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뉴욕통신]정뜨르 비행장 유해 출토에 대한 나의 소견
김희전 양봉석 선생, 예비검속으로 해병대 총살 암매장 추정

▲ 제주국제공항(정뜨르비행장) 내 학살터에서 완전 유해 36구가 나왔다. 이날 사진속의 완전유해 1구는 수습뒤 운구됐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2007년 11월 14일자 <제주의소리>에 의하면, 정뜨르 비행장 유해발굴 현장에서 36구의 온전한 시신들과 그 유품들이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유해의 사진들을 접하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국만리에 살면서도 나는 1948년 ~ 1949년 '4.3 항쟁'과 1950년 '한반도 전쟁' 동안 행방불명이 되어 고향 제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집착하여 오고 있다. 이들을 밝혀 줄 문서나 증인들이 있다고 하는 곳은 국내외 방방곡곡 뒤지면서 찾아 다녔다.

이번 출토에 대하여는 아래와 같은 소견을 말하고 싶다.
김희전 선생과 양봉석 선생의 인장이 발견된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이 분들은 제주 산남 지역에 예비검속되었다가 1950년 7월 26일(음력 6월 12일 경) 당시 계엄사령부인 해병대에 의해서 총살 암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 4.3유족들이 현장에서 발굴된 유류품들을 바라보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성산포 경찰서 (문형순 서장)에서는 6명의 예비검속자가 해병대에 트럭에 실려서 "서귀포 방향으로 갔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 트럭은 다시 서귀포 경찰서(김호겸 서장)에서 그리고 중문 지서 등지에 예비검속된 이들을 싣고 다시 모슬포 경찰서(강규하 서장)로 향한다.

내가 수 년 동안 수소문하고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서귀포 경찰서와 중문지서에 예비검속되었던 공무원 김여문(39.서귀포 서귀리.남도 농회기사), 김익선(25.서귀중교 준교사.서귀포 서귀리), 이재준(27.모슬포 하모리. 당시 거주 서귀포 서귀리. 서귀국교 교사.최근까지 생존), 양규팔(28. 중문면 상계리. 예리국교 준교사), 이경주(29. 중문면 중문리. 부문중학교 교사), 원문상(43. 중문면 중문리. 부문중학교 교사) 등이다.

그리고 모슬포 경찰서에서 예비검속되었던 350여명 중에 같은 날짜에 행방불명된 일부 명단이 수소문 끝에 필자에 의해서 작성이 되었다:

정태훈(20세 가량. 대정면 상모리. 농업), 김승병(20세 가량. 상모리. 대정국민학교 강사), 허재훈(?. 상모리) 등 [김순후씨 증언에 의함].

모슬봉 북쪽 동네인 신평리에서는 여섯 분의 같은 날짜 행방불명자가 있다. 강경도(신평리 362), 박계식(신평리 586), 김창욱(신평리 681), 김태은(신평리 591), 송대길(신평리 571), 김창범(신평리 580) 등이다. [필자의 대정 중고 동기생인 김태홍(신평 출신, 현재 하모리 거주)씨가 필자의 부탁을 받고 수집한 명단임]

당시 모슬포 유가족들은 “해병대 군 트럭 한 대분의 사람들이 실려서 모슬포 서쪽 방향으로 갔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 날짜가 음력으로 6월 12이었기 때문에 그 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군 트럭 한 대에는 약 40~50명의 승차가 가능한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정뜨르 비행장에서 이번 발굴된 유해의 숫자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윤세민 전 교장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대정국민학교 교장과 교사들이 예비검속 되었고 윤 선생도 함께 예비검속되었다고 한다. 교장과 윤세민 선생 그리고 고시수 선생 등은 석방되었는데, 이태실(이유근 전 한마음 병원 원장의 숙부) 선생과 김희전 선생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고 윤세민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살아남은 자>의 변을 덧 붙였다 [2000년 8월 8일]

이태실 선생과 김희전 선생은 모두 섯알오름 기슭에서 학살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고 <백조일손> 위령제를 함께 지내오고 있다.

가능하다면 이번 발굴된 유해와 현재 생존하고 있는 자녀들의 유전자를 감식할 수 있다면, 나의 이 소견이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시 가해자의 주최였던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 김두찬(해군 중령)은 서울 근교에 생존해 있으며, 필자가 보낸 <질의서>에 엉뚱한 <회신서>를 보내왔으며,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나는 신병 모집에만 전념했다"고 총살암매장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제주신보>(1950년 8월 13일자)에는 김두찬 정보 참모는 군법회의 재판장으로 두 명의 탈령병에게 '사형'과 '무기형'을 언도한 기록이 나온다.

▲ 이도영 편집위원
아직도 그리고 늘 나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화두가 되어 있다. 그 추적은 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나는 그 기록을 남겨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말할 수 없었던 한반도 전쟁>이란 가제를 붙여 놓고 출판 준비 중....우선 <대전 형무소 '정치범' 처형> 사건 진상조사 '완결판'을 먼저 내놓을 예정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약속'을 다짐해 본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성경: 누가복음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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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필자에게는 유별나게 기다란 타이틀이 붙여져 있다, 우리 유족들에 의해서:
<한국전쟁 예비검속에 의한 피학살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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