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택의 탐나는 올레] ⑦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길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는 재미와 닮았다. 역시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속도가 느리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삶의 속도를 늦추는 걷기야 말로 우리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한다. 유년시절 불가의 출가자로, 환속해 문화재 전문 공직자로,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으로, 공직 퇴임 후에는 다시 명상 간경하는 불가의 시자로 돌아가 끊임없는 자기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윤봉택 시인이 제주올레 1~26코스를 따라 그 길과 마을에 깃든 흥미로운 제주(탐라) 이야기를 격주로 집필한다. 탐라에서 제주에 이르는 설화와 전설, 신화와 역사를 넘나 드는 시인의 해박하고 담백한 언어를 올레길에서 듣는 재미에 빠져 보시라. / 편집자 글

내 안에 네가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실까. 

혼자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우리는 늘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헌데 어느 때부턴가 마주보기가 아니라 등 돌려 살아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허당 삶이 되었다.

가족 관계보다 남을 더 소중한 양,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세태, 자녀들이 결혼하여 각 방 쓴다면 큰일처럼 여기면서도, 정작 본인들의 각방 문화는 당연시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나, 헌신짝처럼 모든 것을 다 내려 놓아버린 것처럼 하여도, 늘 한구석에는 공허함으로 치매를 기다리는 군상들, 이처럼 소원했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끈끈함이 돋아나는 올레로 추천하고픈 사유의 길이 제주올레 5코스이다.

 5코스 출발점-남원포구 재산이개-돈짓당. ⓒ윤봉택
 5코스 출발점-남원포구 재산이개-돈짓당. ⓒ윤봉택

5코스는 남원1리, ‘재산이개’ 남원포구에서 위미3리·2리·1리, 신례2리·공천포, 하례1리·망장포·예촌망, 서귀포시 효돈동 쇠소깍다리까지 일곱 마을을 지나는 13.4km, 34리이며, 2008년 8월 23일 제주올레 8코스로 개장되었다가 5코스로 명명되었다. 해안에서 다시 개껴시 선을 따라 움직이는 곳마다 머언 그대 모습 오롯이 돋아나 늘 푸른 청순함이 살아 있는 제주올레, 순례하면 다 보인다.

제주올레는 이처럼 삶의 눈으로 걸어봐야 보인다. 육신이 힘들고 마음이 아플 때 그 저곁디에 누가 있어 나를 위로하는지 제주올레를 순례하면 그 온기의 열림을 느낀다. 온종일 해안선을 울리는 작은 몸짓을 보아라. 하루가 지나도 원망이나 애증 하나 없는, 늘 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수만의 물결 이랑에서 내 안에 있는 네 모습을 기억함도 좋으리니 남원포구 ‘재산이개’ 한 견에서 썰물과 밀물을 기다리는 남원1리 본향포구의 돈짓당을 보아라. 본래 이 신당은 ‘널당’이라 하여 도로변에 있었으나 도로공사로 인하여 2000년대 이곳 포구로 모시게 되었다. 당신은 한라산신의 ‘하로영산 백관또’로서 전형적인 탐라신 계열이다. 그곳 궤안에 걸려 있는 것은 지전 물색이 아니라 바로 제주바람의 원형이다. 바람이 아니 불어도 포구의 새벽을 여는 무가의 음률 따라 만선으로 닻 내리는 머정 좋은 보재기들….

이등여-장수여-건드르물. ⓒ윤봉택
이등여-장수여-건드르물. ⓒ윤봉택

포구를 벗어나면 두 번째 큰 여로 부르는 ‘이등여’와 등대 남쪽으로 ‘장수여’가 나타난다. 광치동 해변에 잠시 남아 있는 위태로운 성담, 그 ‘건드르물’ 곁에는 남원리에서 처음 설촌된 ‘설왓개’가 있다. 일화 공장 건물 지나면 바로 ‘쇠누랭이’ 해안이 ‘큰엉’ 입구 ‘구럼비’ 해안까지 이어진다. 

설왓개-설왓개 해안-쇠누랭이-구럼비 해안-한반도 올레(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윤봉택
설왓개-설왓개 해안-쇠누랭이-구럼비 해안-한반도 올레(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윤봉택

‘큰엉’은 ‘구럼비’에서 부터 서쪽 ‘황토개’ 해안까지 2.2km에 이르는 해안가를 말하며, 크고 작은 절벽과 바위 그늘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서 200여m 가면 ‘우렁굴’이라 부르는 ‘쇠털어진고망’ 해안이다. 과거 이곳 해안가에 우마를 방목하였을 때, 이 구멍 안에 소가 털어졌었기에 전해진 지명이다. 이곳을 지나면 사스레피나무 우거진 한반도 형세의 숲이 보이며, 좀 더 가면 제라진 ‘큰엉’해안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용 닮은 ‘롱코지’을 지나면 한남리 소재 사려니·넙거리·머체악 오름군락에서 발원하여 이곳에 이르는 ‘신나물골’ 골새가 보이고, 황토를 파서 참기름에 섞어 술안주로 삼았다는 ‘황토개, 몰캐’ 해안이 나타난다.  

큰엉-큰엉 해안선-우렁굴 쇠떨어진고망-롱코지. ⓒ윤봉택
큰엉-큰엉 해안선-우렁굴 쇠떨어진고망-롱코지. ⓒ윤봉택
신나물골 해안-황토개 해안-황토개 해안-몰캐 해안. ⓒ윤봉택
신나물골 해안-황토개 해안-황토개 해안-몰캐 해안. ⓒ윤봉택

위미3리 종정동 좀녜불턱을 지나면 ‘터웃개 시금물’이 있다. 여기에서 잠시 신발을 벗어 ‘시금물’에 담그면 한라산이 지긋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울퉁불퉁 ‘오록홈’ 해안선 따라 ‘볼레남골’ 지나면, 지난날 고래 사체가 많이 떠밀려 왔던 ‘썩은빌레’ 해안이 고래 등처럼 누워 있음을 만난다. 여기에서 ‘지꾸내’ 건너 마을로 들어서면 위미동백나무군락이다. 

종정동 터웃개-시금물-오록홈 해안(왼쪽 줄), 볼레남골-썩은빌레 해안-지꾸내 해안(오른쪽 줄). ⓒ윤봉택
종정동 터웃개-시금물-오록홈 해안(왼쪽 줄), 볼레남골-썩은빌레 해안-지꾸내 해안(오른쪽 줄). ⓒ윤봉택

본래 이곳 지명은 위미2리 세천동 ‘양진이 버득’이다. ‘양진이’는 세천포구 동쪽, ‘버득’은 테역(잔디)을 말하는 제주어인데, 동백나무가 심어지기 전 이곳은 척박한 잔디밭이었다. 위미 동백나무 군락은 현맹춘(1858∼1933) 할머니가 테역 밭을 매입 개간하고 농사를 짓기 위하여 계절풍을 막기 위해 동백 씨앗을 밭담 주변에 뿌려 인공으로 조성한 원림으로서, 읍내에는 이렇게 인공 조림한 동백나무 군락이 신흥리에도 있으며, 모두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양진이 버득-위미 동백나무 군락. ⓒ윤봉택
양진이 버득-위미 동백나무 군락. ⓒ윤봉택

‘고른내’ 하구에 있는 세천포구를 건너면 위미항으로 이어지는 ‘구두미’ 해안선이 정겹게 다가온다. 여기에서 ‘벌러니코지’에 앉으면 한 집안 흥망이 담긴 전설이 날래를 넌다. 오래전 위미2리 세도가 토족이었던 김씨 가문이 날로 번창하자, 이를 시기한 마을 사람이 유명한 지관을 매수하여, 그 지관에게 이곳 바위를 없애야만 가문이 자손 대대로 번창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멸족당한다고 하여, 바위를 부수어 김씨 가문을 망하게 하였다는 코지 앞에도 오늘은 바람이다.

고른내-세천포구-구두미 해안-벌러니코지. ⓒ윤봉택
고른내-세천포구-구두미 해안-벌러니코지. ⓒ윤봉택

조배머들코지 능선에 좀녜가 단골인 조배머들 고망할망당이 있고, 위미항 앞개에는 포구를 지키는 동카름 돈지당이 있는데, 예서 78세 을유생 연안김씨 순관 좀녜 삼촌을 만났다. 친정은 위미1리이고 위미2리 상한동으로 시집오시어 현재 ‘앞개’ 해안 집에 거주하고 계신다며 연줄 풀리듯 삶의 한 소절을 알려 주셨다.

조배머들 고망할망당(왼쪽)-조배머들코지-앞개. ⓒ윤봉택
조배머들 고망할망당(왼쪽)-조배머들코지-앞개. ⓒ윤봉택
김순관 좀녜 삼춘. ⓒ윤봉택
김순관 좀녜 삼춘. ⓒ윤봉택

모든 게 개발되어 사라지고 없는데 올레 길섶에서 우리 초가 형태를 만났다. 축대를 보면 두 번에 걸쳐 집을 증축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잣 돌담도 정겹고 모두가 아늑하여 고향 집 같은 느낌이다. 

위미 해안 가옥-고망물. ⓒ윤봉택
위미 해안 가옥-고망물. ⓒ윤봉택

바로 옆에는 ‘고망물’이 있다. 얼마나 물맛이 좋고 깨끗하였으면, 이 물을 길어 소주를 빚었을까. 바로 북쪽에는 1940년대 이 물로 소주를 생산하였던 “황하소주공장” 터가 있다. 황하소주는 소주를 생산한 황순하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소주 상호였다. 황순하 선생은 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1946년 2월 15일 제주시 이도이동 1437번지에 오현중학교 전신인 제주제일중학교를 설립하여 지금의 오현중고를 세웠다.

위미 1리 본향당-조랑개-신우지코지 해안(왼쪽 줄). 밍금해안-넙빌레 해안-설코지 해안(오른쪽 줄). ⓒ윤봉택
위미 1리 본향당-조랑개-신우지코지 해안(왼쪽 줄). 밍금해안-넙빌레 해안-설코지 해안(오른쪽 줄). ⓒ윤봉택

‘조랑개’ 지나면 위미1리 본향당이다. 가뭄 때 기우제를 지냈다는 ‘신우지코지’ 지나면 지난날 테우를 만들었던 ‘밍금’해안이 보이고, 여기서 좀 더 가면 물맛이 좋은 ‘넙빌레’ 생수가 있다. ‘설코지’에서 ‘개맡’까지 이어진 공천포 검은 모래 해안가를 걷다보면 썰물에 씻어 내리는 ‘공샘이 영등물’을 만날 수가 있다.

공천포 모살왓-공천포 영등물-공샘이 포구(왼쪽 줄). 세기내 신례천-망장포-하례1리 포구(오른쪽 줄). ⓒ윤봉택
공천포 모살왓-공천포 영등물-공샘이 포구(왼쪽 줄). 세기내 신례천-망장포-하례1리 포구(오른쪽 줄). ⓒ윤봉택

공천포구에서 ‘세기내’라 부르는 신례천 냇깍을 지나면, 하례1리 망장동 망장포가 정겹게 다가온다. 포구를 휘 안아 돌아서면 하례1리 포구 ‘황개’와 ‘우금’ 해안이다. 여기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지난날 봉화를 띄웠던 예촌망이 보이고, 그 돌담 따라 좀 더 가면 제주올레 5코스 종점 쇠소깍다리이다.

우금 가는 올레-예촌망 올레 돌담(왼쪽 줄). 황개코지-우금 해안-5코스 종점 효돈천-올레 5코스 종점. ⓒ윤봉택
우금 가는 올레-예촌망 올레 돌담(왼쪽 줄). 황개코지-우금 해안-5코스 종점 효돈천-올레 5코스 종점. ⓒ윤봉택

* [윤봉택의 탐나는 올레]는 제주의소리와 서귀포신문이 공동기획으로 마련한 코너로 격주로 게재합니다. 

# 필자 윤봉택 시인은

법호 相民.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태어나 해인사로 출가하여 1974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였다.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제주바람)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강정마을에서 포교활동하면서 농사 짓다가 서귀포시청 문화재 전임연구원으로 23년 공직 근무를 마치고, 2014년부터 쌍계암 삼소굴에서 명상·간경·수행하면서 시민과 함께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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