (강덕환 짓고 강창화 쓰다)

 
▲ 만벵디 공동묘지. 1950년 8월 20일 섣알오름 화약고 터에서 집단 학살된 사람들의 유골을 묻은 곳이다.
ⓒ 장태욱
 
조시에 쓴 대로 금악은 '저토록 고운 벌판'을 가진 마을인데, 잘못된 역사로 인해 '야만의 땅'이 되어버렸던 지난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비극의 역사를 침묵하며 지켜보았던 어여쁜 오름들과 넓은 벌판이 그 아픈 역사의 말없는 증인인 셈이다.
 
 
취재하는데 도와주신 제주시 여성농민회 한경례 회장님과 자료로 도와주신 4.3연구소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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