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조천마을에서 다시 보는 조선 성리학의 배타성

조천포구에 가면 과거 조천진성의 성벽 안에 복원된 연북정(戀北亭)이 있다. 조천마을에는 연북정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조천포구 선창가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것을 조천석이라 한다. 사람들은 이 바위에다 닻줄을 걸어 배들을 매곤 했다.

   
 
▲ 조천진성 안에 연북정이 있다. ⓒ 장태욱
 
 
그런데 중국에서 유명한 지관이 와서 이 바위를 보고, "저 바위를 보이지 않게 감추시오. 만일 감추지 않으면 조천에는 불량한 사람이 많이 나서 마을 사람들이 못 살게 될 것이요. 그런데 이 바위를 감추면 인물이 끊이지 않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래서 당시 조천면 관내 9개 리의 백성을 부역시켜 성을 쌓는 동시에 이 조천석을 흙으로 덮어 메워 둥글게 높이 쌓아 올렸다. 여기에 정자를 지어 '쌍벽정(雙碧亭)'이라 했는데, 이 일이 있은 후로는 조천에서 문학가가 많이 나고, 현감, 군수가 다수 배출되었다고 한다.

   
 
▲ 연북정 계단에 육지 쪽을 향해있다. ⓒ 장태욱
 

기록에 의하면 1590년(선조 23년)에 이후옥 목사가 제주에 부임했을 때 조천진성은 너무 좁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옥 목사는 아전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이 있게 된 것은 실로 도적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이며 나라의 사명을 띠고 와서 춤추는 곳인데 어찌 이와 같이 성이 좁고 집은 노후하였느냐"고 하여 농사짓는 틈에 이 바위 인근 바다를 매립하고 바위 위에 망루를 안치해서 쌍벽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599년(선조32년)에 성윤문 목사가 부임해서 이곳을 증축하고, 그 명칭을 연북정(戀北亭)으로 고쳤다고 한다.

연북정이라는 이름은 북(北)쪽을 사모[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제주에서 북쪽에는 임금이 있는 한양을 의미하므로, 제주로 유배 온 유배객들이나 이곳에 부임한 지방관들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

   
 
▲ 연북정 위에서 노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장태욱
 

 
먼 객지에서 하루도 잊을 날이 없으니
하루의 고향생각 구추에 당하네.
취한 중에 돌아갈 길 잊고자 하고
꿈속에서도 이 몸이 떠 있음을 깨닫도다.
우연히 최호의 연파구를 읊고 진경의 죽엽주를 환상하기 어렵도다.
멀리 이별함을 가볍게 생각마라
정자에 홀로 앉으니 저녁 수심만 절로 나네.
-김상헌의 시

김상헌이 연북정에서 지은 시(時)다. 김상헌은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시강원사서(司書)·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그해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 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연북정에서 멀리 떠나온 나그네의 수심을 시로 표현하였다.

늙고 병든 몸이 북향(北向)하여 우니노라
님 향한 마음을 뉘안 두리마는
달 밝고 밤 긴 절이면 나뿐인가 하노라
-송시열의 시조

우암(尤庵) 송시열의 시조다. 우암은 숙종 15년(1689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83세 노구에 제주도로 유배 왔다. 그는 이 시조를 통해 비록 유배의 비운을 당했을망정 임금에 대한 충심을 잃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렇듯 연북정은 우암을 비롯한 많은 유배인들이 자신의 충심을 표시함과 동시에 결백을 나타내려 했던 곳이다.

   
 
▲ 한희규 노인회장이 연북정 관리장을 겸하고 있다. ⓒ 장태욱
 

한희규 조천리 노인회장과 함께 연북정을 다녀왔다. 연북정관리장 직도 겸하고 있는 한 회장은 자신의 차에 조천진성의 그림 한 장을 지니고 있었다. 18세기에 그려진 그림인데, 그림에는 연북정 주위가 지금처럼 흙으로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였다. 그림 속의 연북정의 모습과 복원된 현재의 모습은 출입구나 계단의 위치 등에서 너무 달랐다.

한 회장은 연북정이 제대로 복원되지 않고 잘못 복원된 것뿐만 아니라 환해장성 주변에 해안도로가 들어서고 건축이 이루어지면서 환해장성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는 젊은 세대들이 너무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 복원된 연북정은 과거에 그려진 그림 속의 못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장태욱
 
 
그런데 연북정은 조선시대 불교탄압이 극심할 때 제주로 유배온 보우대사가 순교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내가 조천을 방문한 날이 마침 조천에 있는 평화통일불사리탑사에서 조선시대 불교탄압에 의해 순교한 보우대사와 지안대사의 석상제막식이 성대하게 열린(8월 16일) 지 이틀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성상 제막식에는 불자 5천여명이 참여했다고 하는데, 평화통일불사리탑사에는 아직도 행사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 절의 주지이신 김경태 스님을 만나서 보우대사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 평화통일불사리탑사. 마당에 보우대사와 지안대사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 장태욱
 

보우대사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이고 법명이 보우였다. 그는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 뒤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당시 재상이었던 정만종(鄭萬鍾)과의 특별한 사귐으로 인해 문정대비(文定大妃)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문정대비는 독실한 불자였는데,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1548년(명종 3년)에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어,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사찰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문정대비가 이러한 조처를 한 것은 보우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 하여 성균관 생원인 안사준(安士俊) 등이 요승 보우의 목을 베고 유생 황언징을 풀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문정대비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보우는 문정대비로 하여금 선교(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1551년 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로 인해 그 뒤 6개월 사이에는 상소문이 400여건이나 올라왔는데 그 중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내용의 것이 75계(啓)나 되었다.

1565년 4월 7일에 문정대비가 죽고, 대비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그 가운데 이이(李珥)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이이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보우는 1565년 6월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보우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명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보우는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연북정 근처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죽일 때는 손가락마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사이를 실로 연결했다고 하니 그 방법이 실로 잔인했음을 알 수 있다.

▲ 최근 8월 16일에 세워진 보우대사와 지안대사의 동상 ⓒ 장태욱
 
성리학을 근본으로 했던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유배를 당했던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 복원을 꿈꾸며 임금에게 연군지정을 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가족과 벗들을 멀리하고 제주로 부임한 지방관들이 자신의 고향과 수도 한양을 바라보며 북쪽에 대해 그리움을 갖는 것도 당시 상황을 미루어 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북정은 소외되고 격리된 선비들이 정신적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념인 성리학과 뜻이 같지 않다고 하여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던 대승을 일개 지방관이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충이니 효니 하는 성리학의 이념도 결국은 인두겁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야 추구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인(仁)과 예(禮)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자신들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잔인한 폭력을 가했던 조선 성리학의 배타성이 결국은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을 연북정에서 다시 새겨보았다.

'OO사랑' 혹은 'O사모'라는 이름으로 매일 온라인, 오프라인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갖은 폭력을 즐기는 일부 정치인 팬클럽 회원들도 보우의 순교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배타적 이념이 가져다준 뼈아픈 결과가 조선 500년사 동안 백성들이 겪었던 모진 시련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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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도와주신 한희규 조천리 노인회장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다음 편에는 '조천마을과 현대사'에 대해 기사를 작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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