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엄마의 '옥의 티'

거실에 신문과 함께 뒹구는 책이 있다. 한 달 내내 뒹굴다가 폐휴지가 되면 똑 같이 생긴 놈이 또 나타난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게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은지라 나 역시도 무심히 방치한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할 때만은 예외다. 눈에 쉽게 띄지 않은 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치부를 감추듯 숨긴다. 그러다가 어느새 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끌어낸 모양이다.

지난 해였다. 중학생이 된 아들이 봉사활동을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하는 봉사라 덜 힘든 곳으로 찾은 곳이 우편집중국이다. 노는 토요일에 친구들과 몇이서 봉사를 나갔던 아들이 세시간만에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아들, 무슨 일 했어. 우편물 분리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큰일이다 몇 번은 더해야 되는데.”

아들이 벼루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을 한다.

“엄마.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우편물도 우편물 나름이죠. 책을 분리하는데 팔이 아파 죽는 줄 알았다구요. 아니 무슨 홈쇼핑 카탈로그를 받아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엄마도 앞으로 보지 마세요.”

특정회사의 홈쇼핑 카탈로그가 제주도로 들어오는 날이었나 보다. 하긴 어딜 가나 홈쇼핑 책자가 눈에 뜨인다. 더구나 홈쇼핑 회사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보니 더 흔해빠진 것은 분명하다. 나 역시도 고정적으로 배달되는 카탈로그가 2개씩이나 된다. 물 스며들 듯 들어오는지라 거절할 틈이 없었다.

몇 년째 꾸준히 보내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다. 한달에 한 번도 물건 구입 안 할 때가 많은데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받아서 몇 번 뒤적이고 눈요기도 하다가 재활용 종이쓰레기와 같은 운명이 된다. 길어야 수명이 한달이다. 신문의 수명이 하루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니 부담스러운 것은 없다. 때로는 미안해서 보내지 말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두었다. 공짜니까 어떠랴 싶어서였다.

그런 뻔한 이유 때문인지 홈쇼핑 카탈로그가 베스트셀러가 될 판이다. 조그마한 시골에서부터 시작해서 안 들어가는 곳이 없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평생 양서가 될 만한 책 한 권 구입해서 읽어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여기에 푹 빠졌다. 당연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하다. 물론 배달되어진 채로 버려지는 책들도 많을 것이다. 귀중한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

하지만 백화점이라고는 건물조차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대혁명이다. 온갖 물건이 다 구비되어 있으니 뭐든지 전화 한통화면 해결된다. 거기다 마음에 안 들면 환불, 반품 처리가 정확히 되니 신경 쓸 일이 없다. 이것도 보면 엄연히 디지털 시대의 혜택이다.

이렇게라도 해서 편히 돈 써보겠다는 사람들을 말릴 이유는 없다. 단지 국민독서량이 최하위 수준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씁쓸하다. 물론 홈쇼핑 카탈로그에도 도서가 들어있다. 그러나 전집이나 아동용 도서가 대분이다. 그것도 차례가 거의 마지막이다. 덤으로 하나 끼워주는 상품에 베스트셀러 한 권 더 얹어주는 아이디어는 왜 나오지 않는 것일까. 화장품 세트에 줄줄이 딸려오는 샘플들을 조그마한 시집 한 권으로 대체하면 그 회사의 이미지가 흐려지기라도 하는 걸까. 1년에 한번쯤은 ‘책 읽는 주부들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뜻있는 행사를 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잘 나가는 기업의 1%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카탈로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물건을 많이 팔기위한 기업의 주목적을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다. 기회를 만들어서 단행본 책도 할인해서 팔아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내 생각은 현실성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주부가 기업의 경영 논리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무심코 스쳐가는 생각을 잡아 보았을 뿐이다.

카탈로그가 도착하면 습관적으로 펴본다. 그 다음은 딸이다. 가끔씩 남편이 보긴 하지만 흔하지 않는 일이다. 이럴 때마다 아들이 한마디 한다.

“엄마, 또 홈쇼핑 책자 보는 거예요. 아직도......”

“얘는 전 국민의 베스트셀러인데 안보면 되겠니. 너도 봐 볼래.”

순간을 능청스럽게 모면하지만 사실은 좀 체면이 구긴다. 지구상에 남겨진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모독하는 말이다. 내심으로는 뭔가 다른 엄마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자부하는데 이렇게 언행일치가 안 된다.

며칠 손때를 묻히다가 보지도 않는 책이 한달내내 거실에 뒹군다. 중독까지는 아니지만 만만하게 즐기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쳐질까. 이제는 눈치를 본다. 입이 닳도록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겠다 싶어서다.

그래도 나름대로 책을 꽤 많이 읽는 엄마인데 옥에 티로 남겨지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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