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걷다 4] 동문시장에서 용담까지

2007년 9월 30일(일) 오후

종달리에서 점심을 너무 거하게 먹은 탓인지 시외버스를 타고 김녕이나 함덕에 가서 제주시까지 걸어가야겠다는 계획은 없었던 일처럼 뒤로 밀려났다. 제주시에 나갈 일이 있다는 청년의 제주시까지 태워다주겠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차에 올랐다.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제주의 풍광들을 그냥 마음에 담아야겠다며 차장으로 시선을 고정시켜보지만 아무래도 외지에서 잠을 자고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조천 쯤에 와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동문재래시장 다시 일어서는 제주도 재래시장인 동문시장  ⓒ 김민수
 

신촌을 지나 이미 화북에 접어들었고, 이내 제주시내로 접어들어 목적지인 동문시장에서 내렸다. 제주시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동문시장은 지난 태풍 때 시장 전체가 수마가 휩쓸린 곳이다.

그러나 시장에 들어서니 언제 피해를 입었는가 싶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다소 힘든 모습이지만 고난을 딛고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몸부림들이 시장안에 가득했다. 시장을 나와 좌판을 깔고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물었다.

"이번 태풍피해 탓에 많이 힘드시죠?"

"나 같이 좌판하는 사람들은 가진 게 없은 게 잃은 것도 없었수다게. 시장 안에서 가게하는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지. 가게 내놓고 나간 사람들도 많수다게."

그랬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잃을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픔이다. 동문시장을 지나 제주의 명동이라는 탑동거리를 걸었다. 그 곳 역시도 태풍의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보통 도시의 거리처럼 인파와 차량으로 복잡했고 간헐적으로 태풍피해의 잔해가 보일 뿐이었다.  
  

   
 
제주항 언제 보아도 그리운 고향같은 방파제와 바다  ⓒ 김민수
 
    
   
 
무너진 탑동 방파제 태풍피해로 무너진 탑동방파제는 복구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김민수
 

탑동방파제에 다다르니 지난 태풍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그 곳은 아직 복구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고, 온전히 복구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파손된 방파제를 보면서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이 자연의 주인이 되고자 했을 때 초래될 수밖에 없는 현상을 보는 듯해서 씁쓸했다.

탑동을 지나 용담으로 향했다. 이번 태풍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지역이라고 한다. 몇몇 집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폐허처럼 변한 집들만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용두암. 신혼여행 때 그 곳에 와서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제주에 살 때에는 손님들이 오면 잠시 들렀을 뿐 자주 찾지 않던 곳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여행길이라는 것이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걸어가는 설렘이 있는 것인데 이전에 걸었던 길을 걸으며 추억을 더듬는 것에 더 익숙해 있는 자신을 본다.
  

   
 
빈 집 폐허가 된 집이 을씨년스럽다.  ⓒ 김민수
 
    
   
 
용두암 저 멀리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가 보인다.  ⓒ 김민수
 
   
   
 
화산석 움푹 팬 곳에 바닷물이 고여있고, 그 곳에는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 김민수
 

흐린 날씨로 제주 특유의 바다는 만나지 못했지만 검은 바위와 부서지는 하얀 파도가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수채화라기보다는 유화에 가깝다. 나는 검은 화산석 바위에 올라가 먼 바다를 바라보다 움푹 파인 바위에 고인 물들을 바라본다. 

언젠가는 파도가 이 곳까지 올라왔을 것이다. 아니면 물이 이 곳까지 차올라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바위에 남은 물일 수도 있겠다. 그 곳에도 그 작은 물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생물들이 꽤나 많았다. 이유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첫 날, 성산포에서 만났던 벙어리 청년을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 성산포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청년은 어떤 빛을 찾고 있을까? 그가 찾고 있는 빛깔을 찾았을까?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기를 찾으러 여행을 한다. 40대 중반, 잃어버린 것을 찾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가 아닐까? 그것을 찾은들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을 온전히 포기하고 내가 걸어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하얀 파도와 검은 화산석의 조화 제주 바다의 빛깔만 함께 했더라면 참 좋았을 터인데....  ⓒ 김민수
 

용담에서 제주공항 쪽으로 걷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기본요금 1800원의 편안함,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꿈에도 그리던 제주, 1박2일의 짧은 여행은 여기서 끝이다. 하룻밤을 더 머물겠지만 남은 제주의 일정은 일의 연장선상이니 여행하는 것처럼 감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벙어리 청년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형님, 도보여행은 잘하고 계신가요? 전 성산포에 있습니다."

"도보여행 끝내고 공항에 왔습니다. 좋은 그림 그리시길…."

"서울에 가면 연락해도 될까요?"

"예, 내가 부산에 가면 연락할테니 이번에 그린 그림 보여주시길…."

"올라가세요. 안녕히…."

그는 무엇을 찾아 제주에 왔을까? 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찾아 제주로 온다. 어떤 이는 찾고 싶은 것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찾지 못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 무언가를 찾았기에 세상의 시름을 제주에 내려놓고 가기도 한다.

남은 1박 2일의 일정은 출장관계였기에 여행이랄 것은 없었다. 한적한 중산간도로를 운전할 때의 쾌감, 그것이 전부였다. 꿈에도 그리던 제주, 그 곳에 다녀온 후 몸은 열병을 앓았다. 아직도 몸은 서울을 거부하고 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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