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40) 김순백 어르신 이야기 ① 그에게 소는 설명할 수 없는 인생 그 자체

“아빠, 저 고등학교 못 다니게 되면 여군 입대 하겠습니다.”

낭랑 18세의 꿈 많은 소녀,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이 똑 떨어지고 굴러가는 돌에도 까르르 웃을 줄 아는 그런 나이, 소녀 김순백은 아버지에게 여군에 입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내비쳤다.

당연히 돌아오는 것은 호된 꾸지람. 낭패였다.

 김순백 어르신의 남편 원가족 사진. 남편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  ⓒ김진경
 김순백 어르신의 남편 원가족 사진. 남편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  ⓒ김진경

“아버지 친구분들께서 집에 오셨을때 일부러 분위기는 이때다 싶어 이야기를 꺼냈는데 정말 호되게 혼이 났지.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은행원이 여자들에게 최고의 직업이었어요. 그땐 컴퓨터가 있었어 뭐가 있었어. 주판 위 보이지 않는 손놀림으로 일을 하고 있는 은행원이 그렇게 멋있었던거야. 학교를 마치고 당당한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는데 당시 부모님이 소농장을 하고 있어 집안일이 바빴던 거지. 장녀니까 당연히 집안살림에 손을 보태야 하지 않겠어요? 학교를 그만다니라고 할까봐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여군에 입대한 친구들도 있길래나도 멋있는 여군이 되고 싶었지”

그렇게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난 김순백 소녀는 바로 육지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하필 도망간 곳이 서울에 살고 계신 외삼촌댁.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외삼촌댁에서 전화를 걸어 김순백 소녀를 찾았고 김순백소녀는 그렇게 다시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1955년생 김순백 어르신은 제주시 이도이동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지금의 구남동이 어르신이 태어난 곳인데 당시에는 이렇게 번화가가 아닌 밭들로 뒤덮여 있던 동네였다. 장녀로 태어나서였을까.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함께 하는 것이 김순백 어르신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부모님께서 학교를 다 진학시켜 주셨지만 마치 대기조처럼 집에 일이 생기면 학교를 바로 그만두고 집안의 일을 우선적으로 챙겼어야 했다. 언젠가는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동창친구 세 명이 여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동창들이 여군에 입대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도 김순백 어르신의 눈에 '여군'은 한없이 멋있어 보였다. 지금은 나잇살이 붙었지만 젊었을 때는 몸무게가 40kg 정도밖에 안 나갔고 운동신경도 좋아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선수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구기종목은 한번 씩 선수로 뛰어보기도 하셨단다.

아버지께 그렇게 호되게 혼이 나 가출을 한 후 집에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김순백 어르신이 열 아홉 되시던 해였다. 어르신의 십대 시절 꿈은 그렇게 멈추게 되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홀어머니를 도왔어야 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소농장도 김순백 어르신이 친정엄마와 함께 관리해야 했고 보리농사도 지어야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24살에 중매를 통해 월산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이도이동에서 월산으로 넘어가려면 속칭 '베두리동산'을 지나가야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돌멩이가 그렇게 많아서 하루에 두 번 있는 버스를 타고 신제주를 지나가면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사람들은 돌멩이가 그렇게 많았던 그 곳을 "베두리동산, 베두리동산"이라고 하며 버스에서 모두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고 한다. 삼무공원 안에 베두리오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르신이 말씀하신 베두리 동산은 삼무공원 부근인듯 했다. 어르신이 시집가던 그때만 해도 그렇게 허허벌판이었던 그 동네가 지금은 마치 서울처럼 별천지로 변했다고, 지금도 그 근처를 지날때면 시간이 정말 빠르고, 시대가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신다고 한다. 중학교때 일본에 있는 누님네 집으로 유학을 갔다는 남편과 그렇게 중매로 결혼하고 당시 산아 제한이 있었던 시기라 슬하에 아들 둘을 낳았다. 

김순백 어르신의 홀어머님은 아들 둘을 낳은 딸에게 고생했다며 암소 한마리를 주셨다. 소를 받아 정성으로 키워 다섯마리까지 불리셨다고 했다. 남편은 일본에 왔다갔다 하며 일을 했지만 형편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김순백 어르신이 두 팔을 걷어부치고 소도 키우고 농사를 맡아서 하지 않으면 두 아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정엄마 곁에서 농사만 지었으니 결혼 후에도 김순백 어르신이 주로 했던 일은 농사였다. 누가 뭐라해도 그 당시 주식은 보리였기 때문에 보리농사를 지었는데, 보리를 갈아서 일년치 식량을 마련해 두는 것도 빠듯했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아프면 아이들 병원비도 다 보리에서 나오는 것들이라 하셨다. 

요즘 제주도 애기 엄마들에게 유명한 소아과의원들이 도내 몇 군데 있는 것처럼 김순백어르신이 아이를 키울 때 제주에서는 제주시 중앙로의 한 소아과가 가장 잘 봐주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 소아과가 엄청 잘 봐줬는데 그만큼 비싸서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려면 쌀 한 말 가져가서 돈으로 바꿔야 할 정도라고 했다. 물론 쌀은 보리쌀 한 말 이었다. 아이들 병원비 하다보면 보리쌀 바꾼 돈을 다 써 버려서 아이들에게 변변한 옷 하나 제대로 사 입히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하셨다. 그렇게 정성으로 키운 보리쌀은 다시 정성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 쓰여졌다.

소도 마찬가지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한마리씩 팔다보니 다섯마리까지 불렸던 소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한창 젊었을 때는 어르신이 어렵게 돈을 모아오면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호탕하셨던 아버님이 다 가져다 쓰시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남편분이 많은 돈을 날려버려 너무 속상한 나머지 이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아 어린 아이들을 들쳐 업고 친정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갔다고 한다. 

버스정류장을 가려면 지나쳐야 하는 마을밭에서 동네 할망들이 보리밭 검질을 매고 있다가 아들을 들쳐업고 황급히 버스를 타려는 어르신을 멈춰 세우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아이고 애기어멍 어디감시냐?”

동네 할망들이 물어 솔직하게 이야기하니 극구 말렸다고 한다. 마치 본인 딸 일인것마냥 가지말라고, “촘으라, 촘으라”하며 꼭 붙들고 놔 주질 않았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는 친정에 안 간 것을 후회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때 마을 할망들이 본인을 그렇게 잡아준 것이 정말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가다듬고 어린 두 아들과 남편과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던 소는 김순백 어르신의 인생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나보다. 남편과 소농장을 하기로 하고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소농장이 점차 자리를 잡아 갈 때였다. 1997년도, IMF가 터졌다. 소값이 똥값이 되었다. 소농장을 운영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일본으로 급하게 넘어가서 3년을 살다 왔다. 아들들은 물론 일본으로 같이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친정집에 맡겨두고 그렇게 돈을 벌러 일본으로 다녀왔다고 한다.

월산으로 시집을 오면서 바로 마을총무를 3년 맡았고 이어서 26살에 처음 월산마을부녀회장을 맡게 되었다. 워낙에 부지런한 성격 탓에 회장직을 맡으며 마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도 했었다. 월산마을 사람들 대부분 농사를 지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밭마다 나오는 유리병 양이 꽤 많았다. 버리면 쓰레기일텐데 이것들을 모아서 갖다 팔면 쓰레기도 해결되고 부녀회 재정에도 보탬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르신의 생각이 주효했는지 마을의 유리병들은 생각보다 많은 금액의 돈이 되었고 부녀회가 하나로 결속될 수 있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농사를 쭉 했던 인생이라 제주시농업기술센터 생활개선회활동도 부지런히 하셨다고 한다. 생활개선회 회장만 활동을 10년동안이나 하셨다고 하니 얼마나 지역의 농민들이 함께 잘 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셨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던 운동신경은 마을체육대회에서도 빛이 났다. 마을부녀회장이던 시절, 총 6개 마을이 참가하는 노형동체육대회에서 월산마을 배구팀은 늘 1,2위를 다퉜다고 한다.

최근까지 부녀회 배구부 현역으로 뛰셨던 어르신과의 대화는 에너지가 넘쳤고 자존감이 빛나는 대화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꼭 가지고 싶은 두 가지였습니다. /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최근까지 부녀회 배구부 현역으로 뛰셨던 어르신과의 대화는 에너지가 넘쳤고 자존감이 빛나는 대화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꼭 가지고 싶은 두 가지였습니다. /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체육대회를 노형초등학교에서 했주게. 그럼 나 젊었을 때 애기아빠가 자전거 앞 바구니에 물애기를 태워서 와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어요. 그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생각해 보니 내가 뭐 하자고 하면 한번도 반대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어. 일본 다녀와서 사업을 한다고 할 때도 사회봉사활동을 한다고 해도 눈쌀 찌푸린 적 한번도 없었던거야. 일찍 돌아가버려서 좀 허탈하지. 처음엔 엘리트도 아니고 한량이라고 생각해서 시집 갓 왔을 땐 사기당했구나, 생각했어. 그런데 늘 뒤에서 날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응원해 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지. 어쨌든, 제가 언제까지 그렇게 마을체육대회 배구선수로 뛰었는지 알아요? 코로나 터지기 전까지에요. 64살까지인가 배구선수였었어.”

“세상에 60이 넘어서도 선수를 할 수 있어요?”

“나도 몰라, 그냥 마을 사람들이 나는 코트에 서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렇게 최근까지 선수로 뛰었지.”

생활개선회활동을 오랫동안 하고 회장을 하면서 제주전통재래된장 사업도 뛰어들게 되었다. 생활개선회 활동을 했던 사람들과 함께 3명이서 “월산식품”이라는 장 사업을 하기도 했었다. 10여년 동안 된장공장사업에도 애정과 열정을 쏟았다. 월산식품의 장은 맛이 좋기로 유명해서 인기가 많았다. 제주시농업기술센터의 지원과 조언을 받아 운영하기도 했어서 로컬푸드체험활동을 하러 오는 도내 학생들도 정말 많았다고 했다. 셋이서 하던 것을 어르신이 모두 맡아서 하기로 하고 사업이 어느정도 안정이 될 법한 순간 일본에서 터졌던 허리디스크가 다시 재발하여 된장 사업을 정리해야 했다.

김순백 어르신이 IMF로 3여년 동안 일본에 가 있다가 다시 제주로 넘어오면서 남편분도 일본의 삶을 완전히 정리하고 제주로 같이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본격적으로 소 농장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어르신이 생각해 보건데 친정집에서 소를 키웠을 때는 소는 농사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팔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결혼한 후 보니 소를 키우는 목적이 고기를 얻기 위해서로 바뀌어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얻어지는 경험과 시간이 더해져서였을까? 인생 후반 남편과 함께 하는 소농장은 안정기에 들어가는 듯 해 보였다. 농사도, 된장사업도, 사회봉사활동도 어느하나 허투루 하지 않고 책임감을 가지고 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68세에 돌아가셨다. 이제 안정된 삶과 노후를 계획하고 있었던 김순백 어르신에게 슬픔은 너무도 갑자기 찾아왔다.

김순백 어르신은 자신의 농장에 사육 중인 소들의 컨디션을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을 통해 CCTV 화면으로  확인하고 있다.   ⓒ 제주의소리
김순백 어르신은 자신의 농장에 사육 중인 소들의 컨디션을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을 통해 CCTV 화면으로  확인하고 있다.   ⓒ 제주의소리
김순백 어르신의 소 농장 사진. ⓒ 제주의소리
김순백 어르신은 자신의 농장에 사육 중인 소들의 컨디션을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을 통해 CCTV 화면으로  확인하고 있다.   ⓒ 제주의소리

남겨진 부인에게 미안해서였을까? 남편이 돌아가신 후 부인에게 외로워하지 말라고 선물을 준 듯 갑자기 소가 갑절이상 늘어 김순백 어르신은 슬퍼할 틈이 없었다. 축사에는 50여마리의 소가 있으니, 매일 아침 7시, 오후 4시에는 김순백 어르신의 50여마리의 아이들을 돌보러 가는 것이 매일매일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소농장은 주말이면 손자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주말에 아들들이 소농장 일거리를 함께 거들러 오기도 한다. 혼자 지내는 집이지만 주말이면 사람들의 온기로 채워져서 그나마 낫다고 한다. 소들 이름도 하나하나 지어주고 매일매일 정성과 사랑으로 키워주고 계신단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평범한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제주여성의 이야기지만 그 평범한 이야기가 오히려 나에게는 좀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순백 어르신에게 “제주의 소”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내 부모님과 지금의 내가 꾸린 가족, 우리 가족의 후손들을 이어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르신의 인생 그 자체가 아닐까?

어르신의 일본에서의 삶과 된장사업 이야기, 부녀회장과 봉사활동을 하며 풀어내는 더 베지근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다음편에 이어진다. (다음편에 계속)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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