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들고 조정철의 제주 유배생활 엿보기3

정헌 조정철은 1777년 정조시해 건과 연류되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로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제주에서 죄인으로 지내는 동안 '홍윤애'라는 여인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 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26년간의 제주 유배 생활 못지않게 처절하여 듣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그는 정조의 시대가 지나고 순조대인 1803년에 내륙인 광양으로 양이(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던 일) 되고, 1805년 3월에 구례로, 1807년 5월에 황해도 토산으로 이배(귀양살이하는 곳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되었다. 그러다 그해 석방되면서 정언으로 복관되었고, 1811년에 제주목사겸전라방어사로 명을 받아 1년 동안 부임하였다. 27세에 유배되었던 섬에 환갑이 넘어 다시 목사가 되어 찾아왔던 것이다.

조정철은 제주 유배기간 자신의 심정을 시와 수필로 기록하였는데, 이것들을 모아놓은 시문집이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이다. 올해에 마침 '제주문화원'에서 이 책의 한글 번역판을 출간했기에 읽고 기사를 작성할 수 있었다. '제주문화원'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기자주>

소론파였는 제주목사 김시구는 전라감사 박우원과 내통하면서, 제주 삼읍에 흩어져 있는 유배인들을 물샐틈없이 염탐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였다. 당쟁이 극에 달한 시기였기라, 기회가 있을 때 반대파의 씨를 말리기 위함이었다.

박우원은 김시구의 보고를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임금에게 보고했으니, 조정철은 그 보고내용에 ‘무고함이 끝이 없다’고 했다.

어사 박천형이 조정철을 조사하는 죄목은 7가지가 있었는데, 조정철은 대부분 죄목에 대해 불복했다. 그러자 “스스로 큰체하기 위해 손님도 만나지 않으면서 의관을 바로 한다”는 둥, “반찬 차리고 밥을 먹었다”는 둥 그의 약점을 캐기 위해 사건과 별 연관이 없는 사안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 대목에서 조정철은 “성상께서 인자하게 밝히시지 않았다면 살아서 옥에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지옥 같은 심문 끝에 그의 무죄가 밝혀졌다. 옥에 갇힌 지 100일이 되는 날 조정철에 대해 ‘사형을 면하고 배소를 옮기라’는 임금의 명령이 도착했다. 출옥하는 날 새벽에 관아 마당을 나오면서 그는 당시 자신에게 가해진 문초를 ‘뼈와 쇠 녹이는 너무한 헐뜯음’이었다고 기록했다.

정의현으로 이배되기 전에 조정철은 주로 제주 동문성 주변에서 사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당시 제주과원에 있는 귤의 품종을 유감, 별귤, 대귤, 당금귤, 동정귤, 소귤, 당유자, 감자, 금귤, 유자, 산귤, 지귤, 등자귤, 석금귤 등으로 구분하여 그 특징을 기록해 두기도 했다.
  

▲ 오현단 과거 이곳에는 귤림서원이 있었고, 인근에는 넓은 과원이 있었다. 귤림서원에서 우암송시열을 비롯한 다섯 선비를 배향했기에, 조정철을 이곳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 ⓒ 장태욱

또 귤림서원의 유생들에 대해서는 “우암(송시열)의 뜻을 따르는 무리는 사랑하고 우암을 배척하는 무리를 미워한다”며, “탐라의 유생들이 지향하는 바가 매우 바르다”고 칭찬했다. 정의현으로 이배되는 날도 그는 귤림서원을 바라보며 감회의 시를 남긴 것을 볼 때, 그는 노론의 대부 격인 송시열을 배향하는 귤림서원을 통해 정신적 위안을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년 귤림원
다섯 선생을 제사 지내네
세상 운 성쇠와 관계되어
유풍(儒風)의 어둠과 밝음 점치리오
서성이노라니 측은한 옛 우물
슬퍼하며 외로운 성 떠나네
여러 현인을 근본삼기 바라니
누가 이 나그네의 성성과 같을까.

그는 조정의 명를 받고 정의현으로 이배되었다.  
   

▲ 조천읍 와흘리. 조정철이 정의로 유배가면서 이곳을 지났다. ⓒ 장태욱

그가 정의로 이배가는 길은 제주시 동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제주에서 6년간 바다를 보지 못했다가 이배의 명을 받고서야 동성에 나가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지금의 건입동에 있는 고닛모루에서 “높은 데 오르니 서글퍼 자주 고개 돌리며 바다에 뜬 달 몽롱히 배웅하는 나그네의 수임인양”이라며, 슬픔을 시로 남겼다.

제주성을 빠져나온 조정철은 말을 타고 지금의 화북2동에 해당하는 거로마을을 넘어 봉개마을에 이르자, 스스로 “죽다가 살아난 것 꿈만 같아 동서로 정처 없이 떠도네”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남겼다.

그의 이배 길은 봉개를 지나 가는새(동회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길은 궷드르(조천읍 와흘리)를 지나 와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와산을 지나자 송당이 가까워 오자 날은 어두워졌다.  
  

▲ 약초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백약이오름이라 부른다. ⓒ 장태욱

송당을 지나 성읍에 이르기 전에 백약이오름이 있다. 백약이오름은 약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조정철은 당시 이곳을 수봉(秀奉)이라 기록했다.

축축한 안개 온통 하늘을 덮고
사나운 바람 온종일 울리네
슬픔과 한 됨 시가 되고
병은 이미 돋아 나네
천년 된 늙은 고목
띠풀 온 길에 무성히 얽혀
뽕나무 밑에 다하지 못한 연분
머리 돌리니 도리어 마음 상하네.  
  

▲ 옛 정의현청. 증조부인 조태채가 유배생활을 했던 곳에서 조정철도 유배생활을 했다. ⓒ 장태욱

그는 활뫼를 지나 정의현 배소에 도착했다. 증조부가 유배되었던 곳에 자신 또한 유배된 것을 생각하니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과거 정의현청이 있던 성읍은 지금도 일조량이 적고 습기가 많은 곳이다. 조정철은 배소에 도착하자 몸에 독기가 올라왔다고 했다.

정의현감은 이우진에서 이장익을 거쳐 신대년으로 이어졌다. 이들 정의현감들은 제주목사와 전라감사에 잘 보이기 위해 죄인들의 약점을 캐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조정철의 기록에는 “유배인을 감시하기 위해 15명을 번을 정하여 세웠고 밤이면 묵과 책, 외인왕래를 탐색하고 죄인의 의복을 만든 기록과 들여온 것을 대조하며 죄를 캐려 하였다”고 적혀 있다.
  

▲ 옛 정의현 성 안에 있는 세칸 초가다. 지금은 이곳이 성읍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관리 보존되고 있다. 조정철도 세칸 초가인 김응귀의 집에서 생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장태욱

감시에 불안을 느낀 조정철은 자신의 기록물들을 일부 이웃집에 숨겨 놓았는데, 그마저도 불태워버려 많은 시문들을 잃어버렸다. 조정철은 “마음 속 그려 낸 시문 잿더미 되어 애석하구나, 나의 삶 만사가 간난이니”라고 슬퍼했다.  
  

▲ 조정철은 홍윤애가 죽은 지 31년 만에 제주목사가 되어 부임했다. ⓒ 장태욱

그러던 중 금부도사가 조정철의 죄를 조사하기 위해 제주에 도착했고 그의 집주인인 김응귀가 관아에 끌려갔다. 당초 우려와는 달리 김응귀는 매도 맞지 않고 방면되어 돌아왔다. 극심한 두려움과 위기감에 그는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내며 더 이상 시를 짓지 않으련다”는 고백을 끝으로 유배 도중 더 이상 시문을 짓지 않았다.
  

▲ 조정철은 부임하자마자 홍윤애의 무덤을 찾았다. ⓒ 장태욱

조정철은 그 후 1790년에 추자도로 옮겨졌고, 1803년에 전라도 광양으로, 1805년 3월에 전라도 구례로, 그해 5월에 황해도 토산으로 이배되었다가 7월에 정언으로 복직되었다. 그 다음 1811년에 전라방어사 겸 제주목사가 되어 한 맺힌 제주에 부임하였다.

그가 제주목사로 부임한 해는 홍윤애가 절명한 지 31년만인데, 조정철의 나이 환갑(61세)에 이른 때였다. 그는 오자마자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가 애도시와 비문을 지어 묘비명을 새겨주었고, 남아 있던 자신의 혈육을 찾았다.  
  

▲ '홍의녀지묘'라 써있다. 뒤에는 조정철이 지은 비문이 남아있다. ⓒ 장태욱

묻힌 옥, 숨은 향기 문득 몇 년이던가
누가 그대의 억울함 푸른 하늘에 호소하리
황천길 아득한데 누굴 믿고 돌아갔나
정의의 피 깊이 감추고 죽음 또한 까닭이 있었네
천고에 아름다운 이름들 형두꽃처럼 빛나며
한 집안에 두 절개, 형제가 현숙하여라
젊은 나이의 두 무덤, 이제는 일으킬 길 없고
푸른 풀만이 말갈기 앞에 돋아나는구나.

‘한 집안 두 절개’란 홍윤애와 더불어 홍윤애의 언니가 품은 절개를 말한다. 홍윤애의 언니는 참판 이형규의 부실이었는데, 이형규가 죽자 독약을 먹고 순절했다고 한다.  
   

▲ 제주시 전농로 토지공사 앞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제주농고가 들어서면서 홍윤애의 무덤은 애월읍 유수암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토지공사에서 삼성초등학교 후문에 이르는 좁은 도로를 '홍랑로'라 한다. 홍윤애의 흔적이 아직도 남있다. ⓒ 장태욱

조종철과 홍윤애 사이에는 딸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조정철이 목사로 부임했을 당시에 딸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리고 사위 박수영도 그가 도임하던 해에 죽고 말았다.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온 이듬해 동래부사로 떠난 후, 충청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헌을 거친 후 1831년 5월 19일 지중치부사로 숨을 거두었다.

홍윤애의 무덤은 현 주소로는 제주시 삼도1동 전농로에 있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는 ‘홍랑로’라는 도로명이 있어서 홍윤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1932년에 이곳에 제주농고가 들어서면서 무덤은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되었다. 홍윤애의 무덤은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위였던 박수영의 후손들이 관리해왔다.
  

▲ 한라산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홍윤애의 무덤에서 바라본 한라산의 전경이다. 억새꽃 너머 보이는 한라산이 아름답다. 이 곳에서는 바다도 훤히 내다보이는데, 배산임수의 조건이 잘 갖춰진 곳으로 보인다. ⓒ 장태욱

한편 경북 상주시 함창에는 조정철과 홍윤애를 배향하고 있는 함녕재가 있는데, 양주조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야기를 따라 여행지를 결정했습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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