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떤 신발 신었어?"
거의 꾸지람 수준의 물음이다. 연신 발 아래만 처다보고 도통 질문을 해도 받아 주지 않으신다.

"어려서부터 메이커에 길들여져 아무리 좋은 신발을 만들어도 하찬케 봐"
역시 내가 신은 신발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으시는 거였다.
중앙로 횡단보도를 옆. 무심히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사이로 2-3 평 남짓한 구두가게가 있다.

"이거 이래뵈도 30년은 족히된 가게여"
큰 건물에 난 조그만 틈에 차린 가게는 거기 걸린 간판보다도 작아뵌다.
"사람들은 메이커에 길들여졌어. 기성화된거야. 나처럼 직접 손으로 신발 만드는 사람, 이제 거의 없을 걸"

"그럼 왜 만드세요?" 아차 싶었다. 내가 물어보고도 굉장히 무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할 게 있나, 뭐 50년 해 온 일인데 그냥 하는 거지"
50년. 이 분은 50년을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셨다.
"이름은 알아서 뭐할라고, 그냥 구두 만드는 사람으로 하지", "엇 그러면 글이 이상해 지는 되요? 말씀해 주시죠", "아냐 됐어, 그런데 아까 왜 왔다고 했지?"
"제가 예전에 이 가게에서 신발 살 때, 왜 신발 꺽어신냐면서, 메이커 신발 길들여지니까, 버리면 새거 산다고 막 신네라고 꾸짖으셨잖아요. 그래서 그런 애기 더 듣고 싶어서 왔다구요"

"같은 가격이면 다 메이커지 도무지 이런데서 만든 신발은 하찮케 봐"

'아까 말씀하신 말인데 또 하시네' "메이커 신발이 왜 나쁜데요?"
"나쁘다는 애긴 아냐, 근데 큰데서 만드는 신발은 다 분업해서 만들지. 칼질하는 사람은 왠 종일 칼질만 하고, 고수리(구두 틀을 따는거)하는 사람은 그것만하고 자기가 뭘 만드는 지도 모를 거여(웃음)"

"대량 생산 할려고 그래, 기성화 하는 거지. 그러면 많이 만들어서 많이 벌잖아. 수량으로 구두 만들어 내지, 신는 신발이라고 만든거라고 생각 않해"

"신발 그렇게 만들어서 되겠어, 신발은 옷이나 집과 같지, 몸에 맞아야 하는 거야. 그런걸 완전 기계 덩어리에 내 맡기는 거지, 사람들이 점점 기성품에 익숙해지다 보면 다 똑같아지지"
"사장님들은 돈 많이 벌겠네요(웃음)" "그렇겠지 뭐, 그래서 취직 자리도 생기기도 하겠고 뭐 다 그렇게 사는 거지(웃음)"

대학 때 컨베이너 밸트에 매달려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현대자동차 생산 공장 사진을 본 적이 기억났다. 그렇게 신발 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은 무엇을 만드는 지도 모른체 하루 종일 일하는 거라 생각됐다.
신발 공장 노동자들 그렇게 되겠고...

"이거 고리거든, 이게 신발 만드는 틀이야, 먼저 신발 주문한 사람의 발을 본을 떠, 그런 다음에 이 틀에 대보고 모자라면 이 고리를 때우고 넘치면 자르고 해서 그 사람 발에 딱 맞추지. 나처럼 숙련공도 한 켤레 만드는데 한 2-3일 걸려. 이 고리가 255mm야. 공장에선 이 고리에 맞게 계속 신발을 찍어내지, 그럼 사람 발이 이 고리에 맞추는 거지(웃음) 여기 앉아서 사람들 지나가는거 보면 신발 크기 다 알수 있거든. 젊은 사람들은 요새 자기발 두배되는 신발 신고 질질 끌고 다니데, 그거 건강에도 않 좋아"

"어떻게 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돼셨어요?"

"원래 고향은 진주야, 한국전쟁 때 부모를 따라 제주도로 피난 왔지. 그때가 내가 9살 때지. 10살이후부터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어, 그런데 뭐 공장이 있어, 이발소가 있어, 일할 때가 마탕치 않잖아, 그래서 12살 땐가 양화점에 취직해서 청소도 해주고 하면서 구두 수선일을 배우기 시작했지"

"여기 중앙로에서 30년 하셨으면 중앙로에 대해서 많이 아시겠네요?"
"내가 여기 터주대감이지(웃음) 박정희 때 여기 도로 낸 뒤로 하나도 안 변했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집들은 없어지고 가게만 생긴게 달라진거지"

도로가 나면서 도로 주변에 상권이 밀집하니까 땅값 때문에 집들이 변두리로 밀려 나는 것, 이 것을 말씀하시나 보다.

"여기 대모도 심할 텐데"
"아이구 심하지 80년에엔 학생이건 노동자건 으싸으싸 많이 했어. 그럼 막 최류탄 날라다니고 골목마다 전경들 깔리고 야단나지"

"기억나는 일 있으세요?
"대모 시작하면 문 닫고 가벼려서 별로 기억은 안나는데, 80년대 중반인가 '전두환 물러가라'며 대학생들이 전경하고 싸운적이 있어. 그 때 정말 심각했어"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들 살려고 그러는 건데 뭐, 근데 요새 대모는 그 때같이 않아 자기들만 생각하는 거같애"
"네, 그러세요" .....

"있는 사람들은 '발품도 안 팔 잖아, 그래서 이런데도 안와" "네?" "좋은 차 타고 좋은 사무실에서 전화나 받을 건데 신발이 닳나 어디? 그러면서 '아 역시 메이커 신발이니까 오래 신데'하고 좋아들하지. 근데 그 신발 신고 막노동판에 가봐, 그러면 내가 만든 신발이 얼마나 오래가고 질긴지 알 거야"

'이야기를 바꾸시는가보다, 그럼' "그렇게 질겨요?"
"같은 가격이면 이게 낫지. 여기 오는 사람들다 막노동판에 있는 사람들이나 농민들이 많이와, 그 사람들이 신는데, 그럼 안 질기면 되?"

"아까도 요 금방에 종업원 와서 신발 수선 맡기고 갔어, 여긴 다 그런 사람들이 찾아, 있는 사람들은 오지도 않겠지만 메이커만 좋다고 여기 있는 구두들 없신 여겨, 그래서 나도 자존심 있어, 안 만들어 줄거야(웃음)"

"아 어디 컴퓨터에 실은 다고 했지? 그럼 이말도 실어죠. 요새 한 20-30원 싸다가 콩나물도 마트 가서 사는 사람들 있어, 동네 가게 가야지, 동네가 잘되야 자기도 잘되는 거야, 아 또 농촌이 어려운데 제주도는 머니머니해도 농촌이 잘되야되. 어디 농촌 없이 살아가"

9월이 넘었는데도 햇볕이 따갑다. 중앙로 리어커 과일 장수가 손님하고 과일 흥정을 하면서 주위 시선은 아랑곳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중앙로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졌다. 다시 사람들이 밀려오고 가고 느닺없이 귓가에 '청계쳔 8가'가 맴돌았다.

"덥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 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