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제주의 화산석에 담긴 물 & 반영

시흥바다의 모래채집장 눈높이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도 한다.  ⓒ 김민수
 
"얼만큼 낮아질 수 있느냐?"
 
그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모래채집장의 곱디고운 모래는 바람을 타고 땀에 젖은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끈적끈적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사막의 일출과 일몰을 담아보리라는 꿈, 그다지 크지 않은 모래밭이라도 거짓말을 하는 카메라의 힘을 빌리면 사막처럼 찍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자니 그는 계속 낮아지길 요구했다.
 
기어이 온 몸을 모래에 붙이고, 고운 모래를 조금 더 파고 엎드리니 모래와 하늘의 구름만 남겨둔다. 잠시 착각, 사막에 온 것 같다. 그러나 여기는 제주 시흥 앞바다의 모래채집장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들꽃을 담을 때도 그들은 끈질기게 요구를 한다. 땅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자기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땅보다 더 낮은 곳에 서지 않으려면 하늘을 배경으로 담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때만큼은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다.
 
그런데 나는 들꽃산행을 하다 보면 맨땅을 뒹굴며 노는, 불혹을 훌쩍 보낸 중년의 사람들을 종종 본다. 간혹은 내가 그 주인공이기도 하고.  
  
   
 
제주의 화산석과 고인 물 제주의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의 모습들  ⓒ 김민수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제주의 바다에는 구멍이 송송 뚫린 검은 화산석들이 많다. 제주의 상징 중 하나다. 어떤 것들은 날카로워서 살을 찌르고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오랜 세월 파도와 맞서면서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가는 것들도 있다. 파도가 밀려오면 바닷물을 한껏 받았다가 썰물이 되어 물이 빠져나가면 마치 옹달샘처럼 바닷물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비가 오는 날이면 단물이겠지만.
 
그런데 그 주변에는 늘 생명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사는 것들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마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나 또한 존재하는데 나의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씩 존재의 이유가 모호해서 힘들어할 때가 있다. 그때는 한 사람만이라도 내가 필요하다면 나는 세상에서 충분히 살아갈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고 힘을 얻는다.  
  
   
 
반영 고인 물에 반영된 세상, 거꾸로 비추어도 아름다운 세상이다.  ⓒ 김민수 
 
 
눈에는 보이지만 담을 수 없는 것들
 
분명 눈으로는 보인다. 보이는 대로 다 담을 수는 없지만 그 작은 옹달샘(?) 안에 하늘과 나무와 꽃과 새가 모두 들어 있다. 허긴, 작은 이슬방울에도 온 우주가 다 들어 있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신비다.
 
작은 세계는 아주 조금의 눈높이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변화무쌍하게 변한다. 단 한 걸음만 옮겨도, 무릎을 조금 굽히기만 해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다가옴을 경험하게 된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아주 큰 변화가 있기에 '작은 것'이라 이름이 붙여졌는가 보다. 눈에 보이지만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눈의 신비, 눈으로 보고 느끼는 대로 담을 수 있는 렌즈가 있다면 아마도 꿈의 렌즈일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렌즈를 통해 보기도 하지만 눈에는 보이지만 담을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심히 매력적이다. 담아도 담아도 늘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반영 어디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이 다가온다.  ⓒ 김민수  
 

단 한 번도 같지 않지만 다르지 않은 그들
 
그들은 가만히 있는 듯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 적이 없다.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이 알지 못했을 뿐, 그들은 늘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다름은 변질이 아니라 새로움이었다.
 
새로움, 그것은 단지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무한영겁의 세월, 혹시라도 그 새로움을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매일매일 되풀이 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뜨고, 지는 일들처럼, 바람이 불고 자는 일처럼 말이다.
 
변증법이라고 하던가! 변함과 변하지 않음의 경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운동함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 제주의 돌들을 보면 마치 그들이 숨을 쉬는 듯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화산석 그냥 평범하게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 김민수 
 
 
모자랄지언정 넘치게 담아본 적은 없다
 
그러나 늘 모든 것들을 비범하게 특별하게 만나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론 그냥 평범하게 볼 줄 아는 것도 삶의 지혜인 것이다. 어떤 때는 그냥 얼핏 보고 지나쳐야 할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기도 하니 말이다.
 
간혹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지나쳐 버릴 일들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하는 경우가 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의 근심까지 앞당겨서 걱정하느라 오늘의 행복을 잃어버릴 때가 너무도 많다. 그냥, 별 일이라도 "별 일 아니야!"라고 지나칠 수 있는 것,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삶이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무게만큼만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니까.
 
제주의 바닷가 검은 화산석들이 간직한 작은 옹달샘이 온 우주를 담고 있는 비결, 그것은 자기가 담을 수 있는 만큼의 물 이외에는 더 이상 간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자랄지언정 넘치게는 담아보지 못한 그 마음이 어쩌면 온 우주를 넉넉하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시작이었으리라.

덧붙이는 글 |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진은 실재사진이 아니라 눈으로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포토샵처리한 것입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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