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4·3공약을 기억하며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4·3의 시대를 살았던 분들에게 그 사건은 기억이고, 그 기억은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세들인 우리에게 4.3은 역사이고, 때문에 그 역사는 모든 개인의 기억을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에서 조금은 넓은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동학이 전봉준 개인이 아닌 조선사회에서 일어난 것이고, 신축난이 이재수 개인이 아닌 제주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4.3의 역사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조선조정과 외세가 있거나, 대한민국 정부와 미소(美蘇) 군정이 있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4.3의 역사를 섬 안에서 꺼내어 한반도 위에 올려놓고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고 선언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다.

4.3문제를 해결하는데 대통령을 호출했던 것은 그가 이런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는 물론이고 과거의 눈물까지도 책임지는 존재로서 법의 통치권한을 위임받은 최고 통수권자여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대통령이 헌법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개인의 믿음과 가치관은 달라도 모두가 ‘만인의 약속’인 법을 따르듯이, 대통령도 그 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기 때문이다. 그 법이 국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킨다는 사회계약의 정신을 담고 있는 한, 사실 대통령은 이 약속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그 소명을 다하는 셈이다. 4.3특별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법이 더 이상 불필요하거나 폐기될 때까지는 특별법이 선언하고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은 헌법에 손을 얹었던 대통령의 귀한 책무일 수밖에 없다. 설령 생각이 달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정권 전환기에 문득 무거운 생각이 드는 이유는 최근 2000년대에만 들어서도 4.3의 역사가 권력에 따라 소용돌이쳤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4.3추모일을 국가기념일로 선포한 것을 제외하면, 그 어느 대통령도 ‘국가공권력의 잘못’에 대한 사과나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관심도 없었고, 추모제 참석도 없었다. 오히려 문제는 이 시기에 행정자치부의 희생자 재조사 시도, 한국사 국정교과서 4.3역사기술 축소·후퇴, 4.3위원회 폐지법안 발의 등, 결코 성공할 수도 없었던 퇴행적 시도들이 이루어졌던 사실이다. 특별법은 국회 여야의 합의로 의결된 ‘만인의 약속’이었고, 그런 법의 약속을 대통령이 부정한다면 대통령이 몸소 법치와 법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바라는 최소의 공공선(公共善)은 이런 일들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보다 높은 선은 헌법에 손을 얹고 선서했듯이, 대통령은 4.3의 해결을 위해서 ‘만인의 약속’으로 제정된 4.3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고 그 법이 약속하고 있는 국가의 과제를 있는 그대로 완수하는 데 있다. 유족보상, 특별재심, 호적정리, 추가진상조사, 국내외의 추가신고 등, 파괴되고 비틀어졌던 제주의 과거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이들 과제는 4.3특별법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유한한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법인지라, 미흡한 것은 재차 손쉬운 개정을 통해 보다 온전한 특별법으로 만들 필요도 있을 것이다. 

지난 2월5일 대선 후보자 신분으로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4.3영령에게 참배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같은 날 윤 당선인이 남긴 방명록 내용. ⓒ제주의소리
지난 2월5일 대선 후보자 신분으로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4.3영령에게 참배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같은 날 윤 당선인이 남긴 방명록 내용. 윤 당선인은 “무고한 희생자의 넋,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겠습니다. 2022.2.5. 윤석열”이라고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제주의소리

이와 관련해서 제주인들은 3월에 있었던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들을 기억한다. 어떤 약속은 특별법 안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고, 어떤 약속은 새로운 것이기도 했다. 4.3해결의 보편적 슬로건인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을 공약한 것이 그것이고, 4.3희생자에 대한 합리적 보상과 가족관계특례조항 신설을 확약했으며, 고령유족 요양시설·유족회 복지센터 지원과 4.3추모제의 국가적 문화제 승화 같은 새로운 약속도 선보였다. 특히 대선 마지막 날에도 4.3보상 문제를 언급하며 “대한민국의 국격과 헌법정신을 위해서도 과감하게 검토"하겠다고 ‘헌법정신’을 거론한 것은 거기에 손을 얹고 맹세하게 될 당선인으로서는 매우 합당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특별법이 담고 있는 4.3의 해법이나 당선인의 공약은 보수와 진보의 의제를 떠나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당선인이 숱하게 포효하던 ‘공정과 정의’는 오로지 이런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보듬느냐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4.3 당시 산에 올랐던 사람들의 목적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4.3유족들의 바람도 잘못된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아스팔트 위에서 노도하던 4.3은 이제 사무실로 돌아갔다. 4.3이 재차 아스팔트로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차기정권에게는 소중한 성취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 4.3 74주년 추모제를 앞두고 있다. 역대 보수정권의 대통령은 하나같이 4.3추모제에 불참했지만, 당선자의 참례는 억울한 유족들에게는 깊이 감사할 일이니 마다할 까닭이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하라는 노자의 가르침대로, 세심한 배려는 작아 보이지만 그 덕은 크게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의 대통령과 미래의 대통령이 함께 한다면, 이는 추모제의 역사에도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기록이 될 성 싶다. 더욱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4.3추념식에 참석하겠다.”고 언명한 길이니 그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4월에 들어서도 국정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와 신구권력의 갈등은 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성이니, 피할 도리는 없다. 그래도 한반도의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제주의 4·3평화공원에서 정국의 전환 모멘텀을 마련할 수 있다면, 평화를 노래하는 4·3의 소망과도 무척 어울리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상상은 설마 망상이기만 하겠는가?

다들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만들었다고 말이다. 이 두 정치세력이 창출해낸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거부하는 국민들도 거의 없다. 우리 사회를 ‘절대빈곤’과 ‘정치억압’에서 구한 것은 필경 ‘제2의 해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상상해본다. 진보정부가 단초를 놓은 4·3의 해법을 보수정부가 완결시키는 마지막 성취를! 74년 전, 전무후무한 제주의 참극을 야기하는데 국가가 총동원됐으니, 이 문제를 푸는데 새로운 정부가 총동원된다한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마침 당선인은 4.3평화공원 방명록에 “무고한 희생자의 넋,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겠습니다.”고 남긴 바가 있다. 보기에 아름다운 것은 누구에게나 고운 법이니, ‘인간의 문제’인 4.3의 완전한 해결에 있어서만큼은 진보와 보수가 손을 잡아 참으로 그렇게 되도록 당선자와 모든 정치세력의 세심하고 각별한 노고를 당부드리는 바이다. / 이규배 논설위원, 제주4·3연구소 이사장

# 이규배는?

현재 제주국제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8년부터 현재까지 제주4·3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제주4·3연구소 소장과 5.18기념재단 이사, 제주4·3평화재단 이사를 역임했고, 제주MBC <시사진단> 사회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와세다대학)에서 일본정치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속칭 ‘일본통’이며 일본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주의소리> 논설위원으로서 ‘소리시선’ 칼럼을 통해 4·3과 역사·사회 문제를 다루는 그의 깊은 통찰력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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