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이 머무는 곳 2] 와흘 본향당

   
 
팽나무에 걸려있는 오색포색 본향당 팽나무 가지에는 오색포편이 걸려있고 그 아래 본향당 처신이 자리하고 있다.  ⓒ 김강임  
 

마치 절집 사천왕문을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큰 잘못도 없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옛날 어른들은 본향당에 가는 날은 며칠 동안 금기사항을 지켰다. 하지만 나는 금기사항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물색과 지전, 몸이 오싹하다  
  

   
 
표지석 제주시에서 번영로를 따라 30분정도 가면 와흘본향당 표지석이 있다.  ⓒ 김강임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1274-1번지 와흘 본향당. 태초에 탄생이 이만큼 고요했을까? 10여 평 정도 되는 당집에 들어설 때 나는 꼭 심판을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신이 머문다'는 와흘 본향당 들어섰다. 나를 위압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태고의 신비처럼 느껴지는 팽나무, 팽나무 가지에 걸려있는 오색포편 물색(신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옷), 마주보고 있는 2개의 석비, 동백나무에 걸려 있는 지전(저승 갈 때 가지고 간다는 돈), 그리고 타다 남은 향과 촛불. 이 모든 것이 나를 오싹하게 했다.

동행한 김 선생님은 가지고 간 술을 백조도령의 신위와 서정승 신위 앞에 바쳤다. 그리고 380년 된 팽나무 앞에도 술을 따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본향당집은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오색포편 신을 아름답게 치장한다는 물색  ⓒ 김강임
 

사면이 바다인 제주는 '절오백 당오백'이라 할 만큼 절과 당이 많다. 의지할 곳 없던 섬사람들에게 무속신앙은 자신을 지켜주는 자연 종교였던 셈이다. 즉, 마을사람들은 본향당에 좌정한 당신이 마을 모든 사람들의 생사고락을 맡아 준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380년 된 팽나무의 신비로움   
  

   
 
팽나무 본향당에 서 있는 팽나무는 수령이 380년, 수고 13m, 둘레 4m.  ⓒ 김강임 
 
 
와흘 본향당 한가운데 서 있는 수고(樹高)가 13m나 되는 팽나무는 온갖 식물들의 공생처다. 푸른 이끼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가 팽나무 몸통에 뿌리를 내렸다. 뿌리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그 이파리들은 허공에서 서로 얼굴을 비벼댔다. 신비로웠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2개의 석비였다. 제주 본향당은 저마다 족보가 있다고 한다. 와흘 본향당 신은 송당 본향당의 열한 번째 아들 백조도령. 그러고 보니 와흘  본향당의 뿌리는 송당 본향당인 셈이다. 3개의 제단 위에 세워진 백조도령 위패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치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와흘당 당신인 백조도령과 마주하고 있는 처신의 석비. 이들은 부부지간이지만 서로 바라만 보고 있다. 얼마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는 걸까? 그 사연을 알기 위해 와흘당 본풀이에서 나타나는 좌정기를 접해 보았다.    
  

   
 
백조도령 석비 와흘당 당신인 백조도령의 석비  ⓒ 김강임
 
   
   
 
서정승 석비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이유로 쫓겨난 서정승 석비  ⓒ 김강임
 
 

와흘당 본풀이에서 본 좌정기

옛날 서정승의 딸이 일곱 자식을 데리고 와흘에 내려와 살았다. 어느날 송당 본향당의 열한 번째 아들 백조도령이 예쁜 서정승 따님 애기를 보고 반했다. 결국 이들은 현씨 하르방(할아버지) 중매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서정승 따님 애기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돼지고기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신에게 돼지고기는 금기사항. 너무 돼지고기가 먹고 싶었던지라 돼지고기 털을 불로 태워 그 냄새를 맡았다 한다. 이에 금기사항을 어긴 서정승 따님 얘기는 본향당의 한쪽 구석으로 쫓겨났다. 한마디로 부정을 탔다는 것.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죄로 별거를 하게 된 것이다.
  

   
 
치성흔적 제단 앞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 있다  ⓒ 김강임
 
    
   
 
지전 저승갈때 가지고 간다는 지전이 동백나무에 걸려 있다  ⓒ 김강임 
 

신화, 그것은 신기루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 속에 흐르는 신화는 참 흥미진진하다. 정말이지 서정승의 위패는 백조도령 위패에서 떨어져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냉혹하지 않다.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 유혹을 위로하기 때문일까. 이곳에서는 제일마다 돼지고기를 제단에 바친다니 말이다. 
 
김 선생님이 팽나무에 카메라를 들이댈 때 나는 당신과 처신의 석비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아무리 신화라지만 너무나 애틋하고 안타까운 사연이었기에 말이다.   
  

   
 
맥문동과 야생화도 숨을 죽이는 본행당 본향당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것들도 숨을 죽이고 있는듯 하다.  ⓒ 김강임
 

신도 저버린 그 고소함의 유혹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 신이 살아 있다고 믿는 마을사람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일, 부자가 되고 가난해지는 일, 객지에 나가 사고를 당하는 일을 와흘 본향당 신이 맡아 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아직도 마을에서는 제일을 지키며 신을 즐겁게 하고 있다.
 
금기사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동쪽 제단으로 쫓겨난 서정승의 위패 앞에는 4개의 촛불이 깜빡거렸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동백나무 아래 피어있는 보랏빛 맥문동도 당신과 처신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내 마음속 금기사항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신도 어쩌지 못한 것이 욕심이다. 그처럼 오욕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함이 삶인줄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금기사항들을 어기며 살아간다. 돼지고기의 털을 태워서 맛본 그 고소함처럼.

와흘 본향당

   
 
와흘 본향당 제주시 번영로에서 본 와흘본향당.  ⓒ 김강임
 

와흘 본향당은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1274-1번지에 있으며 2005년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9-3호로 지정됐다. 와흘 본향당은 와흘리 주민들의 생산, 물고, 호적, 장적을 관장한다. 와흘 본향당은 와흘 한거리 '하로산당' 또는 '노늘당'이라고도 한다. 당신은 송당 소로소천국 열한 번째 아들 '산신또'로 사냥을 하는 산신이기 때문에 당굿을 할 때 산신놀이를 한다. 처신은 서울 서정승 따님 얘기로 제단은 동쪽에 따로 마련돼 있다.

제일은 1월 14일 대제일, 7월 14일 백중제로 많은 주민들이 참가하여 팽나무와 함께 진설해 놓은 제물들이 서로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와흘 본향당 표지석에서-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