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이 나라를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독자 여러분께,

오늘은 칼럼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에세이를 선보입니다.
어렵고 바쁘게 살아가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웬 뜬구름 잡는 얘기냐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간혹 가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현실의 구체적 사실과 사건에 기초한 냉철한 분석과 판단을 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들의 기본적인 정신상태는 어떤가라는 회의(懷疑)를 자주 하게 됩니다.

그저 필자의 정신상태가 제대로인지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인지 확인하시면서,
가볍게 읽으시면 고맙겠습니다.


시대흐름

역사 공부하다 보면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다.
시대 흐름을 읽는 것과 안 읽는 것의 차이다.
또한 시대흐름을 읽는 경우, 쫓기와 앞서가기의 구별이다.

우리는 이를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다.
시대흐름을 읽지 않는 경우는 과거다.
시대흐름을 쫓는 경우는 현재다.
시대흐름을 앞서가는 경우가 미래다.

과거 지향적인 경우,
시대흐름은 읽히지 않는다.
마치 지난날의 체제와 업적이 절대적인 것인양 착각한다.
따라서 시대흐름 자체가 마땅치 못하며,
결국은 시대흐름을 외면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이 사회의 주류라고 생각하는데,
주류는 늘 바뀌기 마련인 것을 모른다.
그러다보니 시대흐름에서 소외되어 간다.

세대는 자꾸 변하고 과거의 젊은이가 기성세대가 되고 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기본이다.
경험과 충고는 필요하지만 강요해서는 안 될 일이다.
따라서 언제까지나 자기의 세계가 중심적일 수는 없다.
개인마다 아래에서 위로, 주변에서 중심으로의 삶이 있다.
그러나 다시 위에서 아래로, 중심에서 변두리로의 삶도 있다.
이를 읽지 못하거나 안 읽으려는 경우,
점점 인간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경우,
시대흐름을 쫓는 것이다.
변하는 것이 순리(順理)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선도(先導)하지는 못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삶은 늘 수동적이다.
더군다나 결정적인 문제는 '시대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사고방식이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한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한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아쉬움만 많이 남을 뿐이다.

한편, 객관적인 시각에서 제대로 된 시대흐름을 쫓아야 하는데,
간혹 엉뚱한 시대흐름에 추종하다 보면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판단하다 보니,
시대흐름을 읽지 못하는 경우와 일맥상통하게 된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미래를 제대로 내다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과거의 국가간 전쟁이 이제는 바뀌고 있다.
민족주의와 종교를 앞세운 단체와 국가간의 테러로 변하고 있다.

6․25 혈맹을 외쳤던 미국이 이제는 우리에게서 멀어져가려 한다.
미국의 국익이 보장되는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중국이 고도성장을 하고, 미국과 유럽의 무역장벽은 더 높아져 간다.

이제 지구상에서 최소한 ‘너는 빨갱이다’라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용어는 필요치 않다.
‘분배와 정의’를 중시 여기느냐, ‘성장과 자유’를 중시 여기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무식하게 땅 파고 건물 짓고 개발하여 돈벌어 잘살아보자는 입장은 옛일이다.
자연친화적이며 공존을 모색하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나아가 지구와 제주도는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돈은 조금 벌어도 어떻게든 잘 지켜 후손에 물려줘야 한다는 사고가 더 설득력을 가진다.

국가보안법이 국가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법은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사회구성원 전체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만든 것일 뿐이다.
면면한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용기 및 민주주의를 향한 결연한 의지 등이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맞물릴 때 국가가 지켜지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체제유지적, 반민주적 악법은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영원하리라고 보고, 거기에만 매달려 나라가 지켜지겠는가.
우리가 상대해야 할 북한이 위협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결국은 우리와 통일을 논해야 하는 한민족이다.
오히려 통일 한국이 향후 중국과 일본, 미국 등을 상대해야 할 것 아닌가.
지구상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것이 냉혹한 국제정세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우리와 보조를 맞추던 중국이
향후 통일 한국의 등장과 연변 소수민족[朝鮮人]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동북공정(東北工程) 작업을 통해 고구려사 왜곡에 나서고 있다.

이것이 세상이다. 언제 어디로 뛸지 모르는 럭비공 같지만
조그만 주의를 기울이면 미래가 보인다.

…………

원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운용 주체는 인간이다.
제도와 규범 또한 인간이 이루어놓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사회 자체는 불완전하면서 역동성을 갖기 마련이다.

간혹 시스템과 체제를 강조하면서 보다 합리적인 운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얼마든지 시대흐름에 따라 바뀌어 간다.
결론은 하나다.

‘모든 것의 주체는 인간이다’

절대적인 것이란 신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역사에서 보면 인류는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보편적 가치를 축적해 왔다.
체제와 시스템 또한 ‘인류 보편적 가치의 확대’라는 명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해 체제와 시스템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늘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결론을 내자. 시대흐름이 과연 뭐냐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첫째는 도덕성이다.
둘째는 휴머니즘이다.
셋째는 정통성[民意]이다.

그러다보니 결국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 추구’에 다름 아닌 것이 시대흐름이다.
누구나 다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바이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되면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근시안적이고
이해관계에 매달리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소극적 정신상태이다.

과감히 깨뜨려서 인내를 갖고 ‘시대흐름’을 읽고 앞서가자.
‘그걸 누가 모르는가?’라고 되묻지 말고, 먼저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자.
타성에 젖다 보면 잠시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 우리네들이다.

다시 한번 ‘도덕성과 휴머니즘과 정통성’에 바탕을 둔 실천적 삶의 자세를 가다듬자.

2004. 9.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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