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아이들이 영그는 시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아이들은 땅 빛이 물든 가무잡잡한 얼굴로 돌아왔다.

방학을 며칠 앞두고 화상을 입어 다리를 칭칭 동여맸던 원이는 말끔히 새살이 올라 있었다. 급식실 문에 발이 찍혀 심하게 절뚝대던 헌이는 급기야 엄지발톱을 뽑고 돌아왔다.

개학 기념으로 머리를 자른 실이는 반곱슬 머리가 앙상하게 일어서면서 나일론 빗자루 머리가 되어 한참 웃었더니, 다음날 바로 스트레이트 퍼머를 하고 나타났다.

7월 한 달 내내 끊어진 실내화를 비닐 테이프로 얽어매고 다니던 훈이는 개학해서도 그 실내화를 그대로 발에 끼어 끌다가, ‘PC방 갈 돈은 있어도 실내화 살 돈은 없다.’는 친구들의 핀잔을 바가지로 듣고서야 다음날 새 실내화를 들고 나타났다.

어머니를 만나러 일본에 다녀온 범이와, 며칠 동안 친지가 사는 부산에 다녀왔다는 연이를 빼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마을을 벗어난 일이 없다.

학원에 다닌 몇 학생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독서를 하고, 마늘 심기나 농사일, 집안일을 돕고, 수시로 자구내와 엉알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고, 낚시를 하고, 어쩌다 제주시에 가서 영화 한 편 보고 돌아오는 일상을 보냈다.  

“특별한 일요? 없었어요.”

“그냥 잘 지냈어요.”

“언제나 똑같죠, 뭐.”

“심심했어요.”
 
물질적 풍요의 혜택을 누리며 방학은 어디론가 떠났다 와야 하는 줄 아는 도시 아이들과 비교하면 느슨하고 평화로우면서 한편, 아리다.
 
한동안 교탁에는 방학과제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과제물이 어느 정도 모여질 때까지 당분간은 이 상태가 유지된다.
 
“어제부터 방학숙제 시작했어요.”
 
한 달 치 일기를 한꺼번에 썼던 우리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태반의 아이들은 개학이 되어야 눈치를 봐가며 숙제를 시작한다. 대부분의 과제가 수행평가에 반영되기 때문에 그나마 해결하려고 안간힘 써주니 다행이다.

하지만 대여섯 명의 아이들은 그저 태연히 앉아 있다. 서너 명은 아예 의욕을 잃은 아이들이고, 두세 명은 눈치를 보는 영악한 치들이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제출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며, 적당히 시늉만 내면 만점 처리해 준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늑장을 부려보는 것이다.

왜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거냐고 물으면 그 대답이 암팡지다.
 
“글쎄요. 가족신문을 만들어야 하는데요. 4절지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중이긴 한데, 쉽지 않네요.”
 
이쯤 되면 막 숙제를 시작했다는 아이들은 양심적이고 고맙게까지 여겨진다.
 
농어촌지역 우선지원사업으로 올해 각 교실마다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막바지 더위의 고통 없이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원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나 아이들이나 한 달의 흐트러짐을 곧추세우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새 한 뼘은 웃자란 아이들은 방만해진 몸을 주체하지 못해 마냥 쏟아지는 잠과 싸워야 한다.

스르르 감겨드는 아이들의 눈꺼풀을 볼 때마다 ‘선풍기 몇 대로, 소음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도시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정신 차리라.’고 하나마나한, 의미 없는 윽박을 질러본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아이들은 에어컨과 일심동체가 되어 살아가고, 선생님의 잔소리는 갈수록 늘어만 간다.

문을 꽁꽁 닫은 채, 등교하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하루에 두세 번 문 열고 환기시켜라.’, 체육시간에 땀에 흠뻑 젖은 아이들에게 ‘시큼한 냄새가 진동한다. 땀 잘 씻어라’, 실내온도를 18℃로 해놓고 담요를 두르고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온도 좀 올려라. 1도 올리면 연간 180억 절약된다더라.’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어정쩡한 계절의 틈새에서 소리 없이 아이들은 영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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