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28) 아미타브 고시, 이종인 옮김, ‘유리 궁전’, 사피엔스21, 2011

[BOOK世通, 제주 읽기] (228) 아미타브 고시, 이종인 옮김, ‘유리 궁전’, 사피엔스21, 2011. 사진=알라딘
[BOOK世通, 제주 읽기] (228) 아미타브 고시, 이종인 옮김, ‘유리 궁전’, 사피엔스21, 2011. 사진=알라딘

1.

제국의 폭력이 언제면 종식될까? 최근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의 행태는 표면상 두 국가 사이의 정치사회적 문제로 보이지만, 그 심층에는 푸틴이 옛 소련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리하여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급부상한 중국과 함께 러시아는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긴장 및 갈등을 빚곤 한다. 국제사회는 이를 두고 21세기의 신냉전(新冷戰) 시기가 도래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조심스러운 진단을 내놓는다.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정치경제적 지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열강이 ‘전쟁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식민주의 통치에 대한 유혹을 포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여기에는 좀 더 다각적이고 심층적 분석이 뒤따라야겠지만,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말할 필요도 없듯,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이용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의 정치경제적 이득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기획에도 제국의 식민주의 지배전략이 교묘히 작동하고 있음을 간과해서 곤란하다. 그러니까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두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측과 러시아는 열강으로서 제국의 권력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전쟁의 공포와 죽음이 우크라이나 국민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2.

기실, 이러한 제국의 정치경제적 대립과 갈등은 아시아에서 그리 생소한 게 결코 아니다. 인도 태생의 세계적 작가인 아미타브 고시의 장편 ‘유리 궁전’은 19세기 말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는데, 버마(현재 미얀마)를 중심으로 인도와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지역의 역사를 포괄하는 대작이다. 그래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서남아시아 지역의 삶과 역사를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유리 궁전’은 적극 추천할 만한 책이다. 형식은 소설이되, 해당 시기의 역사를 넓고 깊게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성격의 장편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지적 흥미를 충족시켜준다. 

‘유리 궁전’의 중심 서사는 영국의 식민주의 지배로 전락한 버마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티크 목재 사업을 통해 재력가로 급성장한 주인공이 제2차 세계대전 와중 특히 일본 제국의 말레이 반도 침략과 식민주의 지배 속에서 몰락해가는 가족사이다. 작가 아미타브 고시는 주인공의 성공담 속에서 그리고 몰락해가는 생애 속에서 영국과 일본의 두 제국이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남아시아의 식민주의 지배를 어떻게 펼쳐나갔는지를 해당 지역의 민족지(民族誌)와 정치경제에 대한 웅숭깊은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제국의 식민주의 근대가 지닌 양가성(兩價性)이다. 하나는 식민주의 근대가 표방하는 문명의 밝은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 근대가 식민주의 모국인 지배자의 정치경제적 이득을 최우선시함으로써 피식민지의 유무형의 자원을 착취하는 문명의 어두운 측면이다. 가령, 다음의 대목을 읽어보면, 버마의 열대우림의 자연으로 있던 고무나무 밭이 영국령 버마의 고무나무 농장으로 변해가는 모습 속에서 제국의 식민주의 근대의 양가성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고무나무 밭을 통과해 언덕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 구름에 덮인 구능제라이의 정상을 쳐다보았다. 발밑은 고사목 잎사귀들 덕분에 푹신한 느낌이 났다. 앞쪽 등성이에는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 똑같은 크기의 나무 수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야생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돌리는 예전에 화이제디를 여러 번 방문했고 정글의 적막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농장은 도시도 농장도 숲도 아니었다. 그 일률적인 풍경에는 뭔가 기괴한 것이 있었다. 이처럼 풍성한 자연 환경에 자로 잰 듯한 질서를 부과할 수 있었다니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까 우거진 정글에서 갑자기 기하학적 패턴의 농장으로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났다. “마치 미로에 들어선 것 같아요.” 돌리가 엘사에게 말했다.

(중략) 여러 달이 흐른 후에 엘사는 다시 현장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남편이 못 오게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산등성이는 연달아 재난을 입은 것처럼 파괴되어 있었고, 넓게 펼쳐진 거대한 땅은 재와 검게 탄 나무의 그루터기로 뒤덮여 있었다.(266-268쪽)

고무나무 농장이 들어선 풍경은 어떤 모습인가. “일률적 풍경에는 뭔가 기괴한 것이 있었다.”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 농장의 풍경은 자연스러운 열대우림의 정글과 전혀 딴판이다. “기하학적 패턴의 농장”에 들어선 것처럼 그래서 “마치 미로에 들어선” 듯한 풍경이야말로 근대로 표상되는 인위적 풍경이다. 이것은 단위 면적당 고무 원액의 수확량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수리과학적으로 계산된 농장의 규모로 이뤄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정한 크기의 고무나무들이 자로 잰 듯한 일정한 규격으로 재배되고 있는 근대의 농장 풍경을, 작중인물이 언덕 위에서 보고 지금까지 느낄 수 없던 ‘기이한 충격’을 받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충격은 정글의 생태가 파괴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과 겹쳐지면서 배가된다. 열대우림의 정글이 근대 문명의 손길에 의해 생산자원으로 그 효용가치를 갖는 대신 정글 본래의 생명과 생태는 죽음의 화마(火魔)로 소멸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무농장에서 수확된 고무는 1차 세계대전에서 제국의 정치경제적 야욕을 실현시키는 전쟁의 주요한 전략 물자로 공급된다. 작가는 이 일련의 과정, 즉 영국령 버마에서 고무농장을 비롯한 각종 근대의 농장이 정글을 대신하여 들어서고, 그곳에서의 생산물이 제국의 전쟁을 수행하는 전쟁 물자로 이용되는, 그래서 말레이 반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가 서구의 제국주의로 전락한 채 식민주의 유무형의 자원을 공급하는 식민주의 근대의 어두운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

그러면서, 작가는 이러한 식민주의 근대에 대한 저항과 부정을 자연의 생태 속에서 발견한다.

“(전략)이 농장을 얼핏 둘러보면 모든 것이 잘 길들여져 질서정연하게 맞아떨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기계를 돌리려는 순간 각각의 부분들이 저항한다는 걸 발견하게 돼요.(후략)”

“그런 저항의 원인이 뭐라고 보세요?”

“본성입니다. 나무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부 고무나무들은 반항기를 타고났다는 얘기인가요?”(310쪽)

위 대화에서 살필 수 있듯이, 작중인물은 고무농장의 일률적 재배를 위반하는 것을 ‘저항’으로 인식하면서, 이 저항은 나무와 인간의 ‘본성’임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작가의 생태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한 제국의 식민주의 근대에 대한 ‘저항과 부정’을 드러내는 주목할 발언이다. 아무리 근대의 수리과학적 계산으로 자연의 생태를 문명의 기율로 재배한다고 하지만, 자연 본래가 지닌 ‘본성’을 없앨 수 없듯이, 식민주의 근대가 지닌 제국의 통치가 피식민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언제까지 용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대 문명의 발달은 뒤처질지라도 구속과 억압 및 강제 아래 있기보다 자유와 해방의 세계를 쟁취하는 것이야말로 뭇 생명의 자연스런 ‘본성’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제국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성찰은 ‘유리 궁전’ 곳곳에 중심적 문제의식으로 보석처럼 박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것은 이러한 자유와 해방의 본성이 예술의 정치성으로 그 문제의식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것을 작금 미얀마의 군부독재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부정’으로서 지녀야 할 예술의 존재로 드러낸다. 버마는 2차 대전 후 일본의 패전으로 독립을 이뤘으나 군부 독재로 국명을 미얀마로 바꾸면서 민주주의가 압살당하는 정치현실이 지속된다. 작중에서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향한 저항의 일환으로 늙은 사진사가, “만약 작가가 자신의 눈으로 대상의 진실을 파악하면, 그 나머지는 단순한 기술적 실천에 지나지 않아. 작가의 상상적 욕망과 작가 사이에는 아무것도 낄 수 없게 되지”(663쪽)라는 강의를 대중에게 하는데, 이것은 미얀마 군부독재의 반민주주의에 대한 저항을 포기해서 안 될 뿐만 아니라 군부독재와 은연중 공모하는 제국의 권력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는 소설적 전언을 함의한다. 즉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향한 예술의 정치성과 그것이 지닌 민주주의를 향한 해방의 상상력을 벼려야 한다는 것이다.

4.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자꾸만 눈에 밟히는 부분을 함께 읽어보고 싶다. 이 글의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우크라이나의 무고한 국민을 희생시키는 제국의 권력들이 전쟁을 제발 멈췄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폭격기들은 하늘 높이 떠 있어 나방 그림자처럼 보일락말락 했다. 만쥬는 폭격기가 좀 더 가까이, 조종사의 낯짝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까이 다가왔으면 하고 바랐다. 그녀는 이렇게 멋대로 마구 파괴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 낯짝을 보고 싶었다. 폭격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대체 어떤 작자들이 무슨 의도로 단란한 가족—그녀 자신, 남편, 아기—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스스로 세계의 역사를 개조하겠다고 나선 저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608쪽)

제국의 권력이여, 평화로운 일상의 상상력을 파괴하는 식민주의 근대와 전쟁을 멈춰라!

#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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