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소리]어머니와 누나 남동생은 '총살'...큰형은 마산형무소 수감중 '행불'

4.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를 함으로써 55년의 한(恨)이 마침내 녹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말못할 고통과 충격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을 삭이지 못하는 재외 4.3유족들이 있다. 미국에 있는 이도영 박사가 '살아남은 자의 소리'란 제목으로 미국에 있는 4.3유족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편집자주]

이한진씨와는 2001년 2월 4일 뉴욕 아스토리아 메너에서 제주도민 신년 하례회에서 만났다.
이씨는 본적을 제주읍 화북리 1489번지로 기억하고 있으며, 1937년 생으로 국민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다. 식구는 3남 3녀였다.
어머니와 누나(이연옥 16세)는 4.3때 서북청년단에 의해서 마을에서 총살당했다. 비석거리 굴렁진 밭에서 총살이 집행됐는데, 동네 노인들, 국민학교 학생들을 총집결시켜 관람케 했다. 누이는 총에 맞고도 목숨이 붙어 있었는데, 결국은 죽어서 어머니와 같이 묻혔다.

큰형 이한빈(31세)은 민보단장(우익 관제 단체)으로 역할을 해 왔으나, 동생 이한성의 입산 문제로 주목을 받았다. 상부로부터 동생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결국 그 문제로 민보단장 직을 사임했고, 경찰에 자수하였다.

이한성은 정뜨르 비행장에서 총살 암매장되었다는 소문을 들었고, 큰 형 이한빈은 주정공장 창고에 수감되었다가 LST에 실려 나갔다. 실려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부두에 나와서 목격하였지만, 행선지를 알지 못하였고, 형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주정공장 창고가 비었기 때문에 모두 같이 간 것으로 알 뿐이다.

이한진씨는 어렸지만, 형님들을 자주 면회 갔었다. 면회를 가도 먼 발치서 바라만 볼 뿐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제주도청 총무과에 고모부가 있었다. 고모부가 육지 각 형무소를 수소문하면서 다녀 봤지만 찾지 못하였다. 아마 수장되었을 것으로 알고 그렇게 지내왔다.

후에 형님과 같이 육지 형무소로 갔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누님이 그 분 이름을 알 것이다. 현재 누나 이한옥(약 74세)씨가 제주에 살고 있다. 그분은 마산형무소에 있다가 풀려 나온 사람이다. (필자주: 마산형무소에 갔다가 풀려 나온 약 100명의 제주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원래 대구형무소에 복역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형무소로 이감된다. 부산형무소에 이감된 제주인 중 3분의 2 가량은 총살 암매장되었고, 나머지 100명 정도가 마산 또는 포로수용소로 이감되었다가 정전 후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제주인 중에는 자신의 죄가 너무 억울함을 호소하자, 부산형무소에서는 항소를 받아들여 그를 고등 법원이 있는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감했다. 그는 거기서 대구 형무소 정치범 처형시 같이 총살 암매장되었다.)

이한진 씨는 현재 미국에서 조그만 그로서리 델리 상점을 경영하며 부부가 살고 있다.

필자가 1949년도 제주지방검찰청 자료인 「수형인 명부」와 제주경찰국이 작성한 「죄수현황 보고서」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한빈(31세) 씨는 '15년 징역'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이었고, 이한성(26세) 씨는 '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한진씨 친구 고영춘은 토벌대가 동네에 들이닥치자 낭간 밑 통풍 구멍으로 숨어들다가 서북청년단들에게 붙들려 삼양국민학교 교정에서 마을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되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숨은 것은 아니다. 10세 가량의 어린 학생이었다. 동네 젊은이들은 멀리서 토벌대가 오는 것이 목격되면 바닷가로 도망쳐서 숨곤 하였다. 붙잡히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 현재 살아남은 누님도 서북청년단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한진 씨도 어렸지만 고문을 당했다.

<이도영의 뉴욕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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