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68) 말글로 배워서 되글로 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말글로 배왕 되글로 쓴다(말글로 배워서 되글로 쓴다)

  * 말글 : 글을 말[두(斗, 말 두)]처럼 크게 배움
  * 배왕 : 배워(서)
  * 되글 : 글을 되[승(升, 되 승)되처럼 작게 배움

말글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뜻이고, 되글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말글이 대학을 나왔다면 되글은 초등학교를 나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학력에나 비할까.

보통교육과 고등교육인 대학과는 하늘과 땅 차로 천양지차(天壤之差) 또는 운니지차(雲泥之差, 하얀 구름과 까만 먼지 차)라 할 수 있다.

옛날에도 집밭 팔면서 큰 공부를 시킨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농촌에 묻혀 한평생 땅을 파면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내 자식만은 대학을 시켜 남들처럼 좋은 직장에 다니며 잘 살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조상전(祖上田)을 팔아 그 돈으로 공부시키면(또는 사업을 하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는 금기(禁忌)가 있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다.

대학교까지는 나와야 어디 가 행세를 하게 된다고 믿고 또 믿었던 것이다. 소위 가방 끈이 짧아서는 안된다, 아무 짝에도 못 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관념이 돌덩이보다 더 강했다. 

제주인들은 이런 인식 속에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야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해서 시골에서 제주시에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로 다퉈 보냈다. 그리고 그런 좋은 학교에 대한 선호는 대학의 무슨 과(科)를 고르느냐에 미쳐 인문계는 법과, 자연계는 의과를 지망케 하기에 이른다. 판‧검사가 아니면 의사가 돼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높다는 말로 함축하곤 했던 것이다.

1952년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제주초급대학 개교 기념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52년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제주초급대학 개교 기념식.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한데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인가. 물론 성공도 했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잘못 될 때는 무의도식하면서 밥이나 축내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한다. 죽자사자 대학을 보낸 부모를 실망시킨 것은 물론, 그야말로 불효 막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젊은이가 바로 ‘말글로 배왕’에 해당한다. 그렇게 하려 한 것은 아니나 결국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되글’로라도 쓰면 좋은데, 그도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체념해야 했다.
  
“아이고, 어떵ᄒᆞ느니. 경 되어분 걸. 다 지 팔자만썩 사는 거여.(아이고, 어떻게 할 거냐. 그렇게  돼 버린 걸. 다 제 팔자만큼씩 사는 거지.)” 그래도 옛 어른들은 좋게만 생각해 불편한 심기를 다스렸다.

반대로 ‘되글’ 배운 사람은 비록 독학으로 큰 공부는 못했지만 자신이 쌓은 지식을 못 배운 사람들을 깨치는 데 쓴다. 봉사하는 것이다. 너무도 대조적인 삶의 패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되글 배왕 말글로 쓴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써 내려온다. 사실이 그렇듯 말도 뒤집어 놓은 것이다.

고학력자의 역량이 기대한 데 미치지 못함을 빗댄 말이다. 

비유의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역량만 모자라다는 게 아니다. 큰 공부를 해 배운 것을 그나마 사회에 구석진 곳에서 허덕이며 배울 기회를 놓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라도 눈을 돌렸으면 좋은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지도 않음을 꼬집어 한 말로 들린다.

섬에 살아 열악한 환경에서도 한시도 꿈을 놓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 그게 자식 공부시키는 것으로 구체화했던 것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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