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만세운동과 4·3집단 학살... 분노와 슬픔을 품고 살아온 조천리

1919년 3월 1일부터 전개된 만세시위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전국적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전국적 규모의 독립운동인 만큼 제주에서도 만세시위는 펼쳐졌다.

 
▲ 3.1만세 운동을 기념해서 만든 만세동산
ⓒ 장태욱
 
제주의 만세시위는 서울보다 20일 늦은 3월 21일에 시작되었다. 제주도 만세운동은 조천출신 항일운동가 김시학의 아들인 김장환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입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서울 휘문고등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장환은 귀향하자마자 당숙인 김시범과 김시은을 찾아가 거사의 뜻을 설명하였고, 이 세 명이 조천리 미밋동산(지금의 만세동산)에서의 거사를 발의하였다.

그리고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를 규합하였고, 당시 조천에서 명망 높은 유림이었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거사를 위해서 김형배가 대형 태극기 4본을 제작하고 김시범, 백응선 등이 소형 태극기 300여장을 준비하였다.

 
▲ 3.1만세운동기념탑
ⓒ 장태욱
 
이윽고 3월 21일이 되자 조천리 미밋동산에 14인의 동지와 더불어, 조천 마을 주민들과 인근의 신흥, 함덕, 신촌 등지 서당생 150여명이 모여들었다. 14인의 동지 중 김필권은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창호지에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써서 들고 조천주재소 서쪽에서 미밋동산으로 이동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에 시위군중의 규모가 커져서 그 수가 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시위대는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은 다음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시가행진은 미밋동산에서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시내를 향해 진행되다가 출동한 경찰에 부딪쳐 13명이 연행되고 해산되었다.

3월 22일에는 백응선, 박두규, 김필원이 주도하여 200여명이 조천에 모여 전날 연행된 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2차 시위를 펼쳤다. 그리고 3월 23일에는 백응선, 김두배, 이문천이 중심이 되어 3차 시위를 펼쳤는데, 조천에서 시작할 때 100명이었던 시위대는 함덕에 이르러서는 군중들이 가세하여 800명이 되었다.

3월 24일은 조천 장날이었다. 이날 김연배의 주도로 열린 4차 시위에는 1500여명의 군중이 참여,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날 시위에서 만세운동의 주동자 14명 전원을 포함하여 29명이 검거되었다.

 
▲ 비석에 만세운동 당시에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 받은 인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장태욱
 
조천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자들 중 23명에 대해서는 1919년 5월 29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실형이 선고되었는데, 김시범과 김시은에 대해서는 징역 1년 형이 처해지고, 나머지 인사들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형량이 선고되었다. 제주의 항일기운에 놀란 일제가 비교적 유화적인 방식으로 그 통치 전략을 바꿨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천 만세운동의 여파는 곧바로 서귀포로 전해져, 서귀포 삼매봉 만세운동과 서귀포 해상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 제주해녀 항일운동 등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 창렬사
ⓒ 장태욱
 
조천마을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마을의 동쪽 경계에 이르면 만세동산이 나온다. 1919년 3월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을 당시 미밋동산이라 부르던 곳을 지금은 만세동산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 있다. 만세동산은 당시 이 일대에서 전개되었던 독립만세운동과 이 과정에서 시위에 가담해서 탄압을 받았던 인사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만세동산입구에는 '3·1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3·1운동 기념탑' 바로 아래는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실형을 선고받은 23명의 이름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김봉각 선생 공덕비'가 있다. 김봉각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에 성공해서 만세동산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사업비 5억원을 헌납한 장본인이다.

 
▲ 항일기념관
ⓒ 장태욱
 
공원내부에는 애국선열추모탑과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진 창열사라는 위패 봉안실이 있다. 그리고 일제의 폭정과 이에 항거했던 투쟁사를 보여주는 항일기념관이 있는데, 기념관 내부에는 조천만세운동, 해녀 항일운동, 법정사 항일운동 등 제주지역에서 일어났던 항일투쟁들을 디오라마나 매직비전 등을 통해 청소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

 
▲ 항일기념관 안에는 제주의 항일운동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 장태욱
 
항일만세운동이 조천리에서 시작된 배경에는 이 마을에 항일운동을 주도하는 인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들이 해방 이후에는 좌익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제주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남로당제주도당 위원장을 역임했던 안세훈도 조천리 출신이었다. 그리고 4·3의 동화선이 되었던 조천중학원생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도 조천지서에서 발생했다.

조천리는 조천중학원을 중심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해방직후 지역의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에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이 마을에 조천지서와 면사무소가 있어서 무장대의 공격이 잦았고, 우익인사들이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피해를 당한 우익인사들이 어김없이 보복 공격을 감행했는데, 보복 대상은 주로 조천리에서 가족이 없어진 도피자 가족이나 중산간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 조천 파출소, 4.3당시 조천지서였고, 우익인사들의 활동공간이었다.
ⓒ 장태욱
 
1948년 11월 하순 이후 조천면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면서 주민들은 해안마을인 조천과 함덕으로 피난했다. 하지만 중산간 마을의 청년들은 이전 토벌대의 횡포를 겪었기 때문에, 해안으로 내려와도 살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대부분 야산의 동굴등지로 피신했다. 그러한 은신 등으로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빠진 주민들은 도피자가족이란 혐의로 함덕, 조천의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조천리 집단 수용소엔 조천리에 속하면서도 중산간으로 분류되는 양천동, 신앙동, 봉소 등은 물론 이웃마을인 대흘리와 와흘리 등지의 도피자 가족들과 이웃 해변마을인 신촌리, 신흥리의 도피자 가족들도 수용되었다.

 
▲ 도피가족의 집단수용소 터. 당시 수용소로 사용했던 건물은 허물어지고 그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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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곳에선 조천리민이 경찰에 돈을 주어 수용자를 빼내려다 발각되어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수용되었던 중산간 주민 중 젊은이들은 수시로 선별되어 총살당했고, 어린이, 노약자를 포함한 도피자가족 30명이 1949년 1월 13일에, 또 60명이 1949년 2월 1일에 조천지사 앞밭에서 집단 총살을 당했다.

이 마을 어른인 김진주(85) 할아버지와 함께 당시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김 할아버지는 당시 면서기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4·3의 직접적인 화는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진주 할아버지는 "조천 주민들이 너무 영리하고 기가 세서 많은 피해를 당했다"고 말했다.

 
▲ 앞밭. 당시 이 일대 주민 90여 명을 집단 학살했던 장소다. 안내문 하나도 붙어있지 않았다.
ⓒ 장태욱
 
집단 학살이 자행되던 앞밭에 이르자 김 할아버지는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도피자 가족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총살하려 하니 무서워서 아무도 집 밖을 나올 수 없었지. 내가 면 서기 일을 하면서 들은 말인데, 죽일 때도 그냥 총으로 쏴 죽인 게 아냐. 도피자 가족들을 한명씩 세워놓고 여성 민보단원에게 죽창을 주면서 찔러 죽이라고 했지. 아무리 민보단원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몇 차례 찔러도 죽지 않으니 죽는 사람들이 '제발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는 거지. 그러다가 보다 못한 경찰이 마지막으로 총으로 죽이는 식이야."

가끔 오키나와에서도 제주4·3을 연구하기 위해 조천을 방문하는 분들이 있다고 했다.

"오키나와도 피해를 많이 본 모양이야. 근데 그 양반들 조사하는 방식은 참으로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는 조사를 해. 질문하는 것도, 밥은 주로 무슨 반찬에 먹었냐, 그 당시에 목욕은 할 수 있었냐는 것까지 물어보고 조사를 해가거든."

 
▲ 김진주 님이 지팡이를 이용하여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 장태욱
 
우리의 피해조사가 겉치레에 지나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젊은 기자양반이 앞으로 우리 같은 사람들 죽기 전에 육성을 통해서 실감나는 조사를 많이 해야지. 아직도 멀었어."

최근 현대사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국가 권력에 피해를 당한 분들에 대해 많은 위로가 이루어 졌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지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분들은 아직도 충격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노구를 이끌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느라 수고하셨기에 담배라도 한 갑 사드리려 했는데, 김 할아버지는 끝내 사양하면서 "열심히 돌아다녀서 제대로 기록하라"는 말씀만 반복했다.

푯말 하나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상태로 황량하게 남아있는 학살터가 우리의 역사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아직도 멀었다는 김진주 할아버지의 말씀이 괜한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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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에 동행해 주신 김진주 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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