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본풀이] 제주4.3연구소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

“오빠는 날 알아봤을테주만, 난 오빠가 어디신지 몰란”

 

제주4.3연구소는 31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물한 번째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 증언본풀이 마당을 열었다. ⓒ제주의소리
제주4.3연구소는 31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물한 번째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 증언본풀이 마당을 열었다. ⓒ제주의소리

추운 겨울날 몸에 서린 한기도 잊은 채 살기 위해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가 죄 없이 참화를 당한 이들이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지 겨우 30년.

세상과 단절된 채 40여 년이 넘는 통곡의 세월을 굴 안에서 보내왔던 이들의 사연이 알려지자 제주 사회는 이제껏 속으로만 참아왔던 그 날의 분통을 조금씩 터뜨리기 시작했다.

1992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에서는 제주4.3 당시 피바람을 피해 굴속으로 몸을 숨겼던 민간인들의 유해가 발굴됐다. 토벌대가 이들을 찾아 굴 입구에 불을 질러 질식하게 만든 것. 

이들은 더 이상 도망갈 곳 없는 굴 안으로 밀려드는 연기를 피하지 못하고 짙은 어둠 속에서 죽어갔다. 다랑쉬굴 발굴 당시 현장에서는 여성과 아이가 포함된 시신 10여 구와 피난 당시 생활 도구가 발견됐다.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 이들은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고, 행정당국은 서둘러 이들을 화장한 뒤 다랑쉬굴을 시멘트로 막아버렸다.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는 31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물한 번째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 증언본풀이 마당을 열었다. 

이날 증언본풀이 마당은 다랑쉬굴에서 잔인하게 학살당한 4.3희생자 가족들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억울한 죽음도 모자라 힘이 없어 내 오라비, 내 아버지, 내 가족의 유해를 화장할 수밖에 없었던 그 날의 기억을 힘겹게 끄집어낸 한(恨)스러운 증언이다.

대담은 차례대로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 △오화선 자료실장 △김은희 연구실장이 맡았다. 다랑쉬굴에 가장 먼저 들어가 사진으로 참혹한 현장을 전한 김기삼 사진작가도 본풀이 마당을 찾았다.

눈물을 훔치고 있는 함복순 어르신. 함 어르신은 4.3 당시 다랑쉬굴로 숨은 오빠를 잃었다. 오빠는 40여 년이 지난 1992년에서야 세상 빛을 보게 됐다. 그러나 오빠 유해가 어느 것인지 몰랐던 함 어르신은 김녕리 앞바다에서 화장된 누군가의 유골을 뿌리며 서러운 울음과 함께 오빠를 떠나보내야 했다. ⓒ제주의소리
눈물을 훔치고 있는 함복순 어르신. 함 어르신은 4.3 당시 다랑쉬굴로 숨은 오빠를 잃었다. 오빠는 40여 년이 지난 1992년에서야 세상 빛을 보게 됐다. 그러나 오빠 유해가 어느 것인지 몰랐던 함 어르신은 김녕리 앞바다에서 화장된 누군가의 유골을 뿌리며 서러운 울음과 함께 오빠를 떠나보내야 했다. ⓒ제주의소리
4.3을 증언하고 있는 함복순 어르신과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 ⓒ제주의소리
4.3을 증언하고 있는 함복순 어르신과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 ⓒ제주의소리

 “오빠는 나를 알아보건만…”

함복순 어르신은 1943년생으로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출신이다. 1992년 세상에 드러난 다랑쉬굴 4.3희생자 함명립(당시 20세) 씨의 여동생이다. 

오빠 함명립이 사라진 뒤 아버지 함평도는 세화지서에 끌려가 모진 구타를 당했고, 어머니 채만세는 도피자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1948년 12월 4일 상도리 연두망에서 대신 살해됐다. 

함복순 어르신은 1992년 다랑쉬굴 유해 중 오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복을 차려입은 뒤 장례식에 참여했다. 하지만 유골로 만나게 된 오빠가 누군지도 모른 채 김녕 바닷가에 뿌려야 했고, 그날 어르신은 저 깊은 곳에 묻어뒀던 오빠를 부르며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첫 번째 증언에 나선 함복순 어르신은 “그때 오빠는 초가집 지붕에 숨어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사라졌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오빠 찾으러 다녔고,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내라는 구타를 받고는 성하지 못한 몸으로 들것에 실려 집에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어머니는 ‘아들도 못 찾앙 애먹엄신디 어떵 사람을 영 죽일 수가 이시냐’라고 울며불며 오빠를 찾았다”며 “그런 어머니가 어느 날 나갔다가 안 들어오더니 겨울날 모래구덩이에 총살당한 채 있었다”고 눈물을 보였다. 

그런 함 어르신은 누군가 집에 불을 질러 사돈네에서 먹고 자고 하며 겨우 지냈고, 육지에 있던 언니와 형부가 제주에 내려온 뒤 어머니 시신을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어르신은 일본에 계신 작은아버지 덕분에 비석도 세우고 그나마 살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살암시믄 살아진다’는 말처럼 나무를 해오고 고사리도 꺾으며 겨우 살아왔다. 그러나 나무를 해온 그곳이 오빠가 죽은 곳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함 어르신은 “다랑쉬 그쪽에 나무하러 가고 고사리도 꺾으러 갔다. 거기 찌그러진 땅이 있어 이상하다 싶었는데도 오빠 시체가 거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찌그러진 땅, 어르신의 표현으로 ‘멜라졍 이신 땅’은 다랑쉬굴 입구 근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랑쉬굴에서 오빠가 발견됐다는 소리를 듣고 상복을 차려입은 뒤 찾아간 굴 입구에는 당시 발견된 11구의 유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유해라도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유골들은 급하게 화장을 치른 뒤 김녕 바다에 뿌려졌다.

어르신은 “바다에 뿌릴 때도 누가 ‘오빠 시체는 아무도 모르니까 (유해들 중에) 아무거라도 가져가 뿌리면 같이 뿌려지는 거라’라고 하길래 장갑도 없이 그냥 뿌렸다”며 “오빠는 날 알아봤을 텐데 나는 (유해를)뿌리면서도 어떤게 오빠 유해인지를 모르니 서럽게 울 수밖에 없었다”고 눈물을 훔쳤다.

이어 “오빠를 보낼 때 ‘오빠, 나 몇 년을 말도 못 하고 살아완. 이제랑 널븐디 돌아댕기멍 한 풀어 댕깁서’ 했다”며 울먹였다.

그러면서 “그래도 이젠 희생자라는 말을 해주니까 이렇게 나와서 말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라며 “이제 돈도 준다고 하는데 명예만 바꿔줘도 좋다. 돈 필요없고 명예만 바꿔주면 좋겠다. 그렇게만 돼도 죽어서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고관선 어르신은 4.3당시 완도에 있어 화를 피할 수 있었으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 증조할아버지 등 집안의 3대가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폭도 자식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부산으로 떠나 육지에서 살다 다랑쉬굴에서 아버지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주의소리
고관선 어르신은 4.3당시 완도에 있어 화를 피할 수 있었으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 증조할아버지 등 집안의 3대가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폭도 자식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부산으로 떠나 육지에서 살다 다랑쉬굴에서 아버지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주의소리
4.3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는 고관선 어르신과 대담을 맡은 오화선 제주4.3연구소 자료실장. ⓒ제주의소리
4.3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는 고관선 어르신과 대담을 맡은 오화선 제주4.3연구소 자료실장. ⓒ제주의소리

 바다에 뿌릴 수밖에 없었던 내 아버지

두 번째 증언에 나선 고관선 어르신은 1947년생으로 다랑쉬굴 4.3희생자 고태원(당시 26세)의 아들이다. 

아버지 고태원이 산으로 도피한 뒤 어르신의 할아버지 고봉규, 할머니 김두천, 삼촌 고태정이 1948년 12월 21일 종달리 공회당에서 도피자가족으로 사살당했다. 증조할아버지 고계돌 역시 세화지서에 갇혀 있다가 인근 밭에서 총살당한다.

고관선 어르신은 4.3 당시 어머니와 함께 전남 완도에 살고 있어 가까스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폭도 자식’이라는 멸시와 연좌제로 인해 제주를 떠나 부산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유해가 다랑쉬굴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에 내려왔으나 땅에 묻을 뼛가루 한 줌 남기지 못한 채 바다에 뿌려야만 했다.

경남 양산에서 살고 있는 고 어르신은 이날 증언본풀이 마당을 찾아 “어릴 때 학교에서 싸움이 붙었다. 그런데 나한테 맞은 아이가 자기네 아버지랑 할아버지를 데리고 왔다”라면서 “근데 그 어른들이 ‘이 산폭도 새끼야, 산폭도 새끼 자식이 감히 누굴 때리느냐’고 멱살을 잡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가족을 억울하게 잃었음에도 폭도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것. 꼬리표처럼 달린 ‘4.3’은 지독하게 어르신의 삶을 쫓아다녔다. 나중에 태어난 첫째 아들이 사관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고 어르신은 안 된다고 했고, 이유를 들은 아들은 눈물을 삼킨 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 어르신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종달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떠나갔다. 부산에서 야간학교를 다니며 억척같은 삶을 이어가다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시작, 자리를 잡게 됐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는데,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던 외가 식구들이 탄 배가 침몰하면서 바다에 빠져 돌아가셨다. 1970년 남영호 침몰사건 피해자 가운데 9명이 외가 친척들이었다. 

고 어르신은 “우리 아버지는 4.3때 돌아가시고, 나는 장가가면서 가족들 다 죽여먹고 이게 무슨 팔자인가 싶었다”라면서도 “앞서 증언한 우리 함복순 누님이 동네 누님인데 정말 고생 많이 했다. 힘들게 살았다”고 위로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어 “어느 날엔 지역신문에 제주도 다랑쉬굴에서 유해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달리에 있는 친구한테 신문을 좀 구해달라고 한 뒤 받아보니 우리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그 신문을 가슴에 안고 이틀 내내 울기만 했다”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유해도 제대로 묘에 모시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다랑쉬굴에 가니 칠성판에 가지런히 유해들이 모셔져 있더라”면서 “그런데 누가 내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다. 또 합동묘를 하려 했는데 힘이 없다보니 화장을 시킨 뒤 바다에 뿌리게 됐다”고 했다.

고 어르신은 “아버지를 화장할 때 썼던 항아리를 어머니 옆에 묻어드렸다. 그때 나는 아버지께 ‘우리가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했다”라면서 “다랑쉬굴이 4.3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걸로 4.3에 대해 말해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이공수 어르신은 직계가족이 4.3 당시 희생되지는 않았으나 친족이 모두 희생됐다. 어르신은 당시 구좌읍 하도리가 폭도 마을로 몰려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증언했다. ⓒ제주의소리
이공수 어르신은 직계가족이 4.3 당시 희생되지는 않았으나 친족이 모두 희생됐다. 어르신은 당시 구좌읍 하도리가 폭도 마을로 몰려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증언했다. ⓒ제주의소리
4.3을 증언 중인 이공수 어르신과 대담에 나선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제주의소리
4.3을 증언 중인 이공수 어르신과 대담에 나선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제주의소리

 다랑쉬굴에 희생자 위로비라도 세워졌으면

1937년생 이공수 어르신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면수동에서 나고 자라 초등학교 3학년의 나이에 4.3이 시작됐다. 

직계가족 중 4.3희생자는 없으나 친족인 김진생(당시 52세), 이성란(당시 20세), 이재수(당시 10세)가 다랑쉬굴에서 희생당했고 이재돈(당시 19세), 이재돈의 부인 김생만(당시 21세)은 총살당했다. 이공수 어르신은 둘째 형님이 김진생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재돈과는 형제가 됐다. 

이 어르신은 “국민학교 3학년 때 이재수하고는 동창이었다. 그때 그는 다랑쉬굴에서 죽었고 하도리는 폭도 마을이라며 각종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며 “하도국민학교에 습격이 들어 불이 났기도 했고 청년들은 세화리에서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했다. 

희생당한 친척들에 대해서는 “여기 있으면 죽는다고 산에 올라간 김진생, 이성란, 이재수가 다랑쉬굴에 있었던 모양”이라며 “이재돈은 굴에 안 가고 초가지붕 틈새에 숨어 살다 나중에 산으로 도망갔는데 그때 발각돼 총살당했다. 아내도 엮여 같이 죽었다”고 했다.

이어 “다랑쉬굴에서 돌아가신 사실은 뉴스를 보고 알았다. 산에 올라가 죽은 줄로만 알았지 굴에서인지는 몰랐다”며 “형수님은 따로 말도 없이 다랑쉬굴 유해 발굴 장례식에 다녀왔고, 나는 못 갔다”고 당시를 증언했다. 

이 어르신은 “둘째 형님이 이재돈네 집안에서 대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 어머니 김진생의 양자로 들어가게 됐다”며 “그러나 4.3 연좌제를 걱정한 아버지가 호적에는 올리지 않았고, 그냥 살아왔다”고 말했다. 

한편, 제주4.3연구소는 지난 2002년부터 매해 4.3을 경험한 사람들의 직접적인 기억을 풀어내는 ‘4.3증언본풀이마당’을 열고 있다. 본풀이마당은 자기를 치유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과정이며, 4.3의 진실을 미체험 세대에게 알리는 장이다.

제주4.3연구소는 31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물한 번째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 증언본풀이 마당을 열었다. ⓒ제주의소리
제주4.3연구소는 31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물한 번째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 증언본풀이 마당을 열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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