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일흔 일곱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최근 카톡에서 받은 메일 요약: 1970년대 초 일본의 유명대학 졸업생이 2천여 명이 응모하고 30명이 1차 시험에 합격한 한 대기업 직원 공채 시험에 합격했다. 면접 시험을 보는 날, 사장은 이 청년의 지원서를 한참 보고 난 후, “시험 점수가 좋아”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온갖 일을 하면서 공부 시켰군”, 사장은 이런 저런 질문을 한 후에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하기를, “어머니에게 목욕을 시켜드리거나 발을 씻겨드린 적이 있었습니까?”라는 사장의 질문에 청년은 무척 당황했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청년은 속으로 ‘이제 나는 떨어지겠구나!’ 생각하면서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상무께서 청년을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의 특별 지시 사항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여기에 오십시오. 하지만 사장님께서 한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목욕이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없다고 하셨죠? 내일 여기 오기 전에 꼭 한 번 ‘어머니 발’을 씻겨 드린 후에 사장실을 방문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아들의 손에, 엄마의 발바닥이 닿는 그 순간, 청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들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머니의 발바닥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저히 사람의 피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이 발바닥에 닿았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발바닥의 굳은살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없었던 것이다. 청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들은 고개를 더 깊숙이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이튿날 청년은 약속한 회사 사장님을 뵙고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장님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저에게 크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사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청년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조용히 말했다. “동경대에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 우리 회사에 수석으로 입사한 것 또한 자랑입니다 지금, 바로 인사부로 가서 입사 수속을 밟도록 하세요.”

1980년대 일본 동경대 전자과 박사 과정 때, 야수히꼬 야수다(安田靑彦) 지도교수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자기 조상은 원래 본향(本鄕)이 한국 전주남원이나 나주(羅州)일 것 같다며, 단짝 친구가 NTT(일본전신전화회사) 인사 담당자인데 ‘가끔, 어머니 발(足)을 씻는 문제를 면접 시 잘 묻곤 한다면서 그 이유를 “발은 가장 낮은 신체 부위이니, 어머니도 아버지 보다 낮은 자리에서 집안일을 꾸려나가지 않느냐?”고 설명했다. 오래되어 모두 잊어버렸는데, 카톡으로 ‘엄마의 손과 발’ 메일을 받고, 40년 늦게 도착한 소식에 놀랐다.

선친 이갑부(李甲富) 옹(翁). 2007년 가을 제주4.3 관련 인터뷰 당시 모습. 사진=이문호. ⓒ제주의소리

 아버지 왼손 손가락의 약지와 새끼손가락

필자의 선친은 1924년생, 일제 강점기간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정뜨르 비행장과 단산(簞山335m)에서 일본군의 진지구축에 동원됐다. 단산 바굼지 암벽에 진지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산은 모슬포 알뜨르 일본군 전투기 비행장을 엄호하기 위한 고사포 대공포 진지 구축 지대였다. 단산 진지 구축 동원 기간은 1945년 3월 26일부터 4월 25일까지 한 달 간  바위에 구멍을 ‘끌’로 파 나갔고, 바위 구멍에 화포 약을 삽입해 바위를 깨나갔다. 그러던 중 왼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끌’에 잘못 맞아 뼈가 부러져 버렸다. 어느 정도 나았지만, 구부러진 채 살다 가셨다. 농사 지으면서 구부러진 손가락 마디가 ‘쇠스랑(Pitch Fork)’처럼 변하도록 일을 했다. 내가 세 살 때, 인성리 단산 앞, ‘개죽은 못’에서 아버지 면회시간이었다. 아들을 보고는, ‘아이고, 내 새끼야’ 햇볕에 탄 세 살짜리 얼굴에 마른버짐을 보고 안쓰러워 한 말씀이라고 훗날 어머니께서 알려줬다. 밭일을 하는데 같이 쫒아 다녔기 때문이다. 저승에서 혹시, ‘아이고, 새끼도’ 불효(不孝)를 나무라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3년 후, 선친은 1948년 12월 초, 4.3사건 때 동네 30명 청년들과 안덕지서에 끌려가 29명이 보리밭(현천주교 화순리성당)에서 총살을 당했다. 음력 10월 28일에 동네 제사가 제일 많다. 끌려간 청년들이 모두 죽었으니 시체를 인수해 가라는 연락을 받은 어머니와 나(5세)는 소개지인 덕수리 ‘말니겁’ 할아버지 집에서 구루마를 빌려, 안덕지서로 가면서 어머니께서,‘아방이 살아시냐, 죽어시냐?’ 묻고 또 물었다. 그때 대답은 지금도 기억하는데, ‘아방 안 죽어서, 피가 다리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천지신명께서 대신 말해준 것인가. 혼자 선친이 살아나왔는데 다리엔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때 선친이 나이가 25세, 두 손이 철사 줄에 묶일 때, 손가락 때문에 조금 헐거웠고 키가 커서 맨 뒷줄에 섰기 때문에 죽을 액(厄)을 면했다. 손가락이 딱 운(運)을 갈랐다.

이갑부 옹의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진=《빼앗긴시대(조성윤, 지영임, 허호준 공저, 2007, 선인), 이갑부 편》
이갑부 옹의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진=《빼앗긴시대(조성윤, 지영임, 허호준 공저, 2007, 선인), 이갑부 편》

68년후, 95세의 선친은 돌아가시기 두 해 전에 술만 드시면 “천지현황(天地玄黃), 한일(一), 두이(二), 석삼(三)”을 입에 달고 사셨다. “큰아들아, 이 말이 뭐고.” “…….” 대답을 못하면 “설러불라”로 역정을 냈다.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며 철없는 세 살 아이가 어느새 백발인 자식이 된 게 못내 안쓰러워인가, “설러부러”다. 유언(遺言)이 된 1, 2, 3. 어디에 감춰 놓았을까? 돌아가신 후 금년에야 그 말의 뜻을 찾았다.

어릴 때, 장독대 위에서 동트는 한라산을 향해 아버지가 기도하고 절하는 모습은 오늘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는 마지막 삶을 갈구하는 모습이었다. 한일 합방 말, 1943년 어승생 진지 구축과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단산 참호 굴 파기 징용에 왼쪽 새끼손가락이 징 끌에 찔려 꾸부려진 채로 살아온 것은 고된 세월의 생명훈장이다. 험한 세월이 지나더니 1948년 4.3사건 총부리에 팡팡 29명이 죽고 혼자 살아온 것에 대한 트라우마. 죽어가는 사촌 친족과 외가, 그 세월 속에 법(法)없이 살 분이란 말을 듣는 촌노(村老)의 감사의 기도였구나, 가슴이 뭉클하다.

구억리 간이 소학교를 조금 다니고 농사만 지은 농사꾼, 한라산 들쇠(牛) 테우리 선친이 명상적(冥想的)인 훌륭한 화두(話頭)가 어디에서 떠오른 것인가? 4.3 기억을 되새기며, 먼저 가신 영령들에게 이 글을 올립니다.

산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성리 바굼지 오름. 출처=장태욱, 오마이뉴스.
산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성리 바굼지 오름. 출처=장태욱, 오마이뉴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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