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귤과 돈내코 맑은 물의 고장

5.16도로는 제주 시내와 서귀포 시내를 가장 짧게 연결한다. 이 도로를 통해 두 도시를 오고 갈 때는 한라산을 지난다. 두 도시를 오가는 도중에 성판악이 5.16도로의 분깃점이 된다. 성판악을 지날 때 오르막 길은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된다. 
  

   
 
성판악 휴게소 5.16도로를 타고 가는 여정 가운데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 장태욱 
 

제주시에서 출발해서 성판악을 지나면 선돌선원이 나오고, 이 앞을 지나면 법호촌 마을에 있는 서귀포산업과학고(구 서귀농고)가 나온다. 이 학교를 3km 정도 지나면 토평마을이 나온다.      

여름에 한라산을 진한 녹색으로 물들였던 나무들이 이제 황색 홍색으로 계절에 맞춰 새로운 치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주를 떠나 서귀포 농촌 마을을 탐방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길을 오가며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는 자연의 변화를 엿보는 것도 한라산과 5.16도로가 덤으로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마을 입구 5.16도로를 따라 가면 마을 입구에서 이 표석을 찾을 수 있다.  ⓒ 장태욱  
 

토평마을의 강춘심 사무장과 약속을 하고 마을회관으로 갔다. 태풍 '나리'는 예외 없이 이 마을에도 피해를 주고 갔다. 농업용 시설 하우스가 바람에 피해를 입었다는 농가가 많았다. 오창헌 마을회장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서귀포시에서는 '서귀포 칠십리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태풍 피해복구활동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하기 때문이었다. 마을 회장님 대신에 마을의 지리와 유래에 밝은 오태혁 노인회장께서 취재에 동행해주셨다.

소정방 상류, 속칭 '묵은가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광숙이왓'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1500년께 육지부에서 난을 피해온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김(金)씨, 오(吳)씨, 정(鄭)씨 들이었다.   
  

   
 
토평마을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이 늘 포근하게 감싸주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질 좋은 귤이 생산된다.  ⓒ 장태욱 
 

비슷한 시기에 지금 마을 동쪽의 '막동굴내' 동편 상효1리 경의 '조개물'에 조(趙)씨가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개물' 자체가 조(趙)씨들이 사용했던 물이라는 뜻으로 조씨의 선조는 당시 을묘사화를 피해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1925년에는 정의현(旌義縣) 우면(右面) 토평리(吐坪里)로 이름을 바꾸고 1, 2구로 분할되었다가 1944년에는 다시 단일 행정구역으로 합병되었다. 그 뒤 1956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남제주군 서귀읍 토평리가 되었다. 지금은 서귀포시 영촌동에 속해 있다. 
  

   
 
돈내코 계곡에 숲이 우거져 있어 여름철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장태욱 
 

서귀포에는 제주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연중 물이 흐르는 시내 몇 개가 있다. 강정동에 있는 강정천, 천지연폭포 상류인 솜반내, 소정방 상류, 토평 법호촌 상효마을을 지나는 돈내코가 그것들이다. 돈내코의 상류에는 시냇물의 최초 발원지로서 지하수 용출을 시작하는 '나는물또'가 있는데, 이곳이 토평 마을 경계 내에 위치해 있다. '나는물또'란 물이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입구라는 뜻이다.

'나는물또' 바로 아래는 5m 높이에서 물이 떨어지는 원앙폭포가 있다. 제주에는 음력 7월 보름에 농신인 '자청비'를 기념하여 백종제를 지냈는데, 이날 폭포에서 물을 맞으면 액운이 가신다고 하였다. 과거 7월 보름에는 사람들이 위해 쌀과 미숫가루를 싸들고 원앙폭포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며칠씩 근처에서 야영하며 물을 맞았다. 지금도 이 폭포는 여름이 되면 피서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드는 관광명소다.
  

   
 
원앙폭포 돈네코 유원지의 상류 지점에 있다.  ⓒ 장태욱
 

토평 마을의 지리적 특징 중 한 가지는 마을 경계가 해안에서 한라산 정상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마을 주민들은 한라산 백록담의 지번이 토평동 산 15-1번지라며 자랑스러워한다. 백록담에서 시작된 마을은 현재 주민들이 대부분 살고 있는 중산간 지역을 지나 서귀포시 칼호텔 인근에 위치한 '거문여' 해안에 이른다.

'거문여' 해안에는 삼별초 항전을 전후해서 고려관군과 삼별초군이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쌓은 환해장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서귀포시 바닷가에 있는 섶섬 범섬 등이 가까이서 훤히 내다보인다.
 
토평마을은 나비박사로 잘 알려진 석주명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석주명은 일제 말기인 '경성제국대학교부속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근무하면서 1943년 4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만 2년을 토평마을에서 생활했다.  
  

   
 
석주명 기념비 나비박사 석주명은 과거 이 마을에서 2년 간 나비연구와 제주방언 연구에 몰두했다.  ⓒ 장태욱 
 

그는 이 마을에서 생활하는 동안 토종나비연구와 더불어 제주도 방언연구에 깊이 몰두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그가 제주도에 있으면서 나비와 그 분포지역 방언의 분포를 연관시켜 연구했다는 점이다.

석주명 박사 기념비 옆에는 제주대학교 부설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가 있다. 이 연구소는 아열대농업부와 동물과학부의 2개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아열대농업부에서는 열대 및 아열대 식물의 생산 기술을 연구하여 제주지역에 맞게 적용시키는 연구를 하는 곳이다. 제주의 날씨가 점점 아열대성으로 변해가기 때문에 이 연구소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동물과학부는 양축농가와 동물산업의 생산성 향상, 토종동물의 유전자 보존, 우량 유전자의 발굴 등을 연구하고 있다.
  

   
 
아열대 농업생명과학연구소 제주대학교 부설 연구소다. 수입개방과 종자전쟁의 시대가 열리기 때문에 이 연구소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생각했다.  ⓒ 장태욱  
 

토종 종자가 거의 멸종되어가는 데다 2009년부터 외국에서 수입된 종자에 대해서는 농민들이 비싼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제주에서 재배되는 귤나무 중에서 일본에서 수입되지 않은 종이 없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사안은 더 심각하다. 

수입개방과 더불어 토종의 보호와 자체 우량 품종 개발이 우리 농업에 놓인 또 하나의 절박한 과제임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 연구소의 역할이 중요하기만 하다. 석주명이 이곳에 살면서 토종 나비와 방언의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도 미래를 대비한 선견지명이 아닌가 싶다.

토평 마을은 제주에서도 귤 농사가 아주 일찍이 성행한 곳이고 지금도 제주에서 가장 맛이 좋은 귤을 생산하는 마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며 살았다.

이 마을에 귤이 보급된 것은 1930년대라고 한다. 서귀포 천주교회의 신부가 일본의 친구에게서 얻어온 귤나무를 시험재배하고 마을주민들에게 가구당 두 그루씩 나눠준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귤나무 귤이 익어가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귤나무는 이 마을 풍요의 상징이었다.  ⓒ 장태욱
 

그러다가 해방 후 '감귤농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원옥(84세) 할아버지에 의해 본격적인 감귤농사가 시작되었다. 김원옥 할아버지는 서귀농고의 전신인 서귀농업실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의 활로에 관심을 갖던 중 토평마을이 귤 농업에 적지임을 알아차리고 탱자나무에 귤나무를 접목하는 방식으로 묘목생산에 주력했다고 한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귀포를 방문한 자리에서 '서귀포 사람들이 먹고살 길은 오직 감귤이다'고 하여 감귤농사에 주력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토평마을에는 김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인해 자발적인 귤 붐이 일고 있었다.

이 마을은 군위 오(吳)씨가 주민의 40%를 차지하는 제주의 대표적 오씨 마을이다. 2004년 조사에 따르면, 토평마을에는 총 1231세대에  주민 3529명이 살고 있다. WTO체제에 들어 오렌지 수입이 늘어나고, IMF외화위기 이후 국내 소비시장이 위축되면서 이전에 이 마을이 귤 농업으로 누렸던 그 풍요로움은 점차 옛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한미FTA 와 2009년부터 적용될 '종자 로열티'가 새로운 시련을 더할 전망이다.

덧붙이는 글 | 취재하는데 도와주신 강춘심 사무장님과 오태혁 노인회장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다음편에는 석주명에 관해 기사를 작성하겠습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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