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 자연을 닮은 아이들, 아이들을 닮은 선생님들

하가리 연화못 인근 남쪽에는 도시 아이들이 마음속에 간직할 만한 작지만 아름다운 학교가 있다. 이 학교 울타리 담벼락에는 아이들이 심고 키우는 조롱박과 콩이 탐스럽게 영글어가고, 정원에는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예쁘게 피어나 자라고 있다.

▲ 더럭분교의 울타리에는 아이들이 심어서 키우는 박, 콩, 나팔꽃 등이 어우러져 자란다. ⓒ장태욱
이 학교 입구에는 학교의 나이를 짐작케 하려는 듯이 이끼가 파랗게 끼어있고, 조그만 글씨로 ‘애월초등학교 더럭분교장’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정문 옆에는 오래된 해송들이 점잖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학교 건물은 행인의 호기심을 끌기에 적당하리만치 아담하다. 게다가 다른 학교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 게 운동장이 파란 잔디로 덮여 있다. 그리고 교실 입구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아이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려는 듯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색이 바랬다. ⓒ장태욱
한없이 평화롭게 보이는 시골 분교지만 이 학교는 4·3사건 와중에 많은 아픔을 경험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학교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하가공민학교로 인가를 받고 설립되었다. 그런데 1948년 11월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서북청년단과 응원경찰이 이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다. 무장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이 학교에 군인들이 머무르는 일도 있었다.

그게 원인이 되었는지 1949년 2월 5일에 이 학교는 무장대의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학교 건물이 전소되고 토벌대는 무장대 공격의 책임을 물어 당시 이 학교의 강순관 교감을 총살했다.

▲ 운동장 운동장에 파랗게 잔디가 깔려있다. 아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려는 듯이 팽나무가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다. ⓒ장태욱
전소된 학교는 1950년 6월에 복구되었고 그후 1954년 6월에 학교 이름이 ‘더럭국민학교’로 바뀌었다.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애월읍 ‘상가리’와 ‘하가리’인데 이 두 마을이 이전에는 ‘더럭리’라는 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두 마을의 인구가 감소하면서 ‘더럭국민학교’는 10여 년 전 ‘애월초등학교 더럭분교’로 바뀌었다.

학교 선생님들의 양해를 구한 후에 학교를 탐방했다.

분교이기 때문에 교장선생님(김영규)은 본교인 애월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이 학교에는 김애자 분교장과 이완구 선생님, 최이순 선생님 등 세 분과 조리사님 주사님 등 총 다섯 분이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운이 좋았는지 학교를 방문한 시간에 영어수업을 진행하는 원어민 선생님도 와 있었다.

내가 방문한 날은 연구수업 예정일이 얼마 안 남은 때여서 선생님들이 손님 맞을 준비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김애자 분교장과 이완국 선생님이 바쁜 와중에도 학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주었다.

▲ 선생님들 이 학교에는 김애자 선생님(왼쪽) 이완구 선생님(가운데) 최이순 선생님(오른쪽) 등 총 세 선생님이 근무하고 있다. ⓒ장태욱
이 학교에는 1학년이 5명, 2학년 3명, 3학년 7명, 4학년 2명, 5학년 7명, 6학년 4명 등 총 28명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었다. 세 분 선생님이 6개 학년을 가르치기 위해 1학년과 5학년을 한 반으로, 2학년과 3학년을 한 반으로, 4학년과 6학년을 한 반으로 묶어서 복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도시의 다른 학교의 아이들과 이 학교 아이들이 두드러지게 다른 면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김애자 선생님은 ‘놀이가 다르고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했다. 놀 수 있는 공간이 넓다보니 도시의 아이들과 달리 흙을 밟고 뛰어노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대체로 건강하다고 했다.

이 학교 잔디 운동장 양 끝에는 축구 골대가 세워져 있다. 아이들 28명 중 여학생이 절반이 넘어 축구를 할 팀이 만들어질지 궁금했는데 재미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남녀 전교생이 모두 모여야한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여학생들도 남학생 못지않게 축구를 잘하게 되고 자신이 빠지면 팀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고 했다.

학생 수가 적다는 점이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다른 여러 면에서도 발견했다. 수학여행을 갈 때도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같이 가게 되고, 가을 운동회를 할 때에도 모든 아이들이 참가하기 때문에 훨씬 재미있는 운동회가 된다고 했다. 그런 활동 속에서 참여의지가 자라고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이런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죄송함을 무릅쓰고 ‘혹시 좌천된 심정으로 근무하시는 것은 아닌지’ 여쭸는데 김애자 선생님이 환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완국 선생님은 이 학교에 온 첫날 ‘바로 이 자리가 내 자리구나’라고 했답니다. 분교는 규모가 큰 학교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근무해야합니다. 교사가 자신의 재량을 발휘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마음만 있으면 아이들에게 참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는 곳이죠. 그런데 반대로 여기서 몇 년 푹 쉬다가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학교는 빛을 잃고 아이들은 망가지는 겁니다. 분교는 관심과 열정만 있으면 교사로서 긍지와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김애자 선생님은 상담에 관심과 재능이 있어서 아이들의 가정형편을 파악하고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랄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완국 선생님은 아이들과 어울리고 활동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다.

최이순 순생님은 올해 처음으로 교사 발령을 받은 초보 교사다. 최 선생님은 선배 선생님들의 열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 전교생이 식사하는 모습이다. ⓒ장태욱
대화를 나누다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선생님들의 권유로 식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30명 남짓 먹는 점심에 불청객 한 사람이 더 껴 아이들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들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만큼 아이들은 밥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에 두 분 선생님은 나를 여러 교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안내한 교실들은 내가 그동안 다녀본 학교의 교실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학교의 교실들은 마치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완성된 문화공간인 듯했다. 그리고 문화공간처럼 만들어진 이 교실들을 아이들이 직접 정리하고 청소한다고 했다.

▲ 아이들이 학교에 오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다. ⓒ장태욱
어느 기업에서 후원을 받아 만들었다는 문고는 만화의 캐릭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것 같다. 아이들은 학교에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 문고에서 책을 보기 시작한다고 했다.

교실 한 구석에 민속공예품들을 전시하여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도 있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공예품들을 매일 만지면서 이전 세대의 숨결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 교실 한 쪽에 민속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태욱
이 학교 선생님들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아이들은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전통차를 마실 수 있게 이완국 선생님이 교실 한 쪽을 찻집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전통차를 마실 수 있도록 교실 한 쪽을 이용해서 만든 쉼터다. ⓒ장태욱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서 인사를 하고 돌아오려니 두 분 선생님은 보여주실 게 한 가지 더 있다고 했다. 아이들을 잠시 모이라고 하더니 좀처럼 보기드믄 공연을 보여주었다. 이완국 선생님이 ‘승무’의 일부분을 변형시켜 만든 전통춤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북을 두드리며 즐겁게 공연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취해 절로 흥이 났다.

▲ 이완국 선생님이 승무의 일부분을 고쳐서 만들었다는 전통 음악 공연 ⓒ장태욱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어울려 공을 차는 동안 어디서 왔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오래 전 어느 동화에서나 봤을 법한 정겨운 장면을 뒤로하고 돌아오려니 아쉬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30명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을 보면서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고 생각했다던 선생님과 그 선생님을 입이 침이 마르게 자랑하시던 동료선생님을 뵙고 나니 세삼 학교에는 여전히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몰래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에서 놀다왔다. 우리 아이들도 이 학교를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 ⓒ장태욱
모처럼 마음에 흠뻑 와닿는 학교를 보고나니 20세 전후에 이영희 선생의 <분단을 넘어서>라는 책을 읽었던 시절이 생각났다. 한 번도 근거리에서 뵌 적이 없는 분을  나는 그 후로 스승이라 여기며 살지 않았던가? 그러니 한 번도 다녀보지 않았지만 마음 속에 작고 어여쁜 학교를 품고 살아가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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