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65) 아이 밴 여자는 말줄 안 넘는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애기 밴 예펜 ᄆᆞᆯ석 안 넘나 (아이 밴 여자는 말줄 안 넘는다)

 * 예펜 : 여인, 여자, 남편에 대한 예스러운 말 여편(女便)
  * ᄆᆞᆯ석 : 말줄(말을 방목할 때 길게 매는 줄)

임산부는 출산 전까지 자신을 잘 보살펴야 한다. 매사에 조신해야 함은 물론이다. 새 생명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될 때는 유산의 위험이 따른다.

예전 제주에는 시골길에 말이 매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덩치 큰 놈이 풀 뜯던 걸 멈추고 눈 껌뻑이며 경계심을 나타낸다. 한길을 말이 막아서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땐 으레 돌아가야지, 말 줄을 넘으면 된다고 그걸 함부로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함이다.  

그러다 기척에 놀라 말이 내달리기라도 할 양이면, 말 줄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이만저만 낭패가 아닌 것이 잘못하다 뱃속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거기다가 말의 임신기간이 11개월인 점을 연계시켜 산월(産月)이 더 길어진다는 속설에 따른 금기(禁忌) 의식이 작용한 것일 테다.

산부인과에 문제가 생기면 오직 동네 산파(産婆)에 의지하던 시절, 이 속담은 웬만한 안전 수칙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득남으로 집안에 대를 이을 옥동자 순산을 기다리는 집안 어른들의 노심초사를 생각할 때 이게 어디 예사로운 일인가.

유사한 속담이 있다.

사진=pixabay.
사진=pixabay.

“ᄆᆞᆯ석은 몸에 안 감나” (말줄은 몸에 안 감는다)

말을 끌고 다닐 때는 말고삐에 이은 긴 줄을 몸에 감지 말라는 것이다. 말은 워낙 경계심이 높아 성깔이 느긋하지 못해 놀라기를 잘한다. 작은 인기척에도 갑작스레 내달리는 버릇이 있는 짐승이다. 말을 끌고 다니며 줄이 길어 거추장스럽다고 몸에 감고 있다가 말이 후다닥 내닫게 되면 넘어진 채로 질질 끌려간다. 뜻밖에 큰 부상을 입거나 급소를 다쳐 목숨을 잃는 수도 있다.

어릴 때 젊은 농부가 밭일 나선다고 말을 끌고 가며 그 긴 말 줄을 어깨에 빙빙 감고 가다 한참을 끌려가는 변을 당했다. 죽을 뻔했다는 소문이 났다. 말이 얼마나 힘센가. 사람 하나쯤 무너뜨리고 끌고 가는 건 용쓰며 할 것도 못 된다. 자동차로 교통사고를 입을 일도 없는 농촌에 이런 변고는 대형 사고로 그야말로 큰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아기 밴 예펜 ᄆᆞᆯ석 안 넘나”거나, “ᄆᆞᆯ석은 몸에 안 감나”거나 자고로 터부시해 오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어기는 것도 그렇거니와 하지 말라는 걸 아득바득 어기는 것은 마음에 걸리는 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웬만하면 따르는 게 순리(順理)라 자연의 이치를 거역지 않았던 선인들의 지혜를 오늘에 새기게 된다.

금기(禁忌)라는 게 있다. 외래어로 ‘터부(taboo)’. 터부시한다고 한다.

신성시되거나 추악하게 여기는 사람‧사물‧장소‧행위‧언어 등에 관해 말하거나 접근하거나 만지작거리는 행위를 금하고 꺼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금기의 3대 조건이 있다. 금지‧기휘(忌諱:꺼리고 싫어 함)하는 것, 문장으로 표현하고, 구전(口傳)돼 오는 것, 세 가지다.

금기는 회피가 요구되는 복합적인 제도나 관행에 대한 적용과 실천으로 넓혀진다.

만져서는 안되는 물건,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 들어가면 안되는 장소, 말해서는 안되는 낱말, 보거나 행해서는 안되는 사람들, 위험하기 때문에 혹은 그것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를 손상을 꺼려 한 나머지 회피하게 만든다.

종교에도 금기 음식이 있다. 불교에서는 파나 양파 같은 마늘 종류를 일절 금한다. 그러니까 모든 절 음식에 마늘이 들어가지 않는다. 스님들은 마늘을 드시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슬람은 포도류, 증류수 독주를 금한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술 전부와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으로 돼 있다.

‘행동적 금기’로 내려오는 것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본다. 재미있다.

  - 동네 처녀가 무지개를 손가락질하면 동네에 홍수 난다
  - 밤에 여자가 거울을 보면 소박 맞는다
  - 여자는 날 궂은 날에 머리 감지 않는다
  -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난다
  - 제삿날엔 초상난 집에 가지 않는다
  - 용날 간장을 담그면 좋지 않다
  - 복어죽 먹고 사탕 먹으면 죽는다
  - 임신 중에 오리고기를 먹으면 아기 손가락‧발가락이 붙는다
  - 어린애가 말을 배울 때 아빠를 먼저 부르면 안 좋다
  - 변소에 가 쓰러지면 병이 난다
  - 바늘에 실을 길게 꿰면 멀리 시집간다
  - 삼살방(불길한 방위)에 집을 지으면 사람이 죽는다
  - 문지방을 베고 자면 입이 비뚤어진다
  - 밤에 돼지꿈을 세 번째 꾸면 매를 맞는다
  - 꿈에 가마 타면 죽는다

예로부터 그렇게 여기고 그리 돼 온 것이 관습이고, 관행이고, 통념이다. 어쩌다 심약하면 별일에서 별탈을 삼는 게 사람이기도 하다. ‘동티’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더욱이 의지할 데 없던 서민들의 삶임에랴. 넘지 말라는 말 줄을 굳이 넘거나 몸에 감을 일이 뭔가. 좋은 게 좋은 것, 다 그런 것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인 걸.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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