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통해 본 하멜의 조선 체험

핸드릭 하멜(Hendric Hamel)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선박의 서기였다. 1653년(효종 4)에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타이완을 출항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일행과 함께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13년간 조선에 억류되어 병영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1666년(현종7) 9월 4일에 자신들이 배속되었던 여수 전라좌수영을 탈출하여 나가사키로 향했다. 1668년 본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자신의 밀린 노임을 청구하기 위해 체류일지와 조선 왕국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여 동인도회사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인데 우리에게는 '하멜표류기'로 더 익숙하다. 강준식의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는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를 바탕으로 한국, 일본, 네덜란드에 있는 여러 자료들을 분석하여 <하멜표류기>를 재구성한 책이다.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를 통해 하멜 일행이 조선 체류과정을 살펴보았다.

사계리 용머리 옆에는 하멜 일행이 제주에 난파했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하멜 기념비가 있다. 1980년 한국과 네덜란드의 공동출연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가까운 곳에 당시 그들이 타고 다녔던 배가 복원되어 전시되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끌었던 명장 히딩크 감독과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건조되었다.
  

▲ 하멜 일행의 표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시 선박이다. ⓒ 장태욱

하멜일행, 폭풍우 속에 제주바다에 난파

하멜일행은 1653년 7월 30일 나가사키로 가기 위해 대만을 출항했는데, 다음 날 저녁에 심한 폭풍을 만났다. 8월 1부터 11일까지 중국과 대만 사이 연안을 표류하다가 12일부터 강한 바람에 떠밀려 이동했다.

8월 16일에 이들은 심한 폭풍우 속에서 육지를 발견했고 연안에 닻을 내리려 하는 순간 배는 바위에 충돌하여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새벽에 확인해 본 결과 64명의 선원 중 생존자는 36명에 불과했다. 스페르베르호의 선장이던 에흐버츠도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들은 돛으로 대형 천막을 만들고 밤을 보냈는데, 17일 밤이 되자 천여 명의 병사가 그들을 포위했다. 병사를 이끌고 온 사령관과 하멜 일행 간에 말이 통하지 않아 몸짓을 이용해 소통을 시도했다.  
  

▲ 선수가 산방산을 향하고 있다. ⓒ 장태욱

그리고 18일이 되자 병사들은 배고픈 낯선 표류인들에게 쌀죽을 주었고, 다음날 하멜 일행은 섬의 사령관에게 은 술잔에 따른 포도주를 대접했다. 일등항해사가 위치(위도 33° 32′,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비슷하다)를 측정해서 현재 조선에 속한 퀠파트(Quelpaert, 당시 유럽에서 통하던 제주섬의 지명)에 표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이 무렵이다.

21일이 되자 섬의 사령관은 표류인들의 물건을 모두 봉인했다. 그리고 성한 자들은 말을 탔고, 부상당한 자들은 들것에 실려서 4밀렌(mijlen)을 이동했다. 대정(Tadiane)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서 하멜의 표현대로라면 '여관이라기보다는 마구간에 가까운 건물'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 선박이 좌초하면서 64명의 선원들 중 36명만 살아 남았다.ⓒ 장태욱

<다시 읽은 하멜표류기>의 저자 강준식은 당시 하멜 일행이 타고 있던 스페르베르호가 좌초된 지점이 사계리 앞바다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그들이 사용하던 거리 단위가 밀렌이었는데, 1밀렌은 약 7.4km에 해당하는 거리므로 4밀렌이라면 30km에 이른다. 게다가 그들 중 몸이 성한 이들이 사계리 해안가에서 인접 마을인 대정골까지 말을 타고 갔다는 대목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강준식은 선박이 좌초한 곳이 사계리라 아니라 강정포구였을 것으로 보았다.
   

▲ 서건도 서귀포시 강정 마을 앞바다에 있다. 강준식은 하멜 일행이 이 일대에 좌초되었다고 주장한다. ⓒ 장태욱

독특한 경험들 : 광해군의 유배처소, 이원진 목사, 벨테프레와의 만남

그들은 다음날 목사(Mocxo)가 있는 목간(Moggan)에 도착했다. 하멜일행을 심문한 제주목사 이원진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가 <효종실록>에 남아 있다.

"섬 남쪽에 배 한 척이 해안에 좌초했습니다. 대정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살펴보라고 했으나,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고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자 또한 다릅니다. 배에는 약재와 녹비와 기타 물품을 많이 싣고 있었습니다. 목향이 94포, 용뇌가 4항아리, 녹비가 2만7천 장입니다. …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낭가삭기(나가사키)라고 했습니다."
   

▲ 스페르베르호에 승선한 선원들. ⓒ 장태욱
 

이원진 목사는 하멜 일행에 대한 심문을 마치자 이들을 어떤 집에 수용했는데 하멜은 본인들이 머물던 집을 '국왕의 숙부의 집'이라고 했다. 광해군이 1641년에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 36명의 네덜란드 선원을 집단 수용할 만큼 규모가 큰 집은 광해군이 유배 생활 도중 머물렀던 적거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원진 목사는 왜나라를 상대하는 동래부사를 역임한 적이 있었기에 서양인과 그들의 발전된 문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제주에 표류했던 하멜 일행에게 쌀과 밀가루 등 먹을 음식을 지급하고 말로 위로하는 등 그들을 매우 따뜻하게 대했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제주목사였던 이원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총독(이원진 목사)은 우리의 슬픔을 달래 주기 위해 잔치와 그밖의 여흥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날마다 그는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국왕의 답신이 도착하면 우리가 일본에 보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우리는 이교도로부터 기독교인이 무색할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9월 29일 하멜 일행은 전갈을 받고 관청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박연(네덜란드 이름은 벨테프레)을 만났다. 1627년 조선 연안에 표류되어 관아에 붙잡힌 벨테프레는 조선의 훈련도감에 배치되었다가 조정의 명을 받고 표류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로 내려왔던 것이다.

박연은 하멜 일행에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조선의 관습은 표류한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었다. 본인도 고향으로 가기 위해 여러 차례 탄원을 올렸지만 번번이 실패했다며 본인을 따라 도성(한양)으로 가자고 권했다.

박연의 조사를 바탕으로 이원진 목사는 조정에 새로운 보고서를 보냈고, 조정에서 답신이 당도할 때까지 하멜 일행은 제주에 머물며 기다렸다. 이 와중에 이원진 목사는 하멜 일행에게 압수했던 물건들을 되돌려주는 한편 이들에게 따뜻한 방한복을 지급했다. 하멜은 방한복을 지급하는 이원진 목사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지만 이 조처는 그들이 싣고 왔던 녹비나 용뇌 등 귀중품을 사용하는 대가로 조정에서 지불하는 물품의 대금이었다.
  

▲ 하멜 일행이 수송했던 물자들은 조선 조정이 급하게 필요했던 것들이었다. ⓒ 장태욱

조선 조정과의 만남

1654년 6월 하멜 일행은 본토로 가는 배에 태워져 해남에 도착했다. 이들이 해남(Heynam)을 거쳐  영암(Jeham)에 도착할 무렵 동료 중 '푸울루스 얀스'라는 포수가 사망했다. 얀스를 묻고 이들은 나주(Naedjoo)를 지나 장성(Sansiangh), 정읍(Tiongop), 전주(Chentio) 등을 거쳐 서울(Sior)에 도착했다.

그들은 궁궐에 들어가서 효종과 마주했다. 하멜 일행을 마주한 효종은 이들을 위해 연회를 배풀었고, 낯선 이방인들은 임금을 즐겁게 하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이들의 진기한 엔터테인먼트는 소문을 타고 도성에 널리 퍼졌다.

그들은 서울로 호송되어 왕의 친위부대인 훈련도감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그들이 상경했던 길을 거슬러 전라도 지방의 병영으로 배치되었다. 이때까지의 생존자는 처음 살아남았던 36명 중 33명이었다.  
  

▲ 하멜 일행은 한양에서 훈련도감에 편성되었다가 후에 전라도 병영에 배치되었다. ⓒ 장태욱

탈출과 귀향

그 와중에 기근이 반복되었는데 그때마다 그들에게는 식량지급이 중단되었다. 하멜 일행은 구걸을 통해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게다가 전염병이 돌아 동료 11명이 죽어갔다. 남은 동료는 22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전라좌수영을 탈출할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1666년 9월 4일 하멜 이하 8명은 야음을 타서 읍성을 탈출해 해변에 있는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였다. 나가사키에서 조사를 받고 1년 후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던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했다. 바타비아에서 하멜은 동인도회사와 밀린 임금을 놓고 지리한 협상을 벌인 끝에 15년 조선 역류 기간의 밀린 임금을 지급받고 1668년 7월에 귀국하였다.

한편 하멜일행 중 전라병영을 탈출하지 못했던 나머지 7명이 있었는데, 이들도 일본과 조선 간의 협상을 통해 1668년 9월에 나가사키로 떠났다. 이들도 바타비아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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