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이 만난 사람(6)] 4.3 블록버스터 '한라산아' 임원식 감독

▲ 20여년만에 4.3블럭버스터 영화를 갖고 나타난 임원식 감독.
언제인지 벌써 기억이 희미하지만 6년 전인 것으로 추정된다. 98년 2월인가, 주택공사 측의 준비소홀로 화북 주공아파트 입주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자가 소속된 참여환경연대(당시 ‘범도민회’)는 아파트입주자 권리찾기운동 차원에서 지원싸움에 나선 바 있다.

당시는 주택공사와 피해협상을 하려면, 입주자들의 대표조직이 시급히 꾸려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단지 내에 있는 동화초등학교 강당에서 대책위원회 구성과 관련한 전체 입주자회의를 소집했다.

많은 사람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지만 격앙된 분위기 속에 중구난방의 의견만 난무할 뿐이었고, 누가 대표단의 역할을 해야 할 지 스크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입주초기라 입주자 개인의 신상명세는 물론이려니와 이들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파악도 전혀 불가능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개인 신상명세와 자질 판단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칫 대표단을 잘못 구성했다간, 지도부가 주택공사 측에 회유되거나 또한 당시 격앙된 분위기에 휩쓸려 협상과정에 이성 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대책을 내놓음으로서 결국 입주자들에게 피해를 입힐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몇 분이 발언을 하는데, 구석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면서도 은퇴한 교장선생님같이 보이는 분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로서는 시간이 없어 모험을 걸어 보기로 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필자 임의대로 “이분을 대표자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추천하여 참석자들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고 그때부터 그 노신사가 화북 주공아파트 입주자대표로 활동하시게 됐다. 이후 주공 측과의 만남에서도 당당하면서도 원칙을 잃지 않는 협상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흐뭇해하며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참여환경연대가 중재를 서긴 했지만, 결국 입주자들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 임원식 감독은 언제 봐도 웃음을 놓지 않은 젠틀맨이다.
것은 바로 이 노신사의 역할이 컸었음을 지금도 필자는 확신한다.

이를 인연으로 본회 회원이 되고 필자와의 관계도 시작되게 된 그 노신사, 그가 바로 임원식 감독이다.

그로부터 6개월 정도가 지난 8월 경 제주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 자리에서 임감독을 만났다. 분과토론에도 열심히 참여하시는 것을 보며, "어떻게 저 분이 이 행사에 참여했을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참여했으려니"하며 행사장에서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4.3과 관련한 세미나 등 각종 행사장에는 빠지지 않는 그를 보게 된다.

1~2년여가 지나 임감독이 4.3영화 시나리오를 들고 나타났다. 4.3영화를 만드시겠단다. 사실 그 때만 하더라도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란’에 대해 크게 실망을 하고 있던 터라, 그 보다 더 중요한 소재인 4.3을 잘못 건들게 되면 안 다룬 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에서 임감독이 자문을 요청할 때도 신중히 검토해 주었으면 한다는 식으로 피해갔다.

이후 임감독께서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이 됐다는 소식, 그리고 제주도영상위원회(위원장 도지사) 상임부위원장겸 운영위원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의 왕성한 활동에 박수를 보내며, 제주영상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내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감독이 4.3영화는 포기한 줄 알았다.

그런 그가 며칠전 4.3영화 ‘한라산아~’를 들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150억이나 투자되는 ‘블록버스터’다.

참여환경연대 13주년 행사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임감독, 서류봉투에서 ‘한라산아~’ 제작기획서를 꺼내 주시는 것이 아닌가? 다른 손님들이 많아 길게 얘기를 하지 못하고 아쉽게 헤어졌다가, 공식 제작발표회가 끝난 후 22일 오후 제주의 소리 사무실로 초청했다.

언제보아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하며 젠틀한 모습이다.


▲ 이지훈 제주의 소리 편집위원
-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감독님은 전혀 늙지 않으시네요.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꽤나 시간이 흘렀지요?

98년 2월경일 꺼예요. 내가 입주하고 있는 화북주공아파트가 관리소홀 문제로 입주자들이 대책위를 구성해 들고 일어섰을 때였지요.

- 제가 기억하기로는 입주자들이 화북에 있는 주공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동화초등학교에 모여 있을 때였을 겁니다. 입주자 분들이 몹시 흥분한 상태였지요. 회의 당시 젠틀한 분이 뒷자리에 앉아 계셨는데...(웃음)

그 전날 3단지 앞에서 대책위 분들이 철야농성과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저러나 알아보았더니 하자보수 문제 등 입주자들이 너무 열악한 조건이었지요. 추운 겨울날 항의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편하고 아름다운 아파트단지에 살려고 했는데 이런 문제가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범도민회는 이런 입주자들의 소식을 듣고 열심히 도와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회의에서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이대표께서 회의를 주관하시면서 “이 문제는 우리(범도민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고, 여러분들이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대표를 선출해야 하는데, 그때만 해도 공동생활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어려웠지요. 대표님께서 저를 지적해 얼굴이 벌게져 있는데, 느닷없이 회장을 맡으시라고 해서 얼떨결에 대표를 맡았습니다.

- 죄송합니다만 관행적인 질문인데, 연세는 어떻게 되시나요? 가족관계도 잠깐 말씀

▲ 지난날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임 감독
해 주시죠.

나이를 물어보면 일하는데 지장이 있습니다(웃음). 아직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밝힐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가족은 2남 1녀를 두고 있고, 현재는 처와 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들은 둘 다 영화감독을 하고 있습니다. 큰 아들 임종호는 애니메이션 감독을 하고 있고, 둘째 임종재 감독은 독립영화를 주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별로 흥행과는 거리가 멀어요. 학교다닐 때 데모나 하더니(웃음)...

(임종재 감독은 ‘그들만의 세상(이병헌,정선경,유오성등 출연)’을 만든 감독이다)

- 3부자가 영화감독이시네요. 피는 못 속이는 건가요? 그건 그렇고 임감독님께서는 언제까지 현역감독(표현이 정확할지 모르지만)으로 재직하셨고, 마지막으로 제작한 작품은 무엇입니까?

83년에 찍은 ‘도시로 간 처녀’가 마지막입니다. 버스여차장에 대한 인권을 다룬 영화였는데 정권의 탄압으로 9일 만에 종영됐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박해하는 방법이 다르더라구요. 유신 때에는 무조건 잡아다가 족쳤는데, 5공때는 어용단체를 통해 박해했습니다. ‘도시로 간 처녀’를 한국노총 산하단체인 자동차노조에서 들고 일어나, 자기들의 인권을 해치는 영화라며 극장상영을 반대했습니다. 당시 우리 영화사(태창)는 문공부(문화공보부)를 통해 경찰에 보호 요청을 했지만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상영 9일만에 간판을 내렸지요. 그 후 후유증이 컸지요. 당시 제 영화는 ‘직배’했었는데 전국 상영관이 한꺼번에 영화를 내리면서 손해배상 청구가 들어왔습니다. 그 금액이 매우 컸습니다. 아마 태창영화사 임원식을 죽여야 되지 않겠나는 작전에 의한 것 같아요. 할 수 없이 파산선고 신청하고, 제주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90년까지 기독교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 ‘도시론 간 처녀’ 외에도 영화제작과 상영에서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내가 평집사였을 때 순교자 열전을 읽고 만든 영화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란 기독교 영화였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교회의 지원을 받은 최초의 극장용 기독교 영화로,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신반대 세력이 가장 많은 곳이 기독교단체였습니다. 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이 쫓겨나기도 하면서 박해를 받았었지요.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이 영화는 정권으로부터 유신반대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감독들은 영화를 개봉할 때 제1회 상영시간표를 아침에 7장 사서 나눠줘야 한다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봉날 표를 사러 극장에 갔었는데 간판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합동영화사와 극장에 찾아가 항의하자, 중앙정보부에서 간판을 내리게 했다는 겁니다. 이후 남산 지하실에서 며칠간 고생하다 풀려난 적도 있었습니다.

▲ 임 각독은 자신이 죽기전에 4.3영화를 만드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 고생 많이 하셨네요. 어쨌든 기독교 영화를 제외하고 20여년 만에 장편 극영화를 만들게 됐는데,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제가 제작 감독한 작품이 총 38편입니다. 입에 담기도 싫은 작품도 있지만, 태창영화사 끝내고 22년 만에 메가폰을 잡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쁘고 좋지만 심리적 압박과 부담감이 있습니다. 62년도 초청으로 아무도 모르는 홍콩에 처음 내릴 때 심정과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만들고 관객들과 공감할 수 있을지 등 설렘도 있습니다.

- 4.3영화를 만들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2000년부터니까 꼭 4년 전입니다. 전부터 준비해오다 검증을 받고 싶어서였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98년도 평화인권학술대회를 참석한 후부터 4.3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 분임토의 과정에서 받은 느낌과 감동을 통해 “죽어도 4.3 영화 하나는 만들어서 죽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 그 결심 이후 4~6년이라는 준비기간이 있었던 셈인데요. 이제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예전에는 제작자가 직접 돈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지만, 최근에는 패턴이 바뀌어 투자자들을 모집해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저는 당초 4.3 영화를 10억 정도 내외의 저예산 영화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1~2억 정도는 내가 투자하고 나머지는 후원자나 진흥기금 등 국가나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시작하려 했었지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삼일회계법인 김명현 상무이사를 소개받게 된 것입니다. 삼일회계 법인 측에서는 당초 애니메이션 분야에 투자하려다, 나의 시나리오를 보고 “희소가치 소재다” “왜 이런 소재가 진작 영화가 되지 않았나”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처음 삼일회계법인을 방문했을 때 얼마 정도가 필요하냐 묻기에 “30억 정도 필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정도면 안되겠습니다”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너무 많이 불렀나?” 속으로 고민하는데, 금액이 너무 작다는 거예요. 처음엔 “이 사람들이 나를 갖고 장난하나” 생각했었습니다(웃음).

- 영화를 만들기 위해 4.3 공부도 열심히 하셨을 것 같은데...

4.3에 대한 학술모임이나 심포지엄이 있으면 도내외 가릴 것 없이 쫓아다녔습니다. 또한 4.3단체들이 집회나 행사를 벌일 때에도 빠져본 적이 없구요. 그리고 도내 유적지도 안 가본데 없이 다 돌아다녔습니다.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한 셈이지요. 특히 제가 4.3영화를 만들겠다고 하자 고유기 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이 조성봉 감독이 제작한 4.3 다큐멘터리 ‘레드헌트1.2’를 빌려 주었습니다. 레드헌트를 보고 제주출신도 아닌(부산출신) 감독이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데, 나는 뭐하고 있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 얘기가 나온 김에 묻습니다. 감독님은 오현고를 나와 일반적으로는 제주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이북태생이시지요?

황해도 평산이 고향입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와 고향이 같지요. 1950년 당시 서울 휘문중에 다니다 한국전쟁이 나자 제주도로 피난 오게 됐고, 오현고에 편입했습니다(오현고 2회 졸업). 오현고 다닐 때가 내 정서상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여기서 집사람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 (웃으며) 감독님이 사모님을 쫓아 다니셨나요?

집사람은 당시 제주여고 학생이었고 연애로 만났습니다. 아마 우리 집사람이 저에게 반했을 걸요(웃음). 당시 제가 길가를 나서면 여학생들이 저를 쳐다볼 정도로 공부든 싸움이든 운동이든 잘했거든요(웃음).

- 4.3과 떼어 놀 수 없는 것이 서북청년단인데, 가해자인 그들과 같은 고향인 셈이네

▲ 서북출신인 임 감독은 가해자는 아니지만 가해가쪽이 결자해지 한다는 입장에서 4.3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다.
요.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아무튼 ‘가해자 쪽’이라고 불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해자 쪽에서 결자해지 입장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오히려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최근 과거사 청산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 일제에 부역하고 군사독재 체제 수호에 앞장섰던 이들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4.3도 마찬가지다. 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정부차원의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됨은 물론 대통령까지 나서서 사과하는 마당에 정작 학살의 책임자들은 한마디의 사과도 없는 현실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당사자도 아닌 임감독이 같은 고향출신이라는 이유로 이를 대신해 진실을 규명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 하다. 진정한 상생과 화해를 위해서는 가해자들이 먼저 풀어야 하는 게 순리가 아닌가)

- 어떠한 상품을 수출하는 것 보다, 한나라에서 제작된 제대로 된 영화만큼 그 나라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4.3과 관련한 여타의 국제회의나 토론회를 개최하는 것보다 이와 관련한 감동적인 영화를 만드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러려면 리얼리티도 중요하지만 예술성도 반드시 수반돼야 할 것 같습니다.

20세기에 벌어진 세계 100대 비극에 우리나라에서는 4.3과 한국전쟁이 포함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중 단일 지역에서 인구 1/10 이상이 희생된 지역은 제주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 역사가 그동안 감춰져 왔다는 사실은 민족적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수치를 떨치기 위해서도 반드시 제대로 조명해야 합니다. 과거를 들춰내서 뭐하겠느냐는 시각도 있지만 이 작품을 반드시 성공시켜서 국제적으로도 4.3 문제를 알리고 진상규명에 조금이라도 일조하고 싶습니다.

- 4.3 진상조사보고서가 리얼리티 배경이 되나요?

그렇습니다. 2시간 동안 그 거대한 역사를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에 나와 있는 역사적 배경, 상황 등 보고서에 입각한 대로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흥미와 감동, 예술성 부여를 위해 도입되는 극히 일부 장면을 제외하고는...

(그러면서 임감독은 몇 장면의 사례를 애기해 주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찡~ 해오는 내용이다. 비보도를 전제로 해 달라는 부탁으로 여기서는 공개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 이어 조금 더 예민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 4.3 당시 미국의 역할과 책임을 표현하는 장면도 넣을 건가요?

(이 지점에 이르러서 조심스럽게 입을 떼면서도 분명하게 입장을 밝힌다)

극단적으로 누구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과격한(?) 연대장에게 딘 소장이 진압을 잘했다고 훈장을 주는 장면도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맞는 부분은 분명히 넣을 것입니다.

- (내친 김에, 가장 궁금한 내용, 물어 보았다)  출연 배우로 누구를 교섭하고 계신가요?

아직 개런티 문제로 절충중이기 때문에 밝힐 수 없습니다. 보통 영화를 찍을 때 2~3명 정도의 주연급 배우를 쓰는데, 이번 영화에는 H모, M모씨 등 8명 정도의 주연급 배우를 출연시킬 계획이라고만 말씀드리지요.

- 촬영이 끝나고 나서 테마파크 등을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테마파크는 어떻게 진행하실 예정이십니까?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 난’이 잘됐든 못됐든 간에 그 촬영세트가 없어진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반면에 올인 촬영장은 다시 복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지역이 제주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테마파크의 장소는 점찍어 놔둔 곳이 있는데 삼일 측과 협의 중입니다. 한 30~50만평 규모로...삼일 측도 영화 수익이 어느 정도 되면 그 수익분 모두를 이 테마파크 건설에 재투자하겠다는 전향적 의사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 어느 쪽인지 알려주실 수 없나요?

(웃으며) 동부지역이란 것만 말씀드리죠. 흔히들 4.3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에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영화제작을 잘 모르는 분들이 하는 말씀이고, 가능한 4.3현장에서 촬영하지만 세트장(영상테마파크)은 바다 중산간 한라산을 아우를 수 있는 곳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테마파크에는 4.3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제주역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탐라국’까지 포함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 제주도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이신데 영상위원회 차원의 지원은 없나요?

영상위 규정에 따르면 영화를 만드려고 하는 제작사에 기자재나 사무실 등을 무상으로 임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내가 갖고 있는 직함 때문에(특혜라고 할까 봐) 세무서 사거리쪽에 사무실을 별도로 차렸습니다.

-최근 심형래씨가 제주에 내려와 ‘D-워’를 촬영하면서 지원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촬영 현장에 나가봤는데, 심형래 감독과 같은 영화 시스템이 제주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스템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게임처럼 기간요원만 있으면 가능하지요. ‘반지의 제왕’을 촬영했던 곳이 뉴질랜드 웰링턴입니다. 당시 감독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주정부에 영화를 담당하는 ‘장관’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고,주정부는 이를 수용했습니다. 그 장관은 반지의 제왕이 만들어지는 동안 전권을 갖고 도와줬습니다. 이후 웰링턴시의 영화테마파크는 그 지역의 주요한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 시나리오를 보니 수많은 엑스트라가 필요할 것 같은데...

주제가 4.3이고 보니 군대의 협조가 힘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학생과 학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치단체를 통해 가능하면 예비군까지 지원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보완해 나갈 계획입니다. 행정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듯이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제주도가 영상문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시금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끝으로, 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해 주시죠.

이 작품에서 저는 제주만의 차별성을 강조하려 합니다. 제주도민들은 삼별초, 이재수난, 4.3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 역사적 과정을 도민들이 공감하면서 제주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만들어가고 성취하는 작품이 됐으면 합니다. 모든 도민이 참여할 수는 없지만 한 두 사람 모이다보면 더 큰 힘이 생기지 않겠나 생각하구요. 저는 이 작품제작을 단지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민중운동’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시간 여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고 임감독은 서울로 올라갔다.

항상 젊은 노신사 임원식 감독, 얼핏 보면 후덕한 교장선생님으로 비치는 이미지다.
서북출신인 그가 제주인의 한사람으로서 제주 4.3을 영화로 그리고자 한다.
22년 만에 메가폰을 잡는 그의 뜨거운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반드시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다른 영화도 아니고 4.3을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가 아닌가.
제대로 된 4.3영화를 만드는 것은 비단 임감독 개인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일 수도 있다.
하여, 이 영화의 성공을 위해 모두 힘을 합쳐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한라산아~’가 전 세계 곳곳에서 상영될 그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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