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박경훈 도지사(2) - 인재등용과 식량 전기확보에 전력투구

박경훈 도사는 김문희로부터 도청의 업무를 인수받자 거처를 도사 관사로 옮기고 나서 나름대로 초기 도정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도정의 모든 힘을 쏟았으나 당시 제주사회는 우익과 좌익의 갈등으로 사회는 더욱 혼란으로 빠져 들어갔다.

미군정청은 도청 출범에 이어 제8관구 경찰청 소속의 22구 경찰서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통치업무를 펼쳐 나갔지만 주민들의 자치행정기구인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능가하지 못했으며, 그것을 견제하는 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해 9월22일에 조직된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출발 때부터 온건한 정책으로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우익청년단체(1945년 9월7일에 조직)인 한라단과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보안대 사이에 충돌이 잦아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런데다가 미군정청은 연간 쌀 생산량이 1만4000석에 불과한 제주도에 3000~5000석의 쌀을 공출토록 하여 정부에 대한 도민들의 불만이 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미군정청은 제주도 승격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위해 제주출신으로서 미군정청 정치분석과장으로 있는 홍양명을 제주에 보냈다. 홍양명은 제주도의 도제 실시를 위해서는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합동통신의 유재명, 자유신문의 최영준, 동아일보의 노일환 등을 대동하고 군용기 편으로 제주에 왔다.

이어 그해 3월2일에는 아놀드 미군정장관의 후임으로 부임한 아취·엘·러치 장군이 초도순시차 내도 함으로써 도제 승격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러치 장군은 박 도사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제주도는 참으로 아름답다"면서 도 승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도 승격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는 반면에 사회질서는 점점 악화돼 갔으며, 그해 6월에는 악성 전염병 호열자(콜레라)가 전도에 크게 번지면서 300여명이 죽었고 도 승격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던 김홍석도 이 병으로 죽었다.

미군정청, 이웃도서를 포함한 제주도(島)를 도(道)로 승격

박경훈 도사는 6월 하순 제주도(濟州島)를 제주도(濟州道)로 승격한다는 내용의 미군정법령을 받았다. 영문으로 된 미군정법령은 '제주도의 이웃 도서를 포함하여 제주를 도(道)로 승격한다'는 것이었다.

박 도사는 '제주도의 이웃 도서'가 진도와 완도를 포함한 것인지를 몰라 총무과장 오병학을 중앙청에 자세히 문의하도록 했다. 며칠 후에 도착한 한글번역의 군정법령에는 '이웃도서를 포함한다'는 부분은 완전히 빠져 있었다. 도 승격을 정식으로 알리는 '도제실시 통고문'이 내려온 것은 7월이었다.

통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본토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 풍토가 판이하여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가 독자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자치제를 진정해온 도민의 건의가 타당하다고 인정하여 군정장관의 직권으로 도 승격을 허가한다."

제주도의 도제실시는 1915년 제주군이 폐지되어 제주도(濟州島)로서 전라남도 관할의 도제(島制)가 된 후 31년만의 일이었다. 이것은 실로 제주도의 큰 전환점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濟州島는 濟州面에 도청(島廳)을 두어 도사로 하여금 도 전체의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경찰업무를 같이 관장하도록 했다.

당시 도제(島制)가 실시됐던 곳은 제주도와 울릉도 두 곳 뿐이었다.
모두 6조로된 미군정법령 제94호는 제주도를 전라남도의 관할에서 분리하며(제1조), 道로서의 모든 권한과 직무 직능 및 직제를 구성한 뒤 도명을 濟州道로 하며(제2조), 제주도는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으로 구성하여 1읍12면을 관할하며(제4조, 제5조), 이를 1946년 8월1일부터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도청의 기구로서는 총무국, 산업국, 보건후생국 등 3개국을 두고 총무국 밑에는 서무·인사·재무·회계·소방과, 산업국에는 농무·축정·산림·상공·수산과, 보건후생국에는 보건·후생과를 각각 설치했다.

도제실시 당시 제주도의 인구는 남자 11만4700명, 여자 15만1700명 등 26만6400명이었으며 도본청의 공무원은 83명이었다.

초대 도지사 박경훈....북군수 박명효, 남군수 김영진 발탁 임명

초대 도지사로서는 박경훈 도사가 됐다.
이에 앞서 제주도내 우익에서는 우익진영의 대표적인 인사 박명효를 초대 도지사로 추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제 실시와 더불어 초대 도지사로 기용된 박경훈은 박우상을 비롯한 지역유지들을 일일이 찾아 앞으로 도정과 사회질서 유지에 많은 지원과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도제 실시의 막중한 책임을 떠맡은 박 지사는 인재를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도청 기구가 비록 3국12과에 불과했지만 행정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어 도청 간부는 물론이며 북제주군수와 남제주군수, 각 읍면장을 임명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북제주군수에는 우익 대표인사인 박명효를 임명하고 남제주군수에는 광주농업학교를 나와 전라남도 산업기수로 있는 김영진을 발탁했다. 산업국장에는 전라남도 장성군 내무과장으로 있던 임관호가, 총무국장에는 전 제주서장 김두현을 발령했다.

과장급에서는 도제 당시에 총무과장을 지낸 오병학을 지방과장으로, 산업과장이던 이홍림은 그대로 산업과장으로 임명했다. 또 전라남도에 근무하고 있는 이인구가 상공·수산·노동과장으로, 안덕면 사계리 출신으로서 목포상고를 졸업하여 목포시청에 있던 강산염이 회계과장으로, 송정호가 학무과장으로 기용됐다.

박 지사는 이어 보건후생국장에는 자신의 친동생 영훈을 발령했다. 박 지사의 4형제 가운데 둘째인 영훈은 경성 제1고보를 박 지사와 함께 형제가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다 해서 제주사회에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의학을 전공한 후 경성제대 교수로 있다가 2차대전 막바지에 귀향하여 제주에서 '박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경성제대 출신의 의사였다.

박 지사의 형제 중 셋째인 태훈은 경성고등상업학교를 나와 은행에 있다가 해방직전에는 광주 식량영단의 책임자로 있었으며, 넷째 충훈은 경성 제1고보를 마치고 일본 경도에 유학, 동지사 상고를 졸업하고 잠시 제주농업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전라남도 지방서기로 재직하는 등 박 지사의 집안은 제주도의 명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1946년 8월1일 제주도청 개청식 열려

박 지사는 이밖에도 제주출신 인재들을 기용하기 위해 전라남도를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 수소문하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위직 직원은 소속 관청의 동의를 얻어 차출해왔으나 국장급 이상 고위직 간부는 미군정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1946년 8월1일 역사적인 도청 개청식이 열렸다.
이날 개청식이 열린 도청 회의실에는 스타우드 미군정장관과 도·군청 직원, 주민 등이 참석하여 도 승격을 축하했다.

박 지사는 인사말을 통해 "오늘의 도제 실시는 30만 제주도민의 노력에 의한 결과이며, 제주발전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고 말하고 "오랫동안 전 도민의 숙원이었던 도 승격이 실현된 만큼 주민복리와 치안확립에 모두가 힘을 합쳐 나가자."고 당부했다.

도청 청사는 옛 제주경찰서가 도청을 그대로 사용했고 북제주군청은 마땅한 건물이 없어서 관덕정을 판자로 막아 임시 개청했다.

군량미 공출로 심각한 식량난....절간고구마로 식량 대용

박 지사는 도정방침을 '행정체제확립'으로 정하고 민생수습과 도민안정에 역점을 뒀다. 박 지사는 우선 부족한 식량난부터 해결해나가기로 했다. 당시 제주지역의 식량난은 심각하다 못해 다음 해에 파종할 종자마저 구하기가 어려웠던 데다 도민들이 생산한 쌀 상당량이 군량미로 공출되는 바람에 '식량증산정책'은 구호로만 그칠 뿐 주민들에게 전혀 먹혀들지가 않았다.

박 지사는 생각 끝에 산지항에 있는 제주주정공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정용 절간고구마를 풀어 도민들이 다음 수확 때까지 만이라도 임시 연명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박 지사는 산업과장 이홍림을 지사실로 불렀다. 제주주정공장은 일제시대 때에 동양척식주식회사라 하여 고구마를 이용하여 술의 원료인 주정을 만들었던 곳이었다. 주정공장의 사장은 이종렬이었으며, 지배인은 강재량이었다.

이 과장은 강 지배인을 만나 제주지역의 심각한 식량난을 설명하고 도지사의 뜻을 전달했다. 강 지배인은 자신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이종렬 사장에게 보고하여 알려준다고 했다. 사흘 후 제주주정공장의 절간고구마가 주민들의 식량 대용으로 배급됐다.

그러나 극심한 식량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박 지사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이홍림 과장을 도제실시 전에 상급관청이었던 전라남도에 보내어 고구마 종자를 구해오도록 했다. 그것은 거의 구걸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박 지사는 그러면서 양곡비축을 위해 쌀을 내놓는 사람에게는 일정한 보상을 하는 등 나름대로 양곡비축에 모든 행정력을 기울였다.

밤9시면 전기 끊겨 일반인 통행 완전 제한

식량사정과 함께 도민들에게 절실한 문제는 전기였다.
당시 제주도내에 공급되고 있는 전기는 1000여kw에 불과해 특수기관이나 관공서에만 특선이라 하여 낮과 밤에 송전됐으나 일반가정에는 밤 9시만 되면 전기가 끊겼다. 때문에 야간통행금지라 하여 밤 9시 이후에는 일반인의 통행이 완전 제한됐다.

그때 제주지역에 대한 전기공급은 지금과 같이 한국전력에서 송전하는 것이 아니라 1937년에 설립된 남선 전기주식회사 목포지점의 제주영업소에서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이인구 상공과장은 제주주정공장에 있는 450kw의 자가발전기를 이용하면 일부나마 주야송전이 가능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박 지사를 만나 건의하자 박 지사는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전기는 기름이 있어야만 가능한 만큼 남선측과 잘 협의해보라"고 지시했다.

이 과장은 우선 남선전기 제주영업소장인 양부창을 찾아가 주정공장의 자가발전기를 끌어 쓰면 주야송전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양 소장은 "제주시내만이라면 주야송전이 가능하지만 한달에 경유 100드럼이 필요한데 남선으로서는 기름살 돈이 없어 곤란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과장은 이같은 사실을 박 지사에게 보고하고 주민들에게 배급되고 있는 기름에서 일정액을 징수하여 전기공급을 위한 비용으로 충당하겠다고 말했다. 주민들로부터 1드럼당 200원씩 징수한 돈은 한달에 5만~6만원이 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7년 1월1일부터는 주야송전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날 제주시내 후생식당(지금의 나사로의원 자리)에는 박 지사를 비롯해서 각급 기관단체장들이 참석한 조촐한 기념식이 있었는데, 특히 야간비상근무를 하고 있는 검찰과 법원, 경찰 등에서는 제한송전의 불편을 덜어준 도청에 고맙다는 치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박 지사는 이어 제주시 지역에만 제한되고 있는 송전시설을 동쪽으로는 성산포, 서쪽으로는 모슬포까지 연장시켰다.

제주도는 또 일본이 어승생에 수력발전소를 설치하려 했던 사실을 입수하고 부족한 전기사정을 어승생에서 얻어낼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당시 일본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어승생수력발전소건설계획 설계도가 상공부에 보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인구 과장을 서울로 보냈다.

이 과장은 남선전기 업무부장을 만나 어승생에 대한 수력발전소 설치 가능성이 있다는 대답을 듣고 나기호 상공부차관을 방문하여 제주지역의 전기사정을 자세히 설명한 후 어승생 수력발전소설치계획을 건의했다.

1947년 3월1일 남선전기 국장과 업무부장, 이인구 과장 등 세 사람은 남선전기제주영업소의 트럭을 타고 어승생악으로 향했다. 어승생악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눈이 쌓여 걷기에 상당히 불편했으나 수력발전소 설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하고 오후에 하산했다.

그러나 어승생수력발전소 설치계획은 이날 도내 모든 행정기관의 파업사태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저수지로 개발됐다)

한라산 케이블카 박 지사 때부터 구상....사업비 부족으로 중도 하차

제주도는 이와 함께 1935년에 조직됐다가 해산된 제주상공회를 부활시켜 제주상공업의 활성화를 기하는 한편 제주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을 일본과 육지에 내다파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하고 먼저 제주상공회의소를 설립하기로 했다.

박경훈 지사와 이인구 상공과장은 도내 상공인들을 지사실로 초청, 취지를 설명하고 일제 때와는 다른 형태의 상공인들의 조직을 구성하기로 결정하면서 제주에서 생산된 상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상공장려관을 설치하기로 했다.(박 지사의 이같은 계획은 3.1사건에 따른 지사경질 등으로 이뤄지지 못했다가 제2대 유해진 지사때인 1947년 6월1일에야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초대 회장에는 김석호가 선출됐고 상공장려관장에는 좌성은이가 맡았다)

박 지사는 이밖에도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일본의 후지산에 설치되고 있는 케이블카를 한라산에 설치한다는 계획을 세워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했으나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져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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