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19)] 개표방송 사고로 총선 구도를 바꿨던 견월악중계소
방송국의 송신탑들이 설치되어 있는 견월악은 1988년 4월 26일 있었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하여 되돌릴 수 없는 해프닝을 일으켰고, 그로인해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지는데 일조했던 곳이다.
시스템을 설치한 제주문화방송은 방송 실무자 회의와 교육 등을 통해 개표방송 준비를 마치고 투표 전날인 1988년 4월 25일 오후 4시 30분부터 제주도내 3개 선거구의 입후보자별 가상 득표수를 전산 입력시켜 투·개표 방송 리허설에 들어갔다.
당시 송출된 (시험)개표방송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제주지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 상황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 먼저 제주시 지역에서는 이 시간 현재 개표가 완료돼 민정당의 현경대 후보가 3만 8천 245표를 얻어 득표율 39.9%로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무소속의 고세진 후보는 2만 8천 739표로 30%, 민주당의 김성범 후보 1만 4천 367표로 15%, 평민당의 강종호 후보 9천 573표로 10%, 공화당의 신두완 후보 4천 764표로 5%의 득표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후 제주문화방송의 자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4월 25일 개표방송 연습에 앞서 오후 4시 55분쯤 TV기술부장이 견월악 TV송신소에 연습방송중임을 알리고 연주소에서 송출하는 신호를 대외로 송출시키지 말아주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송신소에서 방송이 차단되지 않아 시험방송 내용이 송출된 것이라고 했다.
밤 11시쯤 시위군중은 1000여명으로 불어났고 제주시 선거구 후보자 김성범(민주당), 강종호(평민당), 신두완(공화당), 고세진(무소속)씨와 북제주군 선거구 이양화(평민당) 서귀포시·남제주군 선거구 김홍수(평민당)씨가 시위에 가담했다.
제주문화방송은 방송사고가 발생하자 사과방송을 통해 내용을 설명했고, 방송 사고 경위와 사고 발생에 따른 문책인사가 이어졌다는 내용과 검찰의 수사 착수 내용 등을 보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야당과 재야 단체에서는 '컴퓨터 조작에 의한 부정선거 자행'이라는 정치적인 선전을 확산시켜 전국적으로 소요가 일어났다.
검찰은 당시 평민당 제주시지구당 이영훈 홍보부장의 전화고발(88년 4월 25일 오후 6시20분)에 의해 조사에 착수했고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혐의로 10명을 입건했다. 당시 사건에 대해 수사를 마친 제주지방검찰청은 그해 7월 13일 '연습 방송 과정에서의 기술적 확인내지 진행상의 소홀로 야기된 오방사고임이 명백하므로 각 피의자들에 대한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의 점은 모두 혐의 없다'고 발표했다.
자체 조사한 결과 기술상의 단순사고로 확인됐음에도 문화방송은 내부적으로 대규모 문책 조치를 했다.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뀐 최초의 선거였다. 게다가 13대 대통령선거 체제로 치러진 선거였기에 민정당, 평민당, 통일민주당, 공화당 등 4당이 치열하게 접전을 펼쳐 수도권에서 평균 경쟁률이 6.1대 1에 이르렀다.
훗날 민정당 중진 의원이었던 한 인사의 회고에 따르면 선거운동 초반에는 수도권에서 막대기만 꽂아도 여당 인사가 당선될 것이라고 선거 판세를 낙관했다고 했다. 야권의 분열과 대선승리의 여세에 따른 전망이었다.
하지만 총선 막판에 여당에 대한 견제심리가 발동했고, '대선에서 컴퓨터를 동원한 대규모 개표조작이 있었다'는 야권의 주장이 제주에서의 방송사고를 통해 유권자들로부터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민정당 후보들은 대거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제주에서 당선이 유력했던 민정당 후보 3인이 낙선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권 민정당은 전국적으로 38.8%에 해당하는 87명만을 당선시키는데 만족해야했다. 거기에 전국구 의원 38명을 배정받아 전체 299석 중 125석으로 제1당의 지위는 지켰으나 과반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평화민주당이 70석을 차지하여 제1야당이 되었고, 통일민주당이 59석을 차지하여 제2야당이 되었다. 이리하여 제13대 국회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국회가 만들어졌다.
물론 여러 가지 오해와 해프닝이 빚어낸 여소야대 국회는 당초 시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당시 방송사고의 도움을 받아 당선된 제주의 야권(무소속2인, 통일민주당 1인)후보 중 무소속 2인은 민정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의 공천으로 당선된 인사도 결국 90년 3당 야합 때 YS와 같은 배를 타고 보수대연합의 대열에 합류했다. 여소야대 민주국회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보수대연합으로 탄생한 거대여권은 곧바로 공안정국을 형성하여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그리고 16년 후 17대 국회에서는 탄핵역풍에 의해 다시 일시적으로나마 민주세력이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 의회구도가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운 좋게 금배지를 단 정치권 인사들은 제도개혁은 고사하고 대연정이나 한미FTA 등을 의제로 끊임없이 수구보수대연합의 길을 모색해왔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