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20)] 돌담과 초가, 그리고 연못이 어울어진 마을

▲ 마을 입구 하가리 마을 입구임을 알리는 표석. 뒤에 보이는 오름이 고내봉이다. ⓒ 장태욱
제주시내에서 일주도로(12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20km쯤 차를 몰면 길 왼쪽에서 애월읍 고내리 마을에 있는 고내봉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고내봉에 채 이르기 전에 하가리(下加里) 마을 입구임을 알리는 표석 앞에서 좌회전하여 길을 따라가면 하가리에 이를 수 있다.

하가리에는 고려시대부터 화전민이 모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이곳에 현씨, 차씨, 주씨가 모여 살게 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조 태종 18년(1418) 판관 하담 목사가 재임하던 시절 지리적 조건과 인구증가로 인해 고내봉을 가운데 두고 그 북쪽은 고내리로 그대로 두고, 남쪽을 고내리로부터 분리하여 가락리(加樂里)라 불렀다.

이곳을 '더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더할 가' 자의 '더' 자와 '즐거울 락'자 의 '락' 자가 합하여 우리말로 '더락'으로 부르다가 음운의 변천과정에서 '더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연화못 팔각정이 복원되고 관찰로가 설치되어 생태학습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3700여 평의 넓이를 자랑하며 제주 제일의 봉천수라 일컬어지는 '연하지'라는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연꽃 개구리밥 부레옥잠 용버들 등의 수중식물들과 물뱀 소금쟁이 흰뺨검둥오리 등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지금은 이곳이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팔각정이 복원되어 있고, 관찰로가 새로 설치되어있다. 아이들의 자연학습장과 사진동호회원들의 활동공간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 농부들 밭에서 마을 주민들이 가을 채소를 심고 있었다. ⓒ 장태욱
마을에 이르는 길목에서 마을 아낙네들이 가을 파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감귤 마늘 양배추 등을 재배하는 농민인지라 마을은 농업을 제외하고는 수입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고려시대 이후로 주민들이 줄곧 농업에만 종사해온 마을인지라 농산품의 품질은 애월읍의 어느 마을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주민과 중산간도로 지나는 여행객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는 곳 '오당빌레'

▲ 오당빌레 쉼터 중산간도로에 인접하고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좋은 쉼터가 된다.
이 마을의 북쪽은 일주도로(12번 국도)와 접하고 남쪽은 중산간도로(16번 국도)와 접한다. 이 중산간 도로와 만나는 곳에는 '오당빌레'라는 공원이 있는데 이곳은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중산간도로를 지나는 여행객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는 곳이다.

▲ 할망당 최근에도 당제를 지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 장태욱
'오당빌레'에 인접한 북쪽에는 '할망당'이 있다. 오래된 고목이 그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는데, 할망당에는 최근에도 주민들이 이곳에서 당제를 지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과거 제주에는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신당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마을마다 본향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 제주사람들은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주신인 백주할망의 자식들이 제주의 각 마을마다 유명한 당신들로 좌정하고 있다가 백주할망의 조종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 돌담길 하가리 마을에서는 과거 제주의 농촌의 돌담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골목 끝에서 어릴 적 친구가 손을 흔들며 달려올 것 같았다. ⓒ 장태욱
하가리는 마을 어디를 가나 제주의 돌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이 돌담길을 따라 마을 안쪽에 이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 년 뒤로 시간 여행을 온 것처럼 과거 제주의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 내가 어릴 적에 지나가는 차를 걱정하지 않고 안심하며 뛰어 놀았던 그 시골 골목길이 하가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골목을 따라가면 오래된 팽나무가 행인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고, 긴 올래(길에서 마당에 이르는 진입로)가 뉘 댁인지 모르지만 한번 방문해보고 싶다는 유혹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는 내가 민속이라 여기는 것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 말방아간 연자매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 장태욱
하가리 마을에 잣동네라는 곳에 이르면 민속자료로 보존되어 있는 '잣동네 말방아'를 볼 수 있다. 제주도에는 마을마다 평균 30가구에 1기씩 '말방아' 혹은 '말방에'라 부르는 연자매가 있었다. 연자매는 제주 고유의 가옥형태에 따라 지붕은 띠로 이고, 둘레는 돌담을 쌓아 뱅 둘러친 연자매간(말방에집, 말가레집) 안에 설치되어 이용되었다. 제주도의 재래적인 주곡은 조와 보리 및 잡곡이었는데, 이를 장만하는 데 연자매가 이용되었다.

연자마의 구조는 알돌(바닥돌)과 웃돌(맷돌)이 주축을 이룬다. 판판하고 둥근 커다란 석판이 알돌이며 알돌 위를 구르는 둥근 돌이 웃돌이다. 알돌은 땅바닥에 고인 기초석 위에 얹혀지며, 알돌의 중심부에 박힌 중수리를 중심으로 마소나 인력을 이용하여 웃돌을 돌렸다.

17세기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41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던 조선의 왕족 이건(李健)은 제주 유배도 중 '제주풍토사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제주풍토사기에는 방아 찧는 제주 여인들에 대해 '여인들이 방아를 찧을 때는 군취하고 힘을 합하여 절구공이 노래를 제창하면서 찧으므로 경각에 두어 휘의 곡식을 능히 장만할 수 있으나, 그 노래 소리가 슬프고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일을 해야 살 수 있었던 제주의 여인들은 그 소리가 '슬프고도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노동요를 부르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뎠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제주의 전통 초가 돌담길과 함께 제주의 전통 초가가 그대로 남아있다. ⓒ 장태욱
잣동네에는 말방아와 더불어 제주의 전통 초가가 보존되어 있다. 이 집은 '안거리'와 '밖거리' 로 이루어진 '두거리집'이다. 거기에 가축이 기거하는 목거리가 부속으로 갖춰져 있다. 안거리에는 주로 어른이 살고, 밖거리에는 결혼한 자녀가 살았던 것이 보통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가난했던 우리 가족이 남의 집 '밖거리'에 세 들어 살았었다.

이 마을에 남아있는 초가는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주위 벽은 현무암으로 쌓아 두르고 흙을 발라 붙여 만든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초가의 벽이 토담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바람과 돌이 많았던 제주에서는 토담 대신에 돌담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붕은 띠풀로 덮고 그 위에 띠풀을 꼬아서 만든 밧줄로 바둑판처럼 단단히 동여매었다.

그런데 1520년 제주에 유배된 충암 김정(金淨)은 금강사 옛 절터에서 제주풍토록을 기술하였는데, 김정의 풍토록에는 1500년대 당시 제주의 가옥에 대한 설명이 남아있다.

'사람의 주거는 모두 띠로 엮어 덮은 것이 아니라 지붕에 나란히 펴서 쌓고 긴 나무로 가로 눌러 맺는다. 기와집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품관인의 집 이외에는 온돌이 아닌데,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돌로 메우고, 그 위에 흙으로 발라서 온돌 모양처럼 하고 말린 후에 그 위에 잔다.'
 
이 풍토록에 의하면 16세기 제주인들은 이 초가집보다 훨씬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태풍 피해 복구되면 주민들 지혜 모아 자연 문화유산 잘 활용될 수 있게 됐으면...

하가리에는 현재 165가구에 41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마을이다 보니 전국의 대부분의 농촌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인구는 감소하여 초등학교는 분교(애월초등학교 더럭분교)로 된 지 오래고, 남아있는 주민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인접한 고내리는 해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지만 하가리는 농외 소득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 고재형 이장 하가리 고재형 이장 ⓒ 장태욱
하가리 고재형(60년생) 이장을 만났다. 고 이장은 활기를 잃어가는 마을 상황을 가장 우려했다.

"제가 더럭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생 수가 380명 정도로 마을에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더니 분교가 되고 이제 남은 주민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민박 사업에 도전해보는 가구들이 몇 있었는데 그 또한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가리는 연화못이라는 좋은 볼거리가 있고, 다른 농촌마을에 비해 전통 민속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이를 농가소득과 연계해볼 생각은 없는지 궁금했지만 대자본이 투자된 관광지들과 경쟁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장 일을 금년에야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무슨 사업계획을 세우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번 태풍 나리에 피해를 본 농가들이 많기 때문에 피해복구를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금번 태풍 '나리'에서와 같이 큰 패해를 가져오는 재해가 앞으로 더 자주 발생할 것 같습니다. 주민 대부분이 농민이기 때문에 재해를 예방하는 일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정말 태풍 나리가 제주도 구석구석에 생채기를 남겨서 피해복구에 정신이 없는데, 농촌 마을 이장에게 마을의 장기 계획을 묻는 것도 염치없는 행동이라 생각하며 돌아왔다. 태풍 피해가 복구되고 나면 주민들이 지혜를 모아 마을의 훌륭한 자연 문화유산이 잘 활용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편에는 연화못에 관해 기사를 작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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