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74주년] 고흥문씨, 할아버지 각명비서 오열...아버지는 고아로 자라 “이런 일 없어야” 

제주4.3유족인 고흥문(55)씨가 제74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제주4.3평화공원 각명비 앞에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유족인 고흥문(55)씨가 제74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제주4.3평화공원 각명비 앞에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고흥문(55)씨가 각명비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진 비석에 손을 올리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손수 준비한 음식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절을 올렸다. 지난해 추념식 때는 고령의 아버지와 자녀들이 함께 했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홀로 각명비 앞에 섰다.

고씨의 할아버지 故고창국(1907년생)씨는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출신이다. 1948년 4.3이 발발하고 마을이 쑥대밭으로 변하면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마을 주민들과 산으로 몸을 피했다.

낮에는 중산간에서 숨어지내고 밤에는 마을을 찾아 먹을 것을 구했다고 한다. 한겨울 산속 생활을 하다 군경에 이끌려 목숨을 잃었다. 각명비에 적힌 사망일자는 1949년 1월18일이다.

고씨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가족들은 총살을 당한 시신 더미에서 가까스로 할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다. 급히 수습해 광령리 마을에 무덤을 만들었다.

제주4.3유족인 고홍문(55)씨가 제74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제주4.3평화공원 각명비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유족인 고홍문(55)씨가 제74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제주4.3평화공원 각명비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할아버지 손가락이 하나 없었다고. 마을 주민들이 총살을 당했는데 시신이라도 찾아야 하잖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시체 더미에서 손가락이 없는 할아버지를 찾은 거지.”

할아버지가 숨진 그해 2대 독자이던 아버지 故고인택씨는 8세 어린이였다. 할아버지를 잃은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제주시 무근성에 지내던 8촌 친척의 집으로 보내졌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으니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하며 버텼다. 고향 광령을 떠나 서귀포시에 자리를 잡으면서 조상들의 묘도 최근 한 자리로 모셨다.

매해 4월3일이면 고흥문씨는 아버지를 모시고 4.3평화공원을 찾았다. 다리가 불편했지만 한해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는 각명비를 찾아 절을 올렸다.

그러다 지난해 추념식이 끝나고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는 떠나기 전까지도 4.3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말을 자손들에게 건넸다.

“아버지를 따라 나도 매해 이 곳을 찾아. 여긴 아픔도 서려 있는 살아 있는 교육 장소야.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데려왔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해. 우리 자손들까지 겪게 할 수는 없잖아.”

제주4.3유족인 고홍문(55)씨가 제74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제주4.3평화공원 각명비에서 음식을 올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유족인 고홍문(55)씨가 제74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제주4.3평화공원 각명비에서 음식을 올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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