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냄새, 저 소리...내가 그리워하던 그 곳
저 냄새, 저 소리...내가 그리워하던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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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걷다 ①] 성산포 바다를 늦은 밤까지 바라보다

   
 
▲ 하도바다 고향에 온 듯한 느낌, 검은 바위들이 제주임을 실감나게 한다.  ⓒ 김민수  하도 
   

2007년 9월 29일 토요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제주, 버스터미널에서 접이우산을 하나 사들고는 일주도로를 운행하는 시외버스를 탔다. 종달리까지 요금은 3천원, 지난 밤 설렘으로 피곤했던 탓인지 태풍 루사로 인한 상처의 흔적들을 눈으로 더듬으며 안타까워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조천을 지나 만장굴 들어가는 길에 버스가 서자 만장굴 여행을 마친 듯한 청년이 버스에 올라탄다. 내 옆에 앉아 수첩을 꺼내더니만 '성산포까지 얼마에요?'라고 쓴다. 버스기사에게 물으니 천원이란다. 나는 수첩에 '1000원이래요'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성산포에 가요?'라고 적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세화, 하도를 지나 창흥동에서 내렸다. 도보 여행을 하는 청년에게 잘가라고 손짓을 하고는 버스기사에게 "아저씨, 저 분 성산포에서 내려주세요"했다.

종달리를 한 정거장 남겨두고 창흥동에서 내린 이유는 하도바닷가에서 시작해 종달리 해안도로를 온전히 걷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오랜 걸린다. 이전에 차로 다닐 때에는 참 가깝게 느껴지던 거리였는데 생각보다 멀다.

   
 
▲ 하도철새도래지에서 바라본 지미봉 하도철새지에서 바라보는 지미봉은 또 하나의 섬같다.  ⓒ 김민수  지미봉

 하도철새도래지 너머로 지미봉이 눈에 들어온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멈추었지만 잔뜩 구름이 낀데다 바람이 분다. '원래, 제주가 이런 걸 뭐' 스스로 위로를 하며 걷고 또 걷는다. 오랜만에 제주의 바람과 바람이 다른 자연들과 만들어 내는 소리들을 들으니 비로소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하도철새도래지의 끝자락에 서자 바다냄새가 난다.

'그래, 저 냄새, 저 소리....내가 그리워하던 그 곳이었지.'

하도바닷가의 검은 화산석과 자글자글한 모래, 밀려오는 파도. 그들을 보는 순간 그 바다에서 있었던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어디야?"
"응, 하도바닷가. 파도소리 들리니?"
"나도 가고 싶다."
"미안해, 다음엔 꼭 같이 오자."
  

   
 
▲ 말 제주의 상징처럼 되어비린 말, 곳곳에 방목되는 말들이 있다.  ⓒ 김민수  말

하도바닷가와 철새도래지를 경계지어놓은 해안도로를 지나 종달리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말 한 마리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 제주에는 말도 있었지.'

검은 화산석과 청자색 바다와 말, 모두 제주의 빛깔이다.

   
 
▲ 비행기 창으로 바라본 제주 감자와 당근과 마늘로 푸르러야할 들판이 황톳빛이다.  ⓒ 김민수  제주
 
이맘 때 제주의 빛깔은 무엇이었을까? 싹을 올린 마늘과 감자와 당근의 푸른 물결이 들판에 가득하고, 가지런하게 갈아진 밭에 무와 배추가 막 싹을 올리며 희망의 싹을 피어올리는 그런 빛깔이었다. 그러나 비행기차창으로 내다본 제주는 물이 휩쓸고 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황톳빛이었다.

창흥에서 하도바닷가를 향해 걷는 길에서 만난 돌담밭들의 실상은 더욱 더 처참했다. 당근밭이었다는 것을, 감자밭이었다는 것을, 마늘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드문드문 싹을 내고는 드러누워있는 처절한 새싹들의 몸부림만 보일 뿐이었다. 종달리 고망난돌에 이르렀다. 
 

   
 
▲ 종달리 바닷가의 갯쑥부쟁이 제주의 가을은 이제 막 시작된다.  ⓒ 김민수  가을

새벽에 자주 찿곤 했던 종달리 고망난돌, 기대했던 가을꽃들은 갯쑥부쟁이만 조금 피어났고, 해국이나 털머위는 아직 꽃몽우리도 생기질 않았다.  으아리와 갯금불초, 며느리밑씻개가 아직도 그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갓 피어난 갯쑥부쟁이를 보며 '그래, 저 갓 피어난 생채기 하나 없는 저 꽃처럼 다시 일어서길' 기도했다.

바람이 점점 세지고 빗발도 굵어진다. 우산은 무용지물이고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지경이다. 성산포에서 만나기로 했던 지인에게 종달리해안도로 전망대 앞으로 나와달라고 전화를 했다. 

그를 만나 오조리에 있는 '하늘이 내린 풍경'이라는 곳에서 갈치조림을 먹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갈치조림, 밑반찬으로 나온 자리돔젓갈의 비릿한 냄새가 정겹게 느껴지다니 이상한 일이다. 제주에서는 비려서 입에 대지도 않던 자리돔젓갈을 이렇게 맛나게 먹을 수 있다니 신기했다. 저녘을 먹고나니 비가 소강상태를 보인다.

   
 
▲ 성산포의 밤 오조리에서 바라본 성산포의 밤  ⓒ 김민수  성산포
   
홀로 걷고 싶었다. 방을 제공하고 차를 제공하겠다는 지인을 돌려보내고 오조리에서 성산포를 향해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올줄 알았던 이 곳을 찾기까지는 서울에 둥지를 틀고 산 이후 햇수로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참 먼 길이다.

   
 
▲ 성산항의 야경 태풍과 선박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던 성산항  ⓒ 김민수  성산항

성산항 근처에 오자 제주의 바람을 타고 매쾌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그래, 지난 번 나리가 온 이후 성산항에서 큰 불이 났었지.'

배가 가득한 성산항은 오히려 적막했다. 날씨가 좋아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을 했어야 할 배들의 발목이 앵커에 묶여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이는 성산포 언덕배기에 섰다. 바람이 시원하다. 좋지 않은 일기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나간 밤배들의 불빛이 간헐적으로 넘실거린다.

누군가 내게 다가온다. 시외버스에서 만났던 그 청년이다. 그 청년의 손에는 따뜻한 캔 커피가 두 개 들려있었다.

"그래, 방은 잡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캔커피를 내민다.

'참, 청년은 말을 하지 못했지….'

그냥 둘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보였다. 아이들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아빠, 제주도의 밤은 어때? 좋겠다.'

나는 아이들에게 답장을 하고 청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가 내 핸드폰에 자기번호를 찍었다. 나는 서툴게 청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서 왔어요?'
'부산에서요.'

'혼자서?'
'예, 아저씨도 혼자서 오셨어요?'

'예, 커피 고마워요. 방은 잡았어요?'
'예, 아저씨는요?'

'나는 이따가 잡으려구요. 방값이 얼마나 하던가요?'
'3만원이던데요.'

 

▲ 성산포의 밤 숙소에서 바라본 성산포, 저 멀리 동남 야경이 펼쳐진다. ⓒ 김민수  성산포
   
나는 엄지족이 아니라 문자메시지를 보내는데 서툴었고, 청년은 필답이나 문자메시지가 대화의 수단인 듯 자유로웠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힘들게 살아왔던 흔적들, 그 청년은 그림을 그리러 제주에 왔다고 했다. 숙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나를 봤다고 한다. 그냥 외로워보여서 캔커피나 한 잔 나누려고 나왔는데 버스에서 만난 아저씨라니 인연인가 보다고 했다. 그는 성산포에서 며칠 머물며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가까운 가게에 가서 캔맥주를 몇 개 사왔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별 말없이 성산포의 밤바다를 바라보다 그와 헤어졌다. 나이가 드니 만남, 헤어짐에 초연해진다.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겠지 생각하며 명함을 건네려다가 그냥 웃음으로 그를 보냈다.

나지막한 지붕들과 오조리바다, 저 너머 동남의 불빛이 보인다. 내일 아침에는 저 곳을 걸어갈 것이다. 차를 타고 휘휘돌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던 길이 꽤나 멀게만 느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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