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의 시네마줌⑨] 류장하 감독의 「꽃피는 봄이 오면」

 "나 오늘, 오빠가 옛날에 사준 목걸이 팔아서 술 마셨다."

 "연주할 때 옷을 원래 그렇게 입고 다니세요? 이현우 씨는 작년에도 오셨지요?"

 목걸이를 팔아 술을 마셨다는 연희(김호정 분)도 떠나겠다고 하고, 실내악단 오디션에도 떨어지고……. 스무 해 끝자락, 아니면 서른의 길목?「꽃피는 봄이 오면」은 그 건널목에 있다. 당신이 웃던 날 우리들 마음에 기적소리가 들렸던 것처럼 건널목에는 뿌리치고 싶은 현실이 놓여있고, 접을 수 없는 이상의 꿈이 놓여있다.

 이제 무얼 하지. 연희 말대로 음악학원에라도 들어가 가장 보통시민으로 살아갈까. 아니야, 그럴 순 없지. 음악이란 적어도 음악에서 그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 그래서 우리는 꿈을 꾸는 것이고!

 "엄마. 엄마는 꿈이 뭐였어?"

 "글쎄. 학교 다닐 때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어. 그래서 시인이 되고 싶었고,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그러다가 느그 아버지 만났을 땐 행복하게 사는 게 내 꿈이었고, 니 낳아서는 니 하나 잘되는 게 내 꿈이었어."

 유난히도 춥게만 느껴지는 현우(최민식 분)의 서울은 여기까지다. 주머니 속에 구겨 넣어두었던 구인광고를 들고 찾아간 곳은 도계중학교 관악부 임시교사. 도계중학교에 대해「꽃피는 봄이 오면」을 만든 감독이 한마디를 거들고 나선다. 이 영화는 KBS '인간극장'과 강릉KBS 특집 다큐에서 방영되었던 중학교 아이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를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연습하고 있는 관악부실은 그야말로 혼란스럽다. 소리로 모든 것을 말하고, 소리로 모든 것을 보여주여야 할 악기에서는 소리가 잘 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악보 한 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다 제28회 관악경연대회에서 우승컵을 손에 쥐지 못하면 관악부가 해체된다니 이 얼마나 막막한 발길인가. 아홉수에 불어닥친 풍파의 돛마냥  앞으로 함께 몸담아야 할 선생님마저 비관적이고 비협조적이다.

 "느그 아버지는 하루종일 탄가루 마셔가며 뼈빠지게 일하는데 느그들은 허구헌날 그래 빽빽거리기만 하냐. 이 딴따라 새끼들아!"

 하지만 아이들은 좋다고 한다. 마치 예전의 주인공 현우처럼 그냥 음악이 좋아서 하는 거라고 한다. 그래, 맞다. 사는 게 뭐 대회 나가 트로피나 타려고 빽빽거리냐. 떡값이 없어도 다음에 달라며 안기는 재일(이재응 분)이 할머니가 계시고, 약국을 하고 있는 수연(장신영 분)씨는 연탄불 난로에서 끓고 있는 보리차 한 잔을 자신의 체온처럼 내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케니지가 되는 게 꿈이라던 용석(김동영 분)이가 보이지 않는다. 달리 방법이 없다. 아버지를 설득해 볼 수밖에. 그러나 일이 쉽지가 않다. 여전히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호른이며 트럼펫, 색소폰은 어른들 눈에 딴따라 쪽으로 기운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궁리 끝에 현우는 관악부 아이들을 앞세우고 용석이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광산을 찾아가 연주회를 갖는다. 그때, 이마에 충전등(充電燈)을 달고 퇴항하는 막장의 불빛들. 연주회는 성공적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올 거예요. 선생님처럼 잠시 다녀가기도 할 거고요."

 가끔씩 말벗이 되어주곤 했던 수연씨가 말했던가. 도무지 꿈을 꿀 수 없을 것 같던 현우가 겨울을 붙잡아두려고 할 때 자신은 도계의 겨울이 싫다고. 그 봄이 오고 있다.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녀석이 연희가 시집을 안 가기로 하고 피아노학원을 다시 차렸다는 소식과 함께 통리주유소를 지나, 모모신발점을 지나, 안개다방을 지나 꽃피는 봄이 오고 있다. 꽃피는 봄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관악경연대회를 나가는 것. 너희들을 위해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이 아니면 어떻고 올드 랭 싸인이 아니면 또 어떠랴. 망가질 땐 망가져 보는 것이다.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사랑의 트위스트로.

   
「취화선」화쟁이에 이어 중학교 관악부 임시교사로 돌아온 최민식, 그의 지휘는 현란하다. 단 한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경연대회에 참석한 어머니(윤여정 분)도 예외는 아니다. 아들의 어린시절을 담은 손바닥만한 앨범을 애지중지하며 간직하고 살아가는 그녀는 성장한 아들의 지휘하는 모습을 담아보고자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보지만 옆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이제 음악이 좋아서 했던 것처럼 등수를 밝히지 않은 채 경연대회도 끝나고 어디론가 돌아가야 할 시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남아 있다. 눈병이다. 왜 하필이면 전염 잦은 무더위 여름도 아닌 한겨울에 안대를 차고 지내야 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꿈꾸며 살고 싶으나 그 꿈마저 꿀 수 없는 자들의 열꽃이 더는 어쩌지 못해 가슴앓이 하듯 눈으로 피어난 건 아니었을까, 잠에서 깨어나면 아랫도리에서 똘똘이들의 꽃대가 오를 때처럼!

 그런데, 도계가 어디 있더라? 여러분은 그 도계를 아시나요?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역을 지나, 개들이 낮잠을 자기 위해 몰려드는 통리역을 지나, 낭떠러지 고개 하나를 더 넘으면 닿는 그곳이 어디인가를? 현우는 그곳의 겨울이 아름답다고 했고 차마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수연은 못내 봄이 기다려진다고 했었지요.

※ 필자인 박영희 시인은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태생으로 1985년 문학 무크 「民意」로 등단, 시집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2001)를 펴냈으며, 옥중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1999)도 있다.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와 평론집 「김경숙」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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