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 개교 70주년]④ 1981년 7월 31일 종합대 승격 통보...최남단 자존 세운 ‘학생운동’도 치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과 6.25 한국전쟁의 참혹한 환경에서도 인재양성에 진심을 다한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국립제주대학교가 2022년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고희(古稀)의 나이를 맞은 제주대의 역사는 교육사이든 지역사이든 사회적으로 조명하고 평가해야 할 유의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제주의소리]는 진리와 정의, 창조라는 창학이념 아래 숱한 지식인과 인재들을 배출하며 제주 현대사의 한 축을 맡아 지역과 호흡해온 국립 제주대학교 70년 영욕의 역사를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1984년 준공된 아라캠퍼스 정문. 도민들은 국립 제주대학교에 이어 종합대학교를 위한 구슬땀을 흘린 끝에 종합 제주대학교를 일구게 됐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4년 준공된 아라캠퍼스 정문. 도민들은 국립 제주대학교에 이어 종합대학교를 위한 구슬땀을 흘린 끝에 종합 제주대학교를 일구게 됐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50년대 초급으로 출발한 제주대학교는 교육 열망을 꽃피워낸 도민 노력에 힘입어 1955년 도립 제주대 이후 1962년 국립대학 승격까지 학생들의 꿈을 키워갈 진리의 상아탑으로 자리매김했다. 

어엿한 국립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학교는 나날이 발전해갔지만, 여전히 제주지역 인사들을 비롯한 도민들은 국립에 이어 ‘종합대학교’에 목말라 있었다. 

초급으로 시작한 제주대학을 국립으로 승격 이관했고, 다시 국립 종합대학으로 완성하려는 도민의 열망이 아라캠퍼스에서 영글기 시작한 것.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뉜 캠퍼스의 통합이라는 선결 과제를 아라캠퍼스를 통해 풀어낸 국립 제주대는 대학에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1982년 종합대학교 승격 이후 첫 입학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2년 종합대학교 승격 이후 첫 입학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2년 제주대 '종합대학교' 승격 현판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 수차례 좌절 끝에 일궈낸 ‘종합 제주대학교’

1968년 8월 이미 한 차례 문교부로부터 ‘시기상조’라는 답변을 듣고 종합대학의 꿈을 좌절당한 제주대는 아라캠퍼스 시대를 여는 등 마부작침(磨斧作針) 했다. 1970년대 중반 캠퍼스 통합 이설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도민들도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제주대는 1978년부터 문교부에 정식으로 종합대학교 승격을 위한 건의를 줄기차게 해왔다. 지역사회 역시 승격 필요성을 기사와 논설을 통해 강조하는 등 힘을 보탰다. 이때 제주대는 이미 20개 학과를 거느린 과대 단과대학이 돼 있었던 사실상 ‘종합대학교’ 체제였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이 아라캠퍼스 통합 이설 공사현장을 다녀간 뒤 제주대는 1979년 교육에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 문교부에 종합대학교 설립 인가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했다.

당시 신청서에는 2개의 대학원과 7개 단과대학, 총 45개 학과에 입학정원은 1820명으로 한다는 계획이 담겼다. 그러나 문교부는 ‘시설이 부족하고 고교졸업생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려했다.

절치부심한 제주대는 1980년 2월 캠퍼스 통합 이설을 마치고 본격적인 ‘아라캠퍼스 시대’라는 새 역사를 맞이했다. 더불어 모든 행정력을 종합대학 승격에 집중해 1980년 3월 제2차 신청서를 다시 문교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문교부는 다시 ‘제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으므로 1981학년도에 종합대학교 승격을 불가하다’고 통보해왔고 학생들은 물론 지역사회가 크게 실망했다. 당시 언론이 사설과 논평을 통해 힘을 실어줬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좌절의 쓴맛을 본 것.

1986년 중앙도서관 개관 당시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6년 중앙도서관 개관 당시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문교부의 1982학년도 종합대학교 승격 계획 통보 내용. 1. 귀교를 1982학년도부터 '제주대학교'(종합대학교)로 개편할 계획임을 알려드리니 업무처리에 만전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1981년 7월 31일 문교부장관.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도민사회는 1980년 11월 국가 정책 차원에서 종합대학교 승격을 실현해 달라며 당시 정권을 무력으로 탈취한 전두환에게 건의했고, 이듬해 3월 제3차 종합대학교 설립 인가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했다.

신청서를 제출한 뒤 제주사회는 대중 매체를 통해 승격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을 활발히 개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제주대는 1981년 7월 31일, 끝내 문교부로부터 종합대학교 승격 계획을 통보받기에 이른다. 

1952년 도립 초급대학, 1955년 4년제 승격, 1962년 국립 이관에 이어 종합 제주대학교의 실현은 수차례의 좌절을 겪는 등 고된 ‘칠전팔기’ 끝에 1981년 드디어 숙원을 이루게 된다. 국립대학 승격 20년 만에 역사적인 종합대학교 승격을 달성한 것.

제주대 종합대학 승격은 1982년 2월 5일 국립학교설치령 중 개정령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고 2월 17일 대통령령 제10728호로 공포됨으로써 확정됐다. 구슬땀 흘린 끝에 이뤄진 종합대학 승격은 이를 갈망해온 모든 도민에게 기쁨을 안겨주게 됐다. 

# 군사 독재 정권 시작과 87년 항쟁 속 최남단 자존 지킨 ‘상아탑’

종합대학교 승격 열망과 함께 제주대학에서는 유신체제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서울의 봄’과 발맞춰 민주화 물결이 일렁였다. 학생들은 학원민주화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 학생회 부활과 언론 자유, 학칙 개정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고 한순간에 지듯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범죄자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민주화운동은 좌절에 빠졌다. 

유인물 하나 뿌리기 힘들었던 시기 제주대 학생들은 탐라민속문화연구회 같은 학내 동아리를 통해 지역 문제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1983년에는 전두한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운동도 펼쳤다.

1985년 5월 23일 제주대 진입로에서 학생들이 전투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제주대 학생들은 최남단 제주에서 민주화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등 자존을 세웠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5년 5월 23일 제주대 진입로에서 학생들이 전투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제주대 학생들은 최남단 제주에서 민주화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등 자존을 세웠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7년 6월 21일 제주시 중앙로에서 호헌철폐 가두시위를 벌이는 제주대 학생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7년 6월 21일 제주시 중앙로에서 호헌철폐 가두시위를 벌이는 제주대 학생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5년 5월에는 제주대에서도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 전투경찰은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아대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섰다. 

같은 해 5월 14일 제주대에서는 5.18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대회가 2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됐다. 학생들은 ‘광주 사태 책임져라’는 팻말을 앞세워 교내행진과 민족·민주화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 밖으로 나가려다 대기 중인 경찰을 만나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200명이던 학생들은 어느새 500명으로 불어나면서 격화됐다. 18일에는 제주시 중앙로 중앙양과점 옥상에서 김계완, 강수경 등 2명이 ‘광주사태 진상 규명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전단을 뿌리며 횃불시위를 펼쳐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민주화를 위해 두려움을 떨쳐낸 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열기를 뿜어냈다. 1986년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한 민주화를 요구했고 당시 학생운동이 치열해지면서 경찰은 교내로 진입해 최루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1986년 5월 13일에는 5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총학생회 주최 ‘광주민중항쟁 제6주기 추모제’가 열린 데 이어 ‘제주대학교 민주화투쟁위원회’가 발족 됐다. 

발족식을 끝낸 학생들은 군사독재 타도와 광주학생 사과, 민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교문 밖으로 진출해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고, 교내에 있던 제주경찰서 간부가 학생들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총학생회 사무실이 경찰에 의해 수색당하기도 했다. 

수차례 민주화 시위를 이어온 학생들의 시위는 1987년 4.3대자보 사건이 터지면서 끊이지 않았고, 이는 6월항쟁까지 이어졌다. 

4.3대자보 사건은 제주대 총학생회와 여학생회,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명의로 제주4.3 관련 대자보가 나오자 경찰이 관련된 학생 2명을 연행하면서 촉발됐다.

총학생회는 ‘4.19민주혁명계승대회’를 열고 연행된 학생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집단 시위를 펼쳤다. 다음 날인 17일에는 500여 명의 학생이 비상학생총회를 열어 중간고사를 거부, 20일에는 90% 이상 학생들이 동참하기도 했다. 

1987년 6월 21일 중앙로 시위대와 제주대 입구 시위대는 남문로터리에서 합류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7년 6월 21일 중앙로 시위대와 제주대 입구 시위대는 남문로터리에서 합류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7년 6월 23일 학생들이 투석전을 벌이며 거리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87년 6월 23일 학생들이 투석전을 벌이며 거리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더해진 열기는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8일 학생들은 ‘이한열 열사 추모제’를 개최했고, 21일에는 본격적인 6월 항쟁의 서막이 올랐다. 최남단 제주에서도 민주화를 갈망하는 뜨거운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 

제주의 자존을 세우고자 학생들은 6월 21일 오후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시내까지 비폭력 행진을 펼쳤다. 이어 제주시 남문로터리에서 시민 등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범도민시국토론회’를 열고 ‘민주헌법쟁취’, ‘호헌 철폐’, ‘독재타도’ 등 구호를 외쳤다. 

다음 날인 22일에도 기말고사를 거부한 2000여 명의 학생은 시내에서 가두행진을 펼쳤고 밤에는 100여 명의 학생이 중앙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남은 학생들은 다음 날 중앙성당에 있는 학생들과 합류하기 위해 제주대를 출발했으나 경찰에 가로막혔다.

학생 2000여 명과 시민 1000여 명은 밤 9시께 다시 동문로터리에서 중앙로 방면으로 이동하려다 경찰과 대치하게 됐고 몸싸움 끝에 저지선을 뚫은 뒤 비폭력 행진으로 중앙성당에 도착하게 됐다. 

26일에는 학생 600여 명이 중앙로와 남문로터리를 점거해 농성을 벌였고 같은 날 오후 7시에는 7000여 명으로 불어난 인파가 광양로터리까지 평화대행진을 펼치기도 했다. 전국적인 항쟁 분위기 가운데서도 최남단 제주의 민주화 열기를 보인 이들은 당시 노태우 정권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선언을 발표하며 정리됐다. 

전국적인 운동과 더불어 제주대 학생들은 제주지역 현안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1988년에는 송악산군사기지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학생들은 ‘송악산 군사기지 설치 결사반대 도민대책준비위원회 결성 및 규탄대회’에 참석하고 각 단대별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1989년 4월 3일에는 ‘4.3자주항쟁 계승 및 구국선열추모제’를 총해 제주4.3관련 투쟁을 본격화하기도 했다. 1991년 4월 1일에는 4.3진상규명 투쟁 관련 사월대 발대식도 개최하는 등 4.3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해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되는 제주대 학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되는 제주대 학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 5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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