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66) 딸 부잣집 기둥 굽 흔든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똘 부젯집 지둥 굽 흥근다 (딸 부잣집 기둥 굽 흔든다)

* 부젯집 : 부잣집
* 지둥 굽 : 기둥 굽
* 흥근다 : 흔든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한다. 이 말에 아들딸의 구별이 들어 있지 않고 ‘자식, 자녀’라 해서 통째 묶어 일컫고 있다. 자식이 많으면 재정적 지출도 많지만, 이 일 저 일 크고 작은 걱정거리도 많이 생겨 정신을 못 차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똘 부젯집’이라 했으니, 한 집에 딸이 적어도 네다섯은 되는 셈일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저출산으로 미래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 출산율이 0.81, OECD 국가 가운데 꼴찌다. 경제 대국이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는 사회라는데 앞뒤가 다르니 이런 모순이 없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더니, 이제 하나도 안 낳겠다 하고 있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세상 어디 또 있을까.

예전에 딸을 많이 두었던 데는 배경이 있었다. 아들을 선호하던 사회가 결국 딸을 많이 낳게 했다는 얘기다. 고정관념으로 고착돼 있던 아들 지상주의의 결과다. 집안에 후사(後嗣)할 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긴다. 절대(絶代) 되는 것이다. 결국 조상 신위께 제사 명절을 지낼 후손이 없게 되고 만다. 그래서 예로부터 오랜 세월을 이어온 것이 양자를 데리는(입양) 일, 그 이상 크고 중대한 가업(家業)이 없었다.

나라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어야 할 것인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어려워도 아이를 낳아라 강권해도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것이라, 발만 동동 굴릴 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나라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어야 할 것인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어려워도 아이를 낳아라 강권해도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것이라, 발만 동동 굴릴 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형제 가운데 아들이 여럿이면 어렵잖게 양자를 얻어 아예 어릴 때부터 데려다 키웠다. 가장 손쉽고 무난한 해결책이었다. 한데 양자를 형제나 근척 중에서 얻어오지 못하면 멀리 돌아 원척에서라도 얻어와야 했다. 

이런 어려움이 있을 것에 대비하려 자구책을 세운 게 끝까지 아들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다짐이었다. 첫째 둘째가 딸이면 다음번엔 아들이겠지. 한데 셋째도 딸이면 그래도 다음번에야 아들이겠지 하다 보니 딸만 일곱, 7공주가 탄생하기도 했다. 딸 여섯에 아들 하나인 집을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그 어머니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말이다. 물론 딸 서넛 출산 뒤 득남하는 경우인들 왜 없으랴. 몇 대 독자라고 금쪽같이 호호 보듬어 키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들 하나 얻기를 기다려 낳다 보니 끝내 ‘딸 부잣집’이 돼 버린다. 딸은 출가외인이다. 시집 보내며 한 살림 실어 보내야 한다. 이불이 몇 채. 궤(바닫이)가 몇 개 하면서 채우다 보니 도리없이 빚까지 짊어지는 수밖에. 딸 수에 곱하기로 재산을 축내게 되니, 집 기둥이 흔들리지 않고 배길 재주가 있겠는가.

‘똘 한 집 문 열어 노앙 잔다(딸 많은 집 문 열어놓고 잔다)’ 한 말이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다. 도둑도 있는 집을 터는 법이다. 딸 여럿 시집보내느라 재산이 바닥 난 집에는 훔칠 물건도 남아 있지 않는다 함이다.

‘똘 부젯집 지둥 굽 흥근다’

격세지감이다.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세상이다. 나라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어야 할 것인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어려워도 아이를 낳아라 강권해도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것이라, 발만 동동 굴릴 뿐.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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