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42) 홍경자 어르신 이야기① 고향 바다는 어르신 인생의 전부

2020년이었다. 같이 공부하시는 선생님께서 제주시 한림읍 한수리 영등굿을 다녀오셨다며 보여준 사진 두 장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진경 씨, 여기 해녀 회장님이 오메기술을 잘 만드신대. 오메기술 직접 빚어서 영등굿에 이렇게 올리시더라고.”

제주시 한림읍 한수리 영등굿에 바쳐진 오메기술독, 사진제공-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수료 류진옥.
제주시 한림읍 한수리 영등굿에 바쳐진 오메기술독, 사진제공-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수료 류진옥.
제주시 한림읍 한수리 영등굿에 바쳐진 오메기술독, 사진제공-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수료 류진옥.
제주시 한림읍 한수리 영등굿에 바쳐진 오메기술독, 사진제공-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수료 류진옥.

선생님이 사진과 함께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렇다. 2020년은 윤사월이 낀 해라서 각 월을 의미하는 열두 단지에 한 개가 더 보태져 열세 개의 단지에 오메기술을 담아 바쳤다고 한다. 이렇게 술 항아리를 바치면 심방이 열어보며 한 해를 점친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언젠가 이 오메기술의 주인공인 한수리 해녀회장님을 꼭 만나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2021년을 넘겨 2022년을 맞이해도 코로나19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루어지지 못했고 나는 점점 더 초조해져 갔다. 어렵게 영등굿을 참관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이 코로나 시국에 마을 밖 사람이 방문했다가 자칫 마을의 큰일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참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언제 그 오메기술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겨우겨우 수소문해 회장님의 번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회장님을 만나기로 한 날, 물질 가면 오후 3시쯤 작업 끝나고 뭍으로 돌아온다는 말에 그럼 어촌계 앞에서 기다리겠노라 말씀드리고 한수리 어촌계 앞에 차를 세웠다. 창문으로 보이는 어촌계 작업장 안 가지런히 엎어져 있는 술 단지 13개는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어촌계 작업장 창문 안쪽으로 가지런히 엎어져 있는 술 단지 13개.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어촌계 작업장 창문 안쪽으로 가지런히 엎어져 있는 술 단지 13개.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조금 더 주의 깊게 둘러보니 작업장에는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전혀 없이 정적만 감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옆 가게에 여쭤보니 오늘은 작업을 나가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얼른 회장님께 전화를 드리니 바다가 쎄서 작업을 안 갔다며 집으로 오란다. 해녀잠수복을 입고 테왁을 들고 오는 어르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리나케 왔지만 뭐 어떠랴, 2년 동안 학수고대했던 어르신인데 이 정도야. 회장님이 알려주신 댁으로 차를 돌렸다. 만나러 가는 길이 조금 더 멀어졌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짝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처럼 설렜다.

근처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니 바로 앞 텃밭에 아담한 어르신 한 분이 검질을 매고 계셨다. 어르신께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 해녀회장님 댁이 어디에요?”라고 물었더니 나를 향해 뒤돌아서셨다. 돌아선 어르신의 모습이 마치 동네 개구쟁이 꼬마 소녀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노란 배추꽃 사이에 파묻혀 있었던 어르신은 배추 한 장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개구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시며 대답했다.

“응, 그게 난데? 오늘 바당이 쎄서 물질을 못간이. 물질 못가면 밭일 해야주게. 파 심은 것 좀 보젠허난 정신이 밭에 강 이선 연락 못핸. 미안 이!”

마치 원래 서로를 잘 아는 사이마냥 어르신은 집에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셨다. 어르신 집에 들어가자마자 마당에 내 눈을 대번에 사로잡는 것들이 있었다.

“어? 회장님, 이거 허벅이랑 시리(시루)잖아요!”
“야이 허벅이 뭔지 알맨? 응 저거 나꺼라. 난 저런거 안 버려. 옷 갈아입는 동안 창고도 좀 구경해이. 그리고 나 회장 아니. 계장이라. 어촌계장을 12년 했어.”

저 멀리서 검질을 메고 있는 홍경자 어르신. 돌아선 어르신의 모습이 마치 동네 개구쟁이 꼬마 소녀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 멀리서 검질을 메고 있는 홍경자 어르신. 돌아선 어르신의 모습이 마치 동네 개구쟁이 꼬마 소녀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홍 어르신 마당에서 찾은 허벅과 시루. 어르신 집에 들어가자마자 마당에 내 눈을 대번에 사로잡는 것들이 있었다.
홍 어르신 마당에서 찾은 허벅과 시루. 어르신 집에 들어가자마자 마당에 내 눈을 대번에 사로잡는 것들이 있었다.

그저 마을 영등굿에 쓰이는 제주인 오메기술을 빚는 해녀할머니와의 인터뷰를 기대하고 왔던 나는 내가 오늘 만난 사람이 제주 최초 여성 어촌계장이었던, 그것도 12년 동안 어촌계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50년 9월생, 올해로 73세가 되신 홍경자 어르신과의 첫 만남이었다.

9남매 중 맏이였던 홍경자 어르신은 일곱살이 되던 해부터 허벅을 지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그 시절, 제주의 여자아이라면 허벅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 성인이 드는 허벅은 어린 여자아이들이 지기에는 너무 커서 좀 작은 사이즈의 허벅을 지는데 그 애기허벅을 어르신은 ‘대백이’라고 불렀다. 가족 수가 많기에 집에는 큰 물항이 두 개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잠잘 때까지 그 큰항의 바닥이 보이지 않게 끊임없이 물을 채우는 것이 맏딸인 홍경자 어르신의 몫이라고 하셨다. 

한수리에는 용천수가 대부분 바닷가에서 솟아난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동네 아이들은 허벅을 지고 삼삼오오 바닷가로 모여든다. 한여름이면 물이 빠질 때까지 바다에서 신나게 놀다가 썰물이 되어 용천수에서 단물이 퐁퐁 올라오면 허벅에 받는단다. 그 ‘대백이’라고 부르는 애기허벅에 물을 채워 집으로 와 물항에 채워놓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다 물이 들면 신나게 친구들하고 바닷가에서 놀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평범한 여자아이가 바로 어르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다. TV도 없던 시절 바닷속에 들어가 전복이랑 문어를 잡아 아이스크림이랑 과자로 바꿔먹었던 것이 그 시절의 최고의 놀이였다고 한다. 

한수리에는 다섯 곳의 용천수가 있었는데 어르신네는 그 용천수를 구맹이물, 웃물, 큰물, 하물, 손베기물이라고 불렀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단물이 나오는 용천수의 깨끗한 물을 마셨는데 조금만 웃동네로 올라가면 이런 용천수가 부족해 고인물인 봉천수를 식수로 쓰는 마을도 있다고 한다. 한수리는 그래도 물이 풍족한 편이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용천수의 가장 먼저 솟아나는 지점의 물은 먹는 물로, 그 아랫물은 음식을 씻는 용도의 물로, 그 아랫물은 목욕이나 빨래를 하는 물로 사용했다. 한수리 마을에서 솟는 물이지만 마을 사람들만 써야 한다는 규칙을 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옛날 기억에 상대적으로 물이 부족한 옆 마을, 대림리나 강구동, 옹포리 사람들까지 구루마(소달구지)에 이불이랑 큰 솥을 싣고 끌고 와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러 한수리까지 왔다고 회고하셨다. 

이런 용천수는 어르신이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 즈음 마을의 공동수도가 들어오면서 그 기능이 약해졌단다. 바로 어르신 집의 쇠막(소외양간)옆 공터에 공동수도가 자리 잡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규칙을 정해 순서대로 그 공동수도를 사용했다고 한다. 홍경자 어르신은 그 당시가 또렷하게 기억나신다고 한다. 한수리에서는 12가구~13가구를 한 반으로 구성했는데 그런 반이 총 13개 있었고, 반마다 공동수도를 이용하는 시간을 정했다고 한다. 물론, 마을 공동수도는 먹는 용도의 물로만 사용했다.

아무리 다른 마을보다 물 사정이 비교적 풍족했다고 해도 다른 마을보다 상황이 조금 나았을 뿐이지 물은 여전히 귀했다. 그래서 보리쌀을 씻었던 물은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설거지를 할 때 사용했는데, 보리쌀 씻은 물로 설거지를 하면 세제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불잿에 나룩찍 적셩 보리쌀 씻은 물에 그릇 씻치면 냄비영 놋그릇이영 잘도 반짝거리매. 나중에 우리 나이롱 그물 생기난 그걸로도 수세미 삼앙 설거지 했주. 밭에 수세미 심엉 그걸로도 하고. 지금은 세제영 수세미영 마트에 팔지? 편리하긴 해도 자연이 망가지매.”

불에 그슬린 재를 보릿짚에 묻혀서 보리쌀 전분기가 있는 물에 설거지하면 그릇이 반짝반짝거린다는 삶의 지혜는 어떻게 터득하셨을까. 현재의 편리함이 자연을 망가뜨린다는 어르신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자연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어르신은 친어머니를 너무 일찍 여의셨단다. 어르신이 여섯 살에 만난 새어머니는 어르신에게는 친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셨다. 수원리에서 상군이셨던 새어머니는 한수리에서도 물질을 아주 잘 하셨단다. 홍경자 어르신이 갓난쟁이 동생을 업고 엄마 젖을 먹이러 불턱으로 가면 소라와 문어를 구워주시고는 했다고 한다. 그걸 먹는 재미도 좋았지만, 또 마을 상군해녀셨던 새어머니가 자랑스러워서 불턱에 가는 길이 더욱 즐거웠다고 한다.

“어머니가 계신 불턱에 가면 해녀들이 좁쌀시루떡이랑 쌀가루에 등 붙인 떡 한 빗을 해 와서 나눠 주는거라. 그걸 그렇게 맛있게 얻어 먹어난. 그리고 그 시절에는 해녀들도 고구마를 진짜 많이 먹었지. 주식처럼 고구마를 먹었던 거 닮아. 지금에야 소라가 해녀들 돈벌이지만 그 당시에는 소라는 쳐 주지 않을 때였주게. 그래서 불턱에서 소라 많이 구워먹고 밤생이(솜, 성게랑 미슷하지만 색도 밤톨이랑 비슷하고 성게보다 쓴 맛이 강하다)도 많이 먹었던 것 닮아.”

“바다는 정직해, 내가 부지런하면 주머니도 두둑해지거든. 나는 몸은 고되도 마음은 자유로운 바다가 좋아” 인터뷰 中 /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바다는 정직해, 내가 부지런하면 주머니도 두둑해지거든. 나는 몸은 고되도 마음은 자유로운 바다가 좋아” 인터뷰 中 /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요즘에야 소라가 해녀들의 주 수입원이지만 어르신의 유년시절만 해도 해녀들에게 짭짤한 수익을 안겨주던 환금작물은 바로 미역이었다고 한다. 제주도 미역이 워낙 유명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채취한 미역을 잘 말리는 것도 중요한데, 보릿대를 바닥에 넉넉하게 깔아 통풍이 잘되게 만든 다음 그 위로 미역을 널어 말려서 팔았다.

홍경자 어르신이 일곱살쯤 되었을 때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는 해마다 집에서 오메기술을 빚었다고 한다. 흐린 차조로 구멍떡인 오메기떡을 빚어 삶은 후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키면 술 항아리 위에는 늘 노란 기름이 떴다고 한다. 그렇게 얻은 첫 청주는 그 용도가 늘 정해져 있었다. 바로 할아버지가 드시는 오합주. 

할머니가 오메기 청주에 달걀, 생강, 꿀, 참기름을 넣어 따뜻한 아랫목에 두면, 할아버지는 새벽 일찍 낚시하러 나가기 전 그 오합주를 한 숟가락씩 먹고 나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마시는 오합주가 궁금했던 어르신은 어느날, 집에 놀러 온 학교 친구들 두 명과 할아버지 방에 있는 오합주를 함께 마셔보았다고 한다. 

“난 그때 깜짝 놀란. 오합주가 이렇게 맛있는 것이었을 줄 알아서? 친구들하고 홀짝 홀짝 나눠 마신거라. 어떻게 됐게? (웃음) 친구들하고 술 취행 방에 다 뻗었지. 일어날 수가 없는거라.”

그렇게 할머니와 어머니께 어렸을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우고 맛까지 본 어르신 집안의 오메기술은 이렇다. 처음 오메기술을 빚으면 우선 오합주 용으로 쓸 청주를 떠둔다. 그리고 남은 탁주에 익힌 오메기떡과 새 누룩을 더해 다시 한번 발효시킨다. 그럼 수프처럼 걸쭉한 오메기술이 되는데 다시 한번 오메기떡과 새 누룩을 더해 세불까지 발효시키면 더욱더 걸쭉한 오메기술이 된다. 즉 오메기술을 삼양주로 빚었던 것이었다. 어르신 댁은 마을에서 오메기술 잘 빚기로 유명했나 보다. 현재 한수리 마을 영등굿에 쓰이는 제주는 홍경자 어르신의 할머니로부터 전해 온, 홍경자 어르신의 손으로 직접 빚은 오메기청주가 쓰이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전해져 온 어르신 집안의 오메기술은 어르신이 훗날 한수리 어촌계장을 맡으면서 의미 있는 술이 된다.

“나그네(심방)가 내가 어촌계장이 되니까 영등굿에 올릴 술을 만들어 오하고 하더라고. 옛날 아기 때 엄마 손 잡고 굿 구경가면 그 오메기술 올렸던 게 생각났지. 그래서 오메기술 해서 청주로 정성들여 만들었던 것이 지금까지 영등굿에는 항상 내가 만든 오메기술로 점 쳤주게.”

초등학생 홍경자는 상군이었던 엄마가 참 멋있어 보였다. 수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림중학교에 진학 하면서 해녀는 아니라도 엄마처럼 멋있게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여성이 되는 것을 꿈꾸셨던 것 같다. 당시에는 여군이 참 멋져 보여서 여군의 꿈도 꿨었고 오피스 회사원을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좋은 직장에 가고 싶어 고등학교 진학도 하고 좋은 직장에도 다니는 꿈도 꿨지만,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의 꿈은 접었어야 했다. 

중학교 졸업 후 부산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고모가 직업으로 전화교환수를 추천해주셨다고 한다. 2개월 동안의 과정을 거쳐 구내전화교환수자격을 취득하고 부산시외전신전화국에 취업하여 2년 동안 부산에서 생활하다 1968년 3월 18일 전화국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실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타지에서의 멋진 일을 하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홍경자 어르신은 열아홉살 이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주위의 열 아홉살 나이의 친구들을 떠올리면 한창 사춘기 예민한 고등학생 소녀였을텐데, 낯선 타지에서 생사의 위협을 받았던 큰 화재가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제주로 내려온 어르신은 칼호텔에서 전화교환수를 구한다는 소식에 일본어를 독하게 공부해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종면접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셔야 했다. 집에서는 이제 22살 정도가 되면 시집을 가야 할 나이니 그때까지 돈을 좀 벌어둬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 무엇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상군이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할 일은 물질이구나.”

육지에서 물질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어르신은 바로 출가 물질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열아홉 홍경자 어르신은 태왁을 지고 육지로 가는 배에 몸을 싣게 된다. 

그렇게 열아홉에 시작한 물질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현재 홍경자 어르신은 마을에서 “요왕할망 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늘 가장 정직한 것이 바다라고 굳게 믿고 살아오신 홍경자 어르신의 삶 속의 제주음식과 상군해녀로서의 삶, 어촌계장을 하며 고향의 바다가 곧 어르신 인생 그 자체가 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진다.

# 김진경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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