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
4.3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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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박경훈도지사(3)]-좌우대립과 3.1절 발포사건으로 지사직 사퇴...정부 '강경탄압'으로 사태만 악화시켜
제주도는 도제실시 이후에도 사회가 안정을 찾기는커녕 더욱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그 동안 인민위원회에 눌려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미군정청은 도 승격을 계기로 도내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도 승격 2개월 후에 발생한 대구지방의 '10월 봉기사건'으로 좌익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내 좌익진영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미군은 각 기관에 근무하고 있는 인민위원회 소속 직원들을 대부분 해임시키고 우익 인사로 바꾸었다.

이에 대해 도내 좌익진영은 그 동안 자치제에서 보여준 도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자신감, 그리고 정통성 등을 내세워 미군정청의 탄압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하며 '모든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돌려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제주도조직과 한독당제주도당부가 결성되기도 했다.

흉흉한 민심속에 입법의원 김도현 오용국 선출

이에 앞서 제주농업중학교를 포함한 제주시내 학교들은 일제 잔재교육의 철폐와 미군통치를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연일 벌여 미군정청을 자극시켰다. 더군다나 제주도민들은 생산물을 육지로 내다 팔기 위해 목포항에 입항하면 목포경찰서가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등 계속된 흉년과 함께 민심이 점점 흉흉해가고 있었다.

미군정청은 1946년 2월14일 서울 창경궁에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을 설치하고 4국15부의 기구를 두어 군정최고자문기관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어 8월24일에는 미군정법령 제118호로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설치령'을 공포하고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의결기관으로서 의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의원 수는 90명이었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는 1944년도의 인구를 기준으로 2명의 대의원이 배정됐다. 각시도별 대의원수는 경상북도가 7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국적으로는 45명이었다. 같은 수의 45명은 미군정장관에 의해 임명됐다.

대의원 선출은 그해 10월28일부터 실시됐으나 제주도는 10월29일에 선출됐다. 이날 선출된 대의원은 구좌면 인민위원회위원장 문도배(文道培S)와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장 김시택이 각각 선출됐다. 11월4일로 예정됐던 입법의회는 정국 사정으로 연기되고 나서 12월12일에야 개원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같은 좌익단체에서는 입법의회가 미군정청의 들러리 의회라고 주장하고 참여를 거부했다. 그래서 선출된 입법의원 대부분이 우익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한국민주당 한국독립촉성당 출신들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중앙의 분위기를 감지한 제주도 입법의원 2명도 곧 사퇴해버리고 말았다.

이듬해인 1947년 3월에 실시된 재선거에는 북제주군 애월면 애월리의 김도현 대한독립촉성국민회)과 남제주군 서귀면 서귀리의 오용국(무소속)이 각각 선출됐다. 이때 선거방식은 직접선거가 아니라 주민이 마을대표를 선출하면 마을대표는 읍면대표를 뽑고 읍면대표는 군대표를 뽑아 이들이 대의원을 선출하는 간접선거방식이었다. 입법의원은 1948년 5월20일 해산될 때까지 제헌국회의원선출을 위한 선거법 등 18건의 법률을 제정했다.

입법의원 선거가 있었던 그해 11월16일 제주도에는 국방경비대 제9연대(연대장 부위 장창국)가 모슬포에 있던 오오무라(大村)병사에 창설됐다.
사회와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기는 1947년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1월14일에는 이른바 '복시환(伏市丸)사건'이 터져 신우균 제주감찰청장과 김여옥 감찰수사과장이 독직혐의로 파면되는 등 사회는 극도의 혼란으로 빠져 들어갔다.

박 지사 중재로 3.1절 행사 좌우익 세력 합동 개최 합의

도내 좌익세력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47년 3월1일을 기해 좌익계열에서 대대적인 반미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군정청은 패트리치 군정법무관이 주재한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직장단위의 3.1절 기념행사 이외의 모든 옥외행사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미군정청은 이와 때를 같이해서 충청남·북도 소속 경찰관 100여명을 제주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여 이미 배치를 완료한 상태였다.

박경훈 지사는 좌우익의 대립이 날로 격화되면서 3.1절 기념식이 자칫 도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좌익과 우익 진영의 대표들을 차례로 만나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으나 양측의 의견은 쉽게 좁혀들지 않았다.

좌익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의 결정에 불복하고 3.1절 기념행사를 자체적으로 제주북초등학교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미군정청과 도청·감찰청·경찰에 집회허가를 신청하는 한편 전도에 걸쳐 격렬한 반미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민전(民戰)은 '3.1절 기념 집회와 시위의 전적인 승인'과 '비합법적인 탄압 즉각 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주민들을 선동했다. 이에 대해 미군정청은 각 기관과 관사 정문마다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비상경계를 펴면서 시위에 대비한 기마대와 기동경찰대를 긴급 편성했다.

1947년 2월26일 도지사실에는 3.1절 기념행사를 앞두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 좌우익 대표들이 박경훈 도지사의 제안에 의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박 지사는 회의소집 취지를 설명하면서 "3.1만세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구국운동이며 독립운동인데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기념식을 좌익과 우익이 따로 치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여기 모인 여러 대표들이 결정하여 3.1기념식을 합동으로 치르는 것이 어떠냐"고 개진했다.
박 지사의 제안에 우익대표 박치순 등은 찬성했으나 좌익대표로 나온 민전의 김택수 등은 우익과 함께 치를 수 없으며 독자적으로 기념식을 갖는다는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민전은 박 지사의 계속적인 설득에 "미군정청이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만 한다면 합동개최를 검토해보겠다"고 말하고 "그러나 장소는 우리가 정하는 제주북초등학교로 하고 사회는 이인구 상공과장이 맡았으면 좋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 과장은 "기념식 날에 남선전기 본사 직원들과 함께 어승생 수력발전소 건설관계로 현장답사를 가기로 예정돼 있어서 사회를 맡을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사회는 좌익계열에서 맡기로 결정했으나 약속은 이행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어린이를 죽였다" 시위대 분노 폭발...경찰 사격으로 시위대 6명 사망

3.1절 28주년의 날이 밝았다.
박 지사는 이날 아침 일찍 도청으로 출근하여 주민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전날 제주시내 곳곳에는 '3.1절 정신을 계승하자' '3.1절 기념식을 우리 손으로 쟁취하자'는 내용의 삐라와 전단지 등이 뿌려져 긴장은 극도에 달했다. 국경일인 이날은 미군정청의 지시에 따라 각급 기관에서는 자체적으로 오전 10시에 기념식을 갖기로 돼있었다.

최초의 시위는 제주시내 오현중학교에서 일어났다. 이날 오현중학교에는 학생들의 기념식이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전 8시쯤 주민들과 학생들이 '미군은 물러가라' '(모스크바) 삼상 회의 절대 지지'를 쓴 플랜카드를 들고 운동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군정청에서는 패트리치 법무관과 강동효 경찰서장, 기마대가 나타나 즉각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주민들과 학생들은 미군정청과 경찰의 강제해산조치에 더욱 항의하며 3.1절 기념식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주시내에는 조천과 애월 등지에서 온 주민들이 3.1절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북초등학교로 몰려들었다. 기념식이 예정된 오전 10시가 가까워지면서 수천명의 군중들이 관덕정과 제주북교 앞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와 함께 미군정청과 경찰은 민전의 3.1절 기념집회를 차단하기 위해 곳곳에 무장경찰대를 배치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등 분위기는 집회 시작 전부터 매우 살벌했다.

경찰의 과잉진압에 자극한 오현중학교에 모였던 주민들은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제주북초등학교로 모여들었다.

제주북초등학교에서의 기념식은 군중들의 소란 속에 개최됐다. 남로당도당부 책임자 안세훈은 개회사를 통해 "우리 제주도민은 모두 3.1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강조했다. 이어 각계 대표들의 기념사가 있은 뒤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기념식은 우려와는 달리 별 탈이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일부 군중들 속에서 다시 미군정청의 시위탄압을 항의하는 구호들이 쏟아져 나왔다. 군중심리에 힘입은 주민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빠져 나와 관덕정을 향해 전진하였다. 미군정청과 경찰은 짚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일단 불붙은 군중들의 시위는 더 이상 제지하기가 어려웠다. 순간 제주북초등학교에서 관덕정으로 가는 도로 모퉁이에서 어린이가 기마대의 말발굽에 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는 군중심리를 더욱 자극, 시위는 걷잡을 수 없게 됐다.

시위대는 "경찰이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외치며 경찰의 바리케이드로 향했다.
그때 도청(옛 제주경찰서)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나면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발포사건으로 6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는데 사상자 가운데는 시위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 구경꾼도 여러 명이 포함돼 있어서 민심을 더욱 자극시켰다.

경찰 '주동자 검거'로 강경대응...'제주도 총파업투쟁위원회' 구성

사건은 걷잡을 수 없게 번져 나갔다.
박 지사는 지사실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시위상황을 보고 받으며 안절부절했다. 박 지사는 강인수 감찰청장과 강동효 경찰서장 등과 대책을 논의했으나 경찰의 대응방침이 너무 강경해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날을 밝혀야 했다.

박 지사는 격앙된 사태진압을 위해서는 시위주동자에 대한 검거가 우선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정부에 응원경찰의 증강을 요청하는 한편 3.1절 기념식을 주도한 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들을 검거했다.

이에 대해 민전은 3.1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3.1절 기념식에서 발포를 명령한 경찰관의 처벌과 사과, 피살자에 대한 보상, 투옥된 민전 회원들에 대한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패트리치 대위와 강인수 감찰청장, 강동효 경찰서장, 임영관 기마대장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시위 주동자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민전과 인민위원회 등 좌익계열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기는커녕 경찰이 주모자 색출을 구실로 좌익계 인사를 대거 구속하자 읍면조직을 총동원하여 전면 파업에 들어가기로 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

이러한 가운데 경찰은 3월4일 파업을 모의한 안세훈 등 28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주민들의 강력한 항의로 사흘 후만에 모두 석방했으나 주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각 관공서에서도 경찰의 과잉진압과 단속에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면서 출근을 거부하는 직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사태는 점점 걷잡기가 어려워졌다.

3월10일에는 제주도총파업투쟁위원회가 구성된 데에 이어 읍·면·리 사무소의 일선 행정기관은 물론 각 직장별로도 '파업투쟁위원회'가 조직됐다. 그들은 이제 발포경찰관의 처단과 사과의 범위를 벗어나 '경찰의 즉시 무장해제'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더군다나 박 지사가 있는 제주도청에서도 파업에 동조, 출근을 거부하는 직원까지 발생했지만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관공서들은 직원들 사이의 상·하 관계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다.

도청 파업을 주도하는 직원들은 산업국장 임관호를 찾아 제주도청파업투쟁위원장직을 맡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3.1절 발포사건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군정청과 경찰에 있는데도 애매한 주민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말하고 "도민들의 권익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전면 파업이 불가피한 만큼 임 국장이 앞장서달라."고 말했다.

임 국장은 그들의 돌연한 요구에 크게 당황하면서 "우선 직원들의 총의를 모은 뒤에 파업을 결정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도청 회의실에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파업여부를 묻는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파업 쪽으로 굳혀졌다. 그중 이인구 상공과장과 김태진 상공계장, 강산염 회계과장, 김호상 등 몇 사람에 불과했으며 그들은 "민생문제 해결이 시급한 실정에서 파업은 신중히 검토한 끝에 결정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대부분의 찬성으로 파업이 결정됐다.

직원들은 이어 "미군정청과 경찰은 3.1사태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하며, 도민들의 절실한 요구를 일방적으로 거절하고 있는 것은 부당한 조치이며,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서는 불법탄압을 즉시 중지하고 주민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받아 들이라."는 내용의 성명서와 8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놓았다.

행정기관 총파업, 각급 학교는 전면 휴업으로 미군정청과 일촉즉발 대치

박 지사는 이미 무너진 위계질서와 걷잡을 수 없는 민심으로 자신의 수습노력은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미군정청은 박 지사와 가진 회의에서 발포경찰관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 파면조치 할 수 있으나 치안문제상 경찰의 무장해제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1947년 3월12일을 기해 북제주군청을 제외한 모든 행정기관이 총 파업에 들어갔다. 도청은 극소수의 직원만이 출근하여 자리를 지킬 뿐 직원 거의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 도청 현관에는 파업을 주동하고 있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다가 직원들이 출근하면 저지했다.

3월13일자 조선일보는 당시 사태를 이렇게 보도했다.
'경무부에 들어온 정보에 보고에 의하면, 제주도에서는 경찰관서를 제외한 모든 관공서가 3월12일 총파업을 단행했다고 한다. 이유는 지난 3.1절 기념일에 폭동으로 말미암아 민중 7명(실제는 6명)이 경찰측의 발포에 의해 사망했는데, 이 당시에 발포한 경찰관을 사형으로 처벌하는 동시에 책임자를 인책사직시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상남도에서는 사태의 악화를 염려하여 응원경찰관 300명을 파견했다 한다.'

제주도내 모든 행정은 마비상태였다. 각급 학교에서는 교사들과 학생들이 파업에 동조하여 전면 휴업에 들어갔다.

중고등학생들의 발표한 성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번 3.1 기념행사를 돌아보면 온순하고 순박한 다수 민중들에게 잔학무도한 발포난사로 수다한 희생자를 냄과 동시에 평화적이고 진리를 탐구하는 학도들에게 노상에서 혹은 기숙사에서 불법 검속을 하고 고금동서에 예를 볼 수 없는 야만적인 고문을 가하여 이번 살인죄를 학도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악질경관의 만행에 가하여 이번 살인죄를 학도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악질 경관의 만행에 대해서는 피 있는 청년학도로서 수수방관할 수 없으며 자유학원에 대한 부정한 외부간섭이 날로 심하여 감은 실로 유감천만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민주학원 건설과 미래의 완전을 기하기 위해 다음의 요구조건을 관철될 때까지 맹휴(盟休)를 단행한다.
발포한 책임자 강동효 및 발포한 경관을 살인죄로서 즉시 처형하라
경찰관계의 수뇌부는 인책 사임하라
피살당한 유가족에 대한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며 피상자(被傷者)에게 충분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하라
경찰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경찰내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3.1 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된 인사를 즉시 무조건 석방하라
경찰의 학원간섭을 절대 하지 말라."

총파업에 들어간지 하루만인 3월13일 오후 조병옥 경무부장이 200여명의 철도경찰관을 대동하고 사태수습차 제주에 긴급히 내려왔으며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이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조 경무부장은 도착 즉시 각 기관에 경찰병력을 배치한 뒤에 수십명의 경찰관과 함께 '제주도총파업투쟁위원회'를 급습하여 임원들을 연행하고 서류들을 압수해갔다.

3월16일자 동아일보는 조 부장의 동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제주도내의 일부 관공서와 공공단체의 총파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모양으로서 경무당국에서는 조병옥 경무부장이 현지로 떠나는 한편 전남과 전북에서 300여명의 경찰관을 파견했는데, 3월15일 아침 제1관구 경찰청(인천 소재)에서는 다시 100여명의 경찰관을 응원차 파견했다. 그리고 조 부장은 3월17일 일단 귀경할 예정이라고 한다.'

박 지사 사의 표명...조병옥 "모두 잡아들여라" 강경 탄압지시

정부가 이토록 제주에서 일어난 파업사태를 강경과 신속진압으로 몰아가고 있던 것은 불순분자로 분류되고 있는 좌익계의 준동을 사전에 차단하고 제주의 파업사태가 전국으로 번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조 경무부장은 경찰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혐의가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잡아 들이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파업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이 온 섬에 불어 닥쳤다.
경찰은 좌익계라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자라면 도청의 간부는 물론이며 교육계의 중진 인사들까지 모두 잡아들였다. 이 같은 마구잡이식 검거는 모든 행정기능을 마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도청과 경찰의 관계마저 불편해졌다. 발포는 경찰이, 파업주동은 도청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파업사태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주동자에 대한 주민 검거령과 장기파업사태가 계속되자 서울에 있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은 3월26일 사무국을 중심으로 오영, 정노식, 윤학출 등 5명의 특별조사단을 구성하여 제주에 내려왔다. 그러나 이들은 목포를 거쳐 제주항에 도착하는 즉시 제주경찰서에 모두 구속됐다.

조 부장은 당초 3월17일 상경키로 했던 예정을 변경하고 이틀이 늦은 3월19일에야 서울로 떠났다.
조 부장은 상경 즉시 가진 기자회견에서 "3.1절 기념식 발포사건으로 인한 제주도내 각 관공서 파업은 어떤 정치사회단체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관찰됐으며, 3월18일 현재까지 주범자 150여명을 검거했다"고 밝힌 뒤 "가까운 시일내에 파업이 완전 해결될 것으로 보이며, 3월16일 현재 제주도청을 비롯한 북제주군청과 남제주군청, 읍면사무소, 학교, 우체국, 금융, 교통, 상업기관 등이 파업을 해소했다."고 발표했다.

조 부장은 이어 3월21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종훈 제주지방검찰청장 등 5명으로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제주감찰청관내 제1구 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치안상 정당한 행위였으며, 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행위는 무사려한 행위로 판명돼 순경 이문규를 파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파업사태가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에 의해 어느 정도 진정되자 3월26일 도청과 감찰청, 경찰특별수사본부 등 관계기관들이 참석한 사태수습대책회의가 도지사 관사에서 개최됐다.

이 자리에는 박경훈 지사를 포함하여 강인수 감찰청장, 경찰특별수사본부 이호 수사반장 등이 참석했다. 박 지사는 그 동안 소원했던 도청과 경찰과의 관계해소는 물론이며 하루속히 사회혼란과 민생안정에 모든 기관이 힘을 합쳐 나가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경찰의 입장은 완강했다. 파업주동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길만이 사태를 해결하는 길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2시간여의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나고 말았다.

박 지사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파업을 주동한 기관이 제주도청인데다 3.1사태가 경찰의 무분별한 발포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온 그로서는 경찰의 강력한 수습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평소 외유내강한 성격 탓도 있으나 이번 사태의 수습에서조차 방관자적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이 때문에 미군정청과 경찰의 사과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강경한 진압책에 밀려 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 지사는 결국 3.1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사직을 사퇴할 것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3월말 사직서를 가지고 미군정청의 정일형 인사처장을 만나기 위해 상경했다. 박 지사는 정 처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제주사태에 대한 경위를 설명하고 나서 도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 처장은 "사태가 심각한 이때에 지사가 그만두면 누가 수습에 나서겠느냐."면서 적극 만류했으나 박 지사의 단호한 사퇴의사로 사직서를 접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병옥 경무부장, "제주도는 모두 빨갱이 섬이다"

박 지사의 상경이후 조병옥 경무부장이 다시 사태진압의 진상파악차 내도했다.
조 부장은 제주비행장에서 바로 감찰청에 들러 파업사태에 대한 조치내용을 보고 받고 "어떠한 방법을 쓰든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파업책동자를 반드시 검거하라."고 다그친 뒤 경찰의 기강을 바로 잡는다면서 파업에 동조했거나 직무가 태만한 경찰관 66명을 무더기로 파면조치했다. 66명이라는 숫자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인원이었다.

4월2일자 서울신문은 조 부장의 경찰관 징계처분에 대한 담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3.1절을 전후한 제주도 사건에 있어서 일부 경찰관이 일부 분자의 모략선전 또는 협박으로 공포심을 느껴 사표를 제출했거나 무단결근, 직무태만한 경위 1명, 경관 8명, 순경 57명 등 모두 66명에 대해 파면조치했으며 그중 경위 1명과 경관 8명, 순경 2명은 포고령위반혐의로 계속 조사중이다.'고 밝혔다.

조병옥 경무부장의 사태진압 자세는 지나치리 만치 강경일변도였다. 심지어 "제주도는 모두 빨갱이 섬."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는 모두 잡아들이도록 했던 것이다.

강인수 감찰청장이 해임되고 후임에 서울대학교 총장비서로 근무한 적이 있는 김영배가 부임했다.
조 경무부장이 사흘간의 내도를 끝내고 돌아간 뒤인 4월8일 제주시내 보통관(옛 제주중앙예식장에 위치)에는 박 지사의 소집에 따라 우익계열의 박우상, 박치순, 양홍기와 이인구 상공과장 이태진 상공계장 등이 참석한 관민합동수습대책회의가 열렸다.

박 지사는 인사말에서 "모든 책임은 지사인 저에게 있음을 통감한다"고 말하고 "하루빨리 관공서의 기능이 회복돼야 하며, 학교가 개학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박 지사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사태가 더 이상 악화돼서는 안된다는 입장들을 보였다.

박 지사는 다음날인 4일9일 오후 안재홍 민정장관으로부터 사표가 수리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박 지사는 이미 사표를 제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동요없이 이임준비를 서둘렀다. 직원들도 예상했던 일이어서 올 것이 왔다는 태도였다.
정부는 박 지사에 대한 후임 발령없이 김두현 총무국장이 도지사 임시 사무를 맡도록 했다.

박 지사 퇴임후 투옥-구속 곤욕....1966년 하향 조용히 일생 마쳐

박 지사는 퇴임 후 일체의 외부출입을 삼갔다.
그러나 뜻밖에 그해 7월 좌익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추대됐다는 소식이 제주신보에 보도돼 제주사회의 큰 화제를 모았다.

이에 대해 박 지사는 "지사 퇴임 후 집에서 근신하던 중에 민전에서 찾아와 공동의장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수락할 의사가 없으며 곧 사퇴를 하겠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난감한 입장에 있다."고 해명했다. 이 바람에 박 지사는 좌익 동조자로 몰려 투옥되는 등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박 지시는 그해 10월 제주신보를 인수,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한때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였으나 '4.3사건'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8년 초봄에 불온전단인쇄사건에 다시 연루되면서 구속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경찰은 제주신보에서 인쇄된 불온전단이 박 지사의 지시에 의해 야간에 윤전기를 이용, 제작된 후 시내에 배포된 것으로 보고 그를 구속했으나 사건이 나기 전에 박 지사가 "제주신보는 앞으로 야간 인쇄작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지시한 내용의 기사가 제주신보에 게재된 신문 스크랩이 발견됨으로써 연루혐의를 겨우 벗을 수 있었다.

박 지사는 4.3사건 때에는 선무공작대로 뽑혀 입산자들에 대한 무장해제와 하산독려에 나서기도 했다.
좌익과 우익의 틈바구니에서 숱한 갈등을 겪어야 했던 박 지사는 1949년 가을 서울에 임시 거처하다가 6.25동란이 일어나자 부산 피난 가운데 부친 박종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1966년 하향한 뒤에 제주도정자문위원장을 지내는 등으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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