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색을 탐하지 말랬건만...과 의 배경

   
 
안내표지 방선문계곡 진입로 입구에 설치된 안내표지  ⓒ 장태욱
 

제주시 오라동 종합경기장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정실마을에 이르면 방선문을 알리는 표지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제주교도소를 끼고 남쪽으로 뻗은 포장도로를 1.6Km쯤 따라 올라가면 방선문 계곡이 나온다. 방선문은 한라산 탐라계곡과 열안지오름 동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만나는 지점으로, 제주시 용연(龍淵)으로 흐르는 한천의 상류에 해당한다.
  

   
 
진입로 방선문으로 들어가는 길  ⓒ 장태욱
 

이곳에서 용연으로 이어진 한천은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바닥을 드러내는 건천이다. 설령 비가 내리더라도 이곳에서 용연에 이르는 길이 약 7Km의 하천바닥이 우수를 흡수하여 하천이 범람하는 것을 막아주는 완충역할을 한다.  
  

   
 
▲ 계곡 탐라계곡에서 방선문으로 내려오는 계곡  ⓒ 장태욱
 

방선문 계곡에는 큰 바위로 지붕이 덮여있는 바위 그늘이 있는데, 대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앞뒤로 트여있어 마치 터널을 보는 듯하다. 150명 이상이 들어가 앉을 수 있을 만큼의 넓이를 지닌 이 터널을 두고 ‘방선문(方仙門)’이라 불렀다. '신선이 방문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Y자형 계곡 탐라계곡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열안지오름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방선문이 있다.  ⓒ 장태욱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백록담에는 매해 복날이 오면 선녀들이 옥황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고, 선녀들이 목욕할 동안 한라산 신선은 이곳으로 자리를 피해야 했다고 한다.  '방선문'이라는 이름도 여기에 유래한다.

그런데 어느 복날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한 한라산 신선은 선녀들이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된 옥황상제가 노발대발했고, 결국 한라산 신선을 하얀 사슴으로 바꿔버렸다. 한라산 정상에 있는 분화구 호수를 백록담이라 부르는 것도 이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방선문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진 터널(바위그늘)이 방선문이다. 이 바위그늘 안쪽에 150명이 들어가 앉을 수 있다고 한다.  ⓒ 장태욱 
 

과거에 이 일대를 영구(瀛丘)라고 부르기도 했다. 제주참꽃이라 불리는 철쭉꽃이 계곡 전체에 덮였는데, 이것이 맑은 계곡물에 비쳐서 계곡바닥까지 온통 꽃으로 덮인 듯 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영구춘화라 하여 영주십경 중 하나로 자랑한다.

봄철에는 제주에 부임한 목사들이 육방관속과 관기를 거느리고 방선문에서 시도 읊고 봄놀이도 즐기며 마음을 다스렸다. 과거의 그런 풍습으로 인해 판소리 소설인 <배비장전>의 무대가 되었다.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소에 자신은 절대 여색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배비장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관속을 데리고 방선문 계곡에 봄놀이를 갔는데 수풀 속에서 교태를 부리는 애랑의 미색에 빠진다. 배비장은 애랑을 만나기 위해 밤에 몰래 애랑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배비장의 하인인 방자는 이를 알아차리고 애랑의 남편행세를 하며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이에 놀란 배비장이 궤짝 속으로 들어가자 방자는 궤짝을 톱으로 자르겠다는 둥, 불태우겠다는 둥, 바다에 던지겠다는 둥 위협하면서 배비장을 혼비백산하게 한다.

양반들의 허위를 신랄하게 보여주는 이 내용이 판소리로 공연될 때 그것을 감상하던 평민들이 느꼈을 카타르시스의 농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기후변동과 자연훼손 등으로 인해 지금은 과거에 이곳을 붉게 수놓았던 철쭉을 거의 볼 수 없다.  
  

   
 
방선문 최익현이 이곳을 등반할 때 봤다고 기록한 마애명이다.  ⓒ 장태욱 
 

대원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왔던 면암 최익현은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자 고종 12년(1875년) 3월 27일에 일행 15명을 거느리고 한라산을 등반했다. 당시는 한라산 등반이 일반화되지 않을 때라 등반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방선문 계곡으로 한라산을 올랐다. 면암은 당시 방선문 계곡을 본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3월 27일, 남문(南門)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시냇물이 흐르는데, 이는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시내였다.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벼랑을 따라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수십 인을 수용할 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 보였다. 그 양쪽 암벽에는 '방선문등영구(訪仙門登瀛丘)'란 여섯 자가 새겨져 있고… 수단화와 철쭉꽃이 좌우로 나란히 심어져 있는데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어 이 또한 비길 데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이런 풍경에 취해 한참 동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 최익현의 <유한라산기> 중 일부

지금은 이 계곡에 물이 흐르지 않지만 면암이 한라산을 등반할 당시에는 방선문 계곡에 물이 흘렀으며 철쭉이 계곡 좌우를 가득 수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애명 과거에 이 계곡을 찾았던 사람들이 바위에 남긴 글씨들이다.  ⓒ 장태욱 
 

방선문 바위 곳곳에는 방문객들이 기념으로 바위에 남겨놓은 글귀들이 남아있다. 이를 마애명이라 하는데 지금 남아있는 마애명이 홍중징의 한시 '등영구' 등을 비롯해 37개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게시판에 '리플'을 달고야 속이 풀리는 것은 타고난 민족성인 모양이다. 지체 높은 양반들이 체면 구겨가며 높은 바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글씨를 썼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최익현이 남긴 마애명 최익현과 길 안내를 맡았던 이기온의 이름이 바위에 남아있다.  ⓒ 장태욱
 

면암 최익현도 방선문 계곡을 지날 때 한라산 등반길을 안내하던 이기온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바위에 새겨 놓았다. 이기온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 유배를 왔던 간옹 이익의 후손이다. 이기온은 최익현의 위정척사 사상을 이어받아 제주 유림에게 전파했고 이것이 제주 의병운동의 정신적 초석을 이루었다.

계곡 동남쪽에는 병풍바위 위에 우선대가 있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는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이 나무꾼을 만나서 사랑을 속삭였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선녀가 문제다. 신선의 팔자를 그르쳐 놓은 것도 선녀고, 잘살고 있는 나무꾼을 홀리는 것도 선녀다. 배비장도 애랑이라는(제 눈에는 선녀로 비친) 여색에 홀린 것이 아닌가? 요즘 언론에도 벼슬길에 오른 자가 선녀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자주 보도되던데, 보기에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다.  
  

   
 
▲ 철쭉 영구춘화를 복원하기 위해 최근에 심어놓은 철쭉이 보였다.  ⓒ 장태욱 
 

봄철에 이곳에서는 ‘계곡음악회’가 열리는데, 원시 절경을 배경으로 계곡을 진동시키는 음악 소리에 시민들이 좋은 반응을 보내고 있다. 계곡 입구에는 철쭉도 새로 심어 놓았다.

과거 양반들의 풍류 무대였던 방선문을 휴식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진행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아직은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에는 다소 위험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방선문을 잘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체계적인 계획이 마련되길 바란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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